053화 어제 누구랑 있었어?
“엄마아! 어디가? 나도 갈래에.”
손때 잔뜩 묻은 분홍 토끼 인형을 안아 든 예쁜 아이는 집을 나서는 엄마의 치맛단을 붙잡았다.
“도희야, 엄마 나갔다가 금방 올 거야.”
아이의 눈망울엔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이의 아빠도 같은 말을 했지만, 일 년째 돌아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엄마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눈물이 고인 아이의 눈은 한없이 반짝였다.
항상 눈물이 고여도 흘려내지 않는 강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생각하며 엄마는 애써 입을 뗐다.
“엄마 정말 금방 올 거야. 집에서 얌전히 있어.”
선생님이 그랬다.
착한 아이는 얌전한 아이라고.
말썽부리지 않고 말만 잘 들으면 부모님에게 사랑받을 거라고.
“몇 밤 자면 올 거야?”
“한 밤. 엄마 도희가 한 밤 자면 올 거야.”
“응!”
찰나의 시간이었다.
한 밤이 흘렀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만까지 셀 줄 알던 똑똑한 아이는 900번째 밤쯤 숫자 세기를 관뒀다.
학교에 들어가 친구들을 사귀면서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엄마가 말 한, 한 밤의 의미를 알아챈 나이가 된 아이였다.
* * *
종이 넘어가는 소리, 사각거리는 볼펜 소리, 의자를 끌며 ‘그윽’거리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가 주변을 메웠다.
남자는 집중이 안 되는지, 보던 책을 덮고 주변을 살폈다.
따닥 붙어 있는 대형 테이블마다 빼곡히 앉은 사람들은 각자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중엔 똘망한 눈으로 필기를 하는 이도 있고,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도 있고, 뭐가 잘 안 풀리는지 머리를 박박 긁으며 기지개를 켜는 이도 보인다.
그들의 옆에는 하나같이 두꺼운 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같은 책상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게로 향했다.
세상모르고 책에 빠져 있는 그녀를 본 남자의 입가에는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여자였다.
남자의 시선이 여자의 얼굴 곳곳을 스치지만, 어디 하나 안 예쁜 곳이 없다.
요리조리 뜯어봐도 흠잡을 게 없는 미인이었다.
특히나 남자가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눈동자였다.
집중하는 여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여자의 책 위로 작은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다.
고갤 든 여자가 사랑스러운 미소로 답하자, 남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여자에게 속삭였다.
“오늘 알바 안 가면 안 돼?”
그녀는 스치듯 옆자리의 친구를 쳐다봤다.
새근새근 숨소리만 내고 있는 강아가 잠에서 깰까,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응, 안 돼.”
“넌 좀 쉬어야 해. 그러다 몸 상하면 어떡하려고.”
“괜찮아. 나 책임져 줄 남자 있어.”
“그 남자가 오늘부터 책임져 준다는데?”
새초롬한 눈매로 입은 웃고 있는 도희가 말했다.
“그 남자한테 오늘은 안 된다고 전해줘.”
“어차피 그 남자가 책임질 건데 오늘부터는 어떠냐고 물어봐 달래.”
“그 여자도 남자 책임지려면 오늘은 안 될 거 같다고 전해달라는데?”
“나 책임져 줄 거야?”
“당연하지. 내가 먹여 살릴게.”
“오, 고민되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오늘은 쉬면 안 될까? 워낙 능력자시라 내일부터 해도 나 하나 정돈 책임질 수 있을 거 같은데.”
“오늘따라 왜 이래.”
“요즘 시험 기간이라 얼굴 볼 시간도 제대로 없었잖아. 응? 오늘은 땡땡이치는 게 어떠신가요, 강도희씨.”
“뭐래. 매일 수업 같이 듣지, 공부같이 하지, 지금도 같이 있잖아.”
“넌 책만 보잖아. 이 완벽한 피조물을 앞에 두고.”
“풉, 진짜 넌 낯부끄러운 말 잘도 해. 안 부끄러워?”
“왜 부끄러워. 사실인데. 봐.”
어깨를 으쓱한 지혁은 도희에게 주변을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지혁을 힐끔거리는 여자들을 본 도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예 넋을 놓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중요한 건 남자들도 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이 보는 건 지혁이 아니라 도희였지만.
“난 도서관 진짜 집중 안 돼. 넌 여기서 어떻게 공부하나 몰라.”
“딴 데 보지 말고 책만 봐. 그럼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와.”
도희의 눈은 이미 다시 책 속에 빨려 들어간 후였다.
“하여튼 강도희 독종이야.”
그의 말을 들은 도희는 고갤 들고 지혁을 바라본다.
“하, 남자친구한테까지 독종 소리를 듣고 싶진 않은데, 오늘 땡땡이를 쳐야 하나.”
펜을 놓고 팔짱을 낀 도희를 보니, 시선 끌기엔 성공한 지혁이었다.
“정말?”
“으그, 대타부터 물어볼게.”
“오예~ 강도희랑 데이트한다아.”
“쉿! 그리고 못 뺄 수도 있어. 기다려 봐.”
살짝 높아진 지혁의 목소리를 낮추는 도희였다.
지혁을 나무라는 그녀의 얼굴엔 행복 가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뭐? 외로웠어?”
“내가 널 외롭게 했다고?”
“그래서 네가 술 취해서 그 여자랑 잔 것도, 지금까지 계속 연락한 것도 다 내 잘못이라고?”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쏟아내는 도희였다.
“미안해, 도희야.”
한참 긴 한숨을 내쉬던 지혁이 내놓은 한마디였다.
어떤 말을 한들 지금 들을 수 있는 말은 ‘미안해’ 뿐이라는 걸 도희도 모르지 않았다.
“문지혁.”
차가운 목소리였다.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우리 제발, 부디.”
도희는 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다신 보지 말자.”
“도희야.”
지혁은 애틋한 눈으로 이건 아니라는 고갯짓을 해 보였다.
도희는 지혁의 저 표정을 보면 없던 화도 풀리곤 했다.
물론 그가 연인일 때 이야기였다.
“그만해. 너도 알잖아. 내가 뭐라고 할지.”
아랫입술을 잔뜩 깨문 도희는 머릴 쓸어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화나면 하는 행동이었다.
“근데 뭐? 아직 내가 좋다고?”
“도희야 진짜 실수야. 너무 취했고 아무런 기억도 안 나. 알잖아 나 진짜 너 사랑해.”
“그래. 한 번은 실수라고 쳐. 물론 말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쳐보자.”
“…….”
“어제 누구랑 있었어?”
“…….”
“나한테 전화 온 그 여자가 거짓말한 거니? 너는 그런 적 없는데 그 여자 혼자의 망상이야?”
“…….”
여전히 대답 없는 그였다.
“하… 하하…….”
도희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여자 안 만날게. 내가 뭐든 다 할게. 진짜 딱 한 번 실수가 어쩌다 보니 이어…….”
“네 입으로 뭐든 다 한다니까 부탁할게.”
“어. 다신 안 만나.”
“우리 그만 만나자.”
“……?!”
“이쯤에서 그만하자. 더 하면 구질구질하잖아, 서로.”
“내가 이기적이었단 거 알아 도희야. 근데 나는 이…….”
“그만. 그 입 닥쳐.”
둘 사이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어젠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오늘은 누구보다 먼 사이.
“연락하지 마, 안 받아.”
도희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찾아오지 마, 신고할 거야.”
“…….”
“회사에선 지금처럼만 해. 모르는 사람처럼.”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그녀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부디 알아서 잘 먹고 잘살고 다신 보지 말자.”
* * *
“…아침부터 재수 없게.”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욕이 흘러나왔다.
술 마신 다음 날의 아침은 이상하리만큼,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는 그녀였다.
‘하, 왜 이렇게 생생해.’
만들어진 상상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일까, 잠에서 깼는데도 꿈 속 기억들은 또렷했다.
‘으! 기억 없애는 도술은 없나.’
목이 마른 그녀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오, 머리야…….”
맑은 정신으로 깨면 뭐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숙취가 몰려온다는 게 문제였다.
냉장고 문을 연 도희는 검은 봉지를 발견했다.
들춰 보니 오징어와 맥주가 들어 있다.
‘어제 편의점을 들렀나.’
어제 일을 떠올리려 해도 머리만 지끈거릴 뿐, 아무 기억도 없는 도희였다.
고갤 갸웃거린 도희는 좋아하는 이온 음료는 집어 들었다.
‘어제 너무 마셨네. 실수한 건 없겠지. 내가 뭐 주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강아와만 술 마시는 그녀였기에 본인만 모를 뿐이었다.
별생각 없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희는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뭔가 좀 이상한 날이었다.
‘집이 이렇게 조용했나?’
그녀 혼자 사는 집이기에 조용한 건 당연했다.
‘어? 아니지.’
“도사님?”
원래 눈 뜨면 들려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도사님!”
집 안엔 고요한 정적만 흘렀다.
도희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전날 맸던 가방을 찾으려 침실과 거실을 오갔다.
‘없다.’
“내 가방!”
집안을 뛰어다니던 도희 눈에 현관 신발 옆에 놓인 가방이 보인다.
“아, 깜짝이야.”
근데 뭔가 또 이상하다.
“도사니이이임!”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설마…….’
도희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가방에 닿았다.
‘…없어?’
분명 가방에 있어야 할 누런 서책이 보이지 않는다.
“망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도희는 그대로 현관에 주저앉았다.
* * *
도심에 위치한 비산 호텔 최고층.
포근하게 스며드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창가에 서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긴 수건으로 하체만 감싼 남자는 상체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의 탄탄한 근육은 햇빛을 받아 더 매끈해 보였다.
남자는 느릿한 동작으로 커피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의 시선은 오늘따라 유난히 새파란 하늘에 뺏긴 상태였다.
‘안 지겨워?’
‘지겨워? 난 너무 좋은데.’
‘맨날 똑같은 하늘이잖아.’
‘안 똑같아! 봐, 오늘은 구름이 없어서 하늘이 더 새파래.’
‘내 얼굴 볼 시간은 없고, 하늘 볼 시간은 있지?’
‘어허, 어떻게 그런 섭섭한 말씀을! 둘 다 보느라 내가 얼마나 바쁜데.’
남자의 머릿속은 한 여자의 웃는 모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
오늘따라 도희와의 추억이 더 또렷이 떠오르는 지혁이었다.
행복할수록 도희가 생각나는 그였다.
그는 매일 생각한다.
만약 그때로 돌릴 수 있다면,도희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만약 그때로 돌릴 수 있다면, 같은 실수는 다신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지혁만 몰랐다.
전부 덧없는 상상인 것을.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휴대 전화 화면 속엔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도희의 사진이 띄워져 있다.
곧 그는 어디론가 전활 걸었다.
오늘도 받지 않을 전활 걸어보는 지혁이었다.
“자기야 뭐해?”
어느새 다가온 한 여자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어, 다 씻었어?”
휴대 전화를 차분하게 내려놓은 지혁은 여자의 손을 풀어 다시 앞으로 끌어안았다.
“응. 더 잔다고 같이 안 씻는다더니, 뭐 하고 있었어?”
“하늘이 예뻐서.”
“귀엽네.”
“나 씻고 올게.”
“응.”
남자가 샤워실로 들어가자, 여자는 자신의 핸드백에서 전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최근 통화 목록엔 이젠 그녀도 익숙한 전화번호가 떠 있다.
‘강도희.’
곧 여자가 보고 있는 화면에서 그 번호만 사라졌다.
화장실로 들어간 남자가 삭제한 것이다.
여자가 자신의 폰을 복제해서 보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남자였다.
우아한 손짓으로 휴대 전화를 다시 핸드백에 넣은 그녀는 어디론가 전활 걸었다.
“김 기자님, 저 모아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