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제,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통화가 연결되자 도희는 쉬이 떨어지지 않던 무거운 입을 겨우 열었다.
“…도하씨, 어제 혹시…….”
—속은 괜찮으세요?
“아… 그럼요.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과음하신 거 같아서 걱정했어요.
“혹시 어제…….”
‘근데 뭐라고 물어? 내 가방에 책 봤냐고? 괜히 물건 없어졌다고 의심한다고 생각하면…….’
—저 지금 도희씨 집 앞이에요. 준비되면 나오세요.
“네?!”
‘아 맞다! 어제!’
이제야 어제 우주와의 통화가 떠오른 도희였다.
‘그럼 설마…….’
급히 집을 나선 도희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예상대로였다.
“도희씨!”
아침부터 과하게 해맑은 우주와.
“팀장님.”
과하게 단정한 도하까지.
덜 말린 머리에 팅팅 부은 퀭한 눈, 다크써클은 턱까지 내려온 도희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었다.
‘내가 미쳐 증말…….’
“형사님은 정말 제 말 안 들으시네요.”
“왜 또 형사님이고, 왜 저만 혼내시나요. 그리고 전 오늘 정말 일하러 여기 온 겁니다.”
장난 가득한 미소의 우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일요?”
“수사상 비밀입니다.”
우주를 짧게 흘겨본 도희는 도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도하씨도 내일부턴 오지 마세요. 박현일도 구속됐고 저 진짜 괜찮아요.”
“네. 그렇게 할게요.”
무덤덤한 말투와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만 도하씨한테 신세 좀 질게요. 형사님은 일하러 가셔야 하니까!”
뒷말을 강조하는 도희였다.
“예. 그러죠.”
우주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곧 봬요. 도희씨.”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돌아서는 우주였다.
* * *
‘뭐라고 물어보지. 하… 이럴 때 방법은 하난데.’
또 그녀의 주특기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도하씨 혹시 어제 제 가방에서 책 한 권 못 보셨어요?”
“책이요?”
운전하는 도하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모르나 본데.’
같은 동네이기에 회식이 끝나고, 둘이 돌아왔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 물어본 말이었다.
‘그럼 대체 어디…….’
“말하는 책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에?”
“어제 저한테 주셨어요.”
“제가요?”
“네. 말하는 책이 있다면서요.”
“네에?!”
‘이건 또 뭔……!’
“하하… 말하는 책이라뇨.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재밌던데요. 도희씨가 한 말들.”
“…제,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뭐, 도술 부리는 책이 있다. 말도 한다. 난 무적이다. 난 이제 부자다. 정도?”
“…….”
도하가 운전하느라 도희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표정 관리에 실패해 사색이 된 도희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강도희 미친 거야? 돈 거야? 와… 어떡해, 어떡하지 이제? 하, 미치겠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더 이상 뜸을 들여선 안 된다.
‘그리고… 그걸 누가 믿어.’
더군다나 술 취한 사람의 말이었다.
“제 주사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더 오바스럽게 말하는 도희였다.
“진짜 금주해야 될까 봐요. 술 취하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줄은 몰랐네. 하하.”
운전하던 도하는 고갤 돌려 도희를 힐끔 본다.
“하하… 미안해요.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고, 어제 도하씨가 고생이 많았겠다.”
“고생 아닌데. 귀엽던데요.”
“네?”
“술 취한 도희씨 자주 보고 싶던데.”
“네?”
‘얘도 어제 과음했나.’
“책은 저녁에 드려도 될까요? 집에 있어서요.”
이래저래 도희를 괴롭히는 지끈거리는 두통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아오, 머리야…….’
* * *
“팀장님 어제 일 기억나세요?”
소하의 첫 마디였다.
“…뜨문뜨문? 어제 오랜만에 술 마시다 보니 조절이 안 됐나 봐요.”
과음의 원인이 자신의 소문에 관한 충격적인 말들을 많이 들은 터라 속상해서였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는 도희였다.
“어쩐지! 스파이 어쩌고 하실 때부터 취한 거 같았다니까요!”
해맑게 내뱉는 소하의 말에 도희의 얼굴엔 어둠이 스몄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진명과 두산을 빠르게 스쳤다.
‘거기까진 기억나지.’
스파이 이야기를 일부러 꺼낸 도희였다.
일종의 경고였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경고.
도희에겐 제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전 상무는 스파이가 있다고 짐작하는 눈치였다.
‘내가 스파이다, 접어.’
어제 도희의 질문에 손가락을 접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유난히 어색한 표정의 두 사람을 포착 해낸 도희였다.
‘분명 둘 중 하난데.’
사실 스파이가 있다 한들 크게 상관은 없었다.
무슨 일을 하든 대놓고 크게 사고치는 도희였기에 미리 말 좀 전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내가 그런 소릴 했어요? 어머, 나 진짜 많이 취했나 봐. 전날 스파이 영화 보다 잠들어서 그랬나 봐요. 푸하.”
팀원들은 아직 도희가 거짓말할 때 더 과장되게 군다는 걸 몰랐다.
“팀장님 어제 집은 잘 들어가셨어요?”
도희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진명이었다.
“어제 도하 대리님이 고생했죠. 얼마나 취했는지 전 기억도 안 나요.”
이건 사실이었다.
“근데 저희 오늘 전화선 이렇게 끊어 놔도 될까요?”
“두산씨! 뭔 걱정이 그렇게 많아요. 팀장님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죠.”
소하가 두산의 어깨를 토닥였다.
“항의 전화 받는다고 일을 못해서야 되겠어요? 신문고 게시판 관련 문의 글은 메일로 받는다고 공지 올려놨으니까 괜찮…….”
지이이잉—
말을 멈춘 도희의 시선이 향한 곳은 휴대 전화 화면이었다.
[도희씨 오늘 점심 어때요?]
문자를 본 도희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오늘 약속 있어요.]
[어제 일로 상의드릴 게 있는데 잠깐이라도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어제 일?’
[무슨 일요?]
[어제 제가 뭘 좀 봐서요. 여쭤볼 것도 있고.]
‘…이건 또 뭔 말이야. 아, 머리야.’
도희는 답답한 마음에 바로 전활 걸었다.
—네, 도희씨.
“무슨 말이에요?”
—나오시면 말씀드릴게요.
“뭔지 말씀하시면 나갈게요.”
—어제 술 많이 취하셨던데…….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리는 우주였다.
“제가 어제 우주씨도 만났어요?”
—저희 셋이 함께한 거 기억 안 나세요?
셋이 함께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설마…….’
“제가 우주씨한테도 이상한 말 했나요?”
—나와서 들으시죠.
“약속 있어요.”
—아님 뭐, 어제 일 다 말하고 다니죠.
관자놀이를 만지다, 머릴 쓸어 올린 도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몇 시에 뵐까요.”
* * *
“어제 일 뭘 말해요?”
음식 주문 후 대뜸 질문부터 던지는 도희였다.
“뭐긴 뭐예요. 도희씨 주사 있다고죠.”
“어제 큰 실수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어제 우주는 술 취한 도희를 부축하는 도하를 발견했고, 셋이 같이 도희를 집까지 데려다줬단다.
“근데 도희씨 어제 이도하한테 이상한 말 했어요?”
“아니요?”
“아까 그러셨잖아요. ‘제가 우주씨한테도 이상한 말 했나요?’ 그 말은 이도하한테는 이상한 말 했다는 건데.”
“아니거든요. 근데 왜 이도하예요? 도하씨가 우주씨 친구는 아닐 텐데.”
“저희 어제 친해지기로 했어요.”
“네?”
“그런 게 있어요. 남자들만의 방식이랄까요.”
어떻게 기억이 이렇게 캄캄할 수가 있을까.
어젯밤만 떠올리면 암흑 그 자체였다.
“근데 해장치고는 과하지 않나?”
우주는 쟁반국수를 비비며 도희가 시킨 마늘 보쌈 정식을 보고 말했다.
마늘 소스 잔뜩 넣은 큰 고기쌈을 한입에 넣은 도희가 꾸역꾸역 씹어 먹으며 입을 열었다.
“먹고 사람 되려고요.”
“네? 풉.”
“전 술 먹은 다음 날 고기가 땡겨요.”
“꼭 기억할게요.”
“별걸 다.”
“제가 원래 좀 섬세한 남자라.”
“근데 형사님은 언제까지 저희 동네에 계세요?”
“왜요? 설마 보기 싫어요?”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 그냥 궁금해서요.”
아무래도 형사와 자꾸 엮이는 게 부담스러운 도희였다.
‘의심도 많은 거 같고.’
“저 엄청 청개구립니다. 보기 싫다 하면 자꾸 나타날걸요?”
“보고 싶다고 하면요?”
“종일 쫓아다녀야죠.”
“이봐, 이봐. 이렇게 부담스러운 말을 자꾸 하는데 어떻게 편하게 만나요.”
“하… 작전을 변경해야겠네요.”
“그리고 오늘도 그래요. 오지 말래도 기어코 오시더니, 설마 어제도 저 기다리신 거예요?”
“어제는 도희씨 기다린 거 아닙니다.”
‘그럼?’
“이도하씨에게 볼 일이 있어서요. 당분간 제가 몰래 이도하씨 좀 살펴봐야 하거든요.”
“그거 민간인 사찰 아니에요?”
“용의자 마크랄까요.”
“용의자요?”
“공교롭게도 이도하씨 오션 오피스텔 살인사건 용의선상에 올라있어요. 뭐, 아직은 조사 중이지만.”
“예? 그 살인사건? 도하씨는 딱 봐도 CCTV 찍힌 남자랑 완전 다르잖아요.”
“공범일 수도 있죠.”
“예? 진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우주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두 눈썹을 들썩였다.
“증거는요? 뭐가 있으니까 용의선상에 오른 거 아니에요?”
“왜 도희씨가 흥분하세요.”
“그게… 우리 팀원이니까요. 살인사건 용의자라니 당연히 당황스럽죠.”
“이도하씨가 이사 온 1003호. 사건이 일어난 1004호와 집 주인이 같습니다.”
“집주인은 명의만 빌려준 거지 사건과 관련 없는 거 같다면서요?”
이미 우주에게 사건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도희였다.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그 오피스텔에 그 집주인 명의가 더 있네요?”
우주는 손에 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나는 사건 호실 1004호, 하나는 사건 호실 옆 이도하씨가 이사 온 1003호, 그리고 하나는 공실인 이도하씨 아래층 903호.”
하나씩 펴진 우주의 손가락은 세 개가 펴져 있었다.
“무려 세 채예요.”
“이상하긴 하네요.”
“근데 또 갑자기 그 집주인이 연락이 안 됩니다. 그래서 어제 이도하씨에게 뭘 좀 물어보려고 기다렸는데…….”
도하가 도희와 함께 있는 걸 보고 눈이 돌아간 우주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기 싸움만 하다 돌아갔다.
“그래서 몰래 도하씨를 살펴보시겠단 말씀이신가요? 혹시나 수상한 점이 있는지?”
“싫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시간 낭비하시는 거 같아서요. 고생 덜어드릴게요. 제가.”
“어떻게요?”
순간 우주의 눈에 스친 이채를 알아채지 못한 도희였다.
“이렇게요.”
우주가 말릴 새도 없이 도희의 손은 이미 통화버튼을 누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