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그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뭐예요?”
“선배님! 뭐 좀 있습니까?”
도희와 지 순경이 연이어 베란다로 들어섰다.
그 뒤엔 도하도 있었다.
“저기 틈 보이지?”
우주의 손가락이 천장을 가리켰다.
베란다 한쪽 면을 차지한 철제 선반 뒷벽을 보니, 벽 가장자리를 따라 미세한 틈이 나 있다.
“어? 선배님 잠시 나와 보십쇼.”
우주가 도하를 바라보자, 도하는 괜찮다는 고갯짓을 보였다.
우주가 물러서고 지 순경은 양손으로 철제 선반 양끝을 잡았다.
그의 산만 한 덩치는 철제 선반 대부분을 가릴 만큼 아주 컸다.
“짐 빼고 들어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무거울…….”
“으!!!”
도희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철제 선반은 지 순경의 기합과 함께 앞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우주도 지 순경을 도와 철제 선반을 다른 쪽 구석으로 밀어 옮겼다.
장정 둘이 나서니, 도하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어? 이거 혹시…….”
철제 선반을 들어내니 빈 벽이 여실히 드러났다.
빈 벽의 모든 사각 가장자리 부분에 검은 실선이 보인다.
동시에 달려든 우주와 도희는 빈 벽의 양쪽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더듬기 시작했다.
“으!”
벽의 우측 부분을 더듬던 도희가 힘껏 벽을 미는 순간!
그그그극—
오른쪽 벽만 비스듬히 안으로 밀려났다.
“헐.”
“도희씨, 제가 할게요”
도희가 서 있던 자리를 차지한 우주가 다시 벽을 밀기 시작했다.
그드드드득—
안간힘을 쓰던 도희와 달리 우주는 너무도 손쉽게 벽을 밀어냈다.
왼쪽은 고정된 채 오른쪽만 밀려들어간 벽 사이로 이들이 서 있는 곳과 비슷한 공간이 나타났다.
“1003호 베란다네요.”
“연결돼 있는 건가요? 범인이 양쪽 호실을 드나들었단 말인가?”
“CCTV 확인할 때도 옆집은 확인하지 않아서… 재확인부터 해야겠네요.”
형사들은 사건이 일어난 호실만 중점적으로 확인한 상태였다.
“일단 여기서 물러나시죠. 감식팀 부르겠습니다.”
“제가 전화하겠습니다.”
지 순경이 감식팀을 부르려는 그 순간.
“여기 좀 보시죠.”
한발 물러서 상황을 지켜보던 도하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의 고개는 베란다 창문 밖을 향해 있었다.
“뭐죠?”
“범인이 이 집과 사건 호실을 드나들었다면, 아랫집도 가능할 거 같아서요.”
도하의 손가락이 창밖의 무언가를 가리킨다.
“저건…….”
“건물 외벽에 설치된 비상계단입니다.”
위아래 호실이 연결되어 비상시 사용하는 철제 계단이었다.
* * *
곧 도착한 수색팀은 베란다 곳곳 남겨진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집에 이사 오신 후 방문하신 분들을 알 수 있을까요?”
사무적인 말투의 우주였다.
“이사 첫날 이삿짐 직원 분들, 그리고 오늘 오신 분들, 그 외엔 없습니다.”
질문에 대한 간결하고 정확한 대답이었다.
“시간이 좀 소요될 거 같은데… 오늘 수사 협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건 호실과 1003호의 연결 사실이 드러났다.
연관 가능성이 드러난 이상 이미 형사들은 다른 증거를 확보하려 집안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편하게 조사하십시오. 전 호텔에 가 있겠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발길을 돌리려던 도하는 고갤 돌려 우주를 쳐다봤다.
“이 집 계약하신다고 방 보실 땐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안 보고 계약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대화를 끝낸 도하는 짐을 챙기려 방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아랫집도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영장이 없잖냐.”
이제 막 거실로 들어선 이 경위가 대신 대답했다.
“이 경위님 오셨습니까.”
“어, 우 경위 고생했어.”
“힘은 제가 썼습니다.”
“그래. 막내 너도 고생했다.”
“박 형사님은요?”
“여기 집주인 놈 잡으러 공항 갔다.”
“에? 공항요?”
막내의 실눈이 똥그래지며 크게 뜨였다.
“멍청한 놈이 비행기 타고 해외로 가려고 했단다. 그것도 하와이.”
“허! 혹시 사건과 관련 없는 건 아닐까요? 그게 아니면 진짜 멍청하지 않고서야 비행기로 해외 도주라뇨.”
“출국 금지까지 시킬지 몰랐겠지.”
“지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연락 다 안 받은 걸 텐데, 형사 연락 씹고 잡으러 올지 몰랐다고요?”
“감사하자. 똑똑해서 밀항했으면 잡지도 못했어.”
“그럼 이제 곧 영장 나오겠네요?”
“오늘 잡으면 내일은 나오겠지.”
“하아…….”
영장이 내일 나온단 소리에 저도 모르게 옅은 숨을 내뱉은 도희였다.
그녀의 한숨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소파에 앉아 이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는 도희였다.
“아… 죄송해요. 배가 고파서.”
또 생각나는 대로 핑계를 댄 도희였다.
“어? 강도희씨?”
둘은 이미 실종 사건 때 만난 적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강도희씨가 왜 여기…….”
의아한 눈빛으로 우주에게 눈짓하는 이 경위였다.
“여기 세입자 이도하씨 지인입니다.”
“아…….”
지이이잉─
이 경위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집주인 잡았나 보네.”
이 경위는 전활 받으며 서재로 들어갔다.
‘하! 망했다.’
그 말은 들은 도희의 가슴은 철렁했다.
‘도사님 이제 어떡해요!’
—시간이 없구나.
형사들이 영장을 받아 먼저 아랫집을 조사한다면 모든 물건은 증거품이 될 확률이 높았다.
‘공실이니까 물건들 전부 범인과 연관 있는 걸로 알고 가져갈 수도 있어요!’
—오늘 밤에 살펴보는 수밖에.
‘근데 아래층 집이 확실해요?’
—맞다 뿐일까. 그것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보통 요물이 아님세.
‘요물이 다 요물이죠, 뭐.’
아랫집에 몰래 잠입할 생각을 하니, 골이 지끈거리는 도희였다.
—허! 다 같다니. 미련한 소리. 자네가 좋아할만 한 요물도 있으이.
‘비싼 거예요?’
—금을 낳는 함도 있지.
“느에?”
새어 나온 말을 막느라 급히 입을 틀어막은 도희였다.
‘뭐라고요? 금을 낳아요?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자네가 이럴 줄 알고.
‘아니이, 그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쯔쯧, 재물에 눈이 멀어서는.
‘쬐끔. 쬐끔 더 노력했겠죠. 근데 금을 어떻게 낳…….’
—함을 열 때마다 금 한 냥이 생기는 함일세. 허나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야.
‘금 한 냥이면 얼마지.’
—내 살 적엔 면포 30필 정도의 값어치였으니 지금도 꽤나 할 게야.
‘금 한 냥이면 열 돈!’
휴대 전화를 검색하던 도희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가슴을 움켜줘도 소용없었다.
검색대로라면 함을 열 때마다 몇 백만 원이 생기는 셈이었다.
“도희씨 어디 안 좋아요?”
가슴을 움켜쥔 도희를 본 우주가 다가왔다.
“아니에요. 배가 고파서…….”
배고프다고 가슴을 움켜쥐는 여자라니.
얼굴을 쓸어 올리며 끌끌 웃던 우주가 환한 미소로 답했다.
“배고플 만하죠. 나갑시다.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 * *
퇴근 후 도하 집부터 오느라 저녁 시간은 한참 지났다.
“제가 사겠습니다.”
짐을 챙겨 나오던 도하가 나섰다.
“뭐, 그러시죠.”
그렇게 모두가 잠깐 집을 나서려는데 통화를 끝낸 이 경위가 나타났다.
“이도하씨 계약서 좀 볼 수 있을까요?”
“예. 서재에 있을 겁니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는 도하였다.
“무슨 일입니까?”
우주가 물었다.
“이 집 주인 최근 계좌 내역 다시 뽑았는데, 전세금 입금된 게 한두 개가 아니라네.”
“그놈 명의로 된 게 여기 세 채밖에 없을 텐데요?”
“이중 계약하고 돈 긁어모아서 튀려고 한 걸 수도 있지.”
“여기 있습니다.”
도하가 서류 한 장을 들고 나왔다.
“사진 좀 찍겠습니다.”
“예.”
“그럼 도하씨가 전세 사기라도 당했단 말인가요?”
도희는 힐끔거리며 도하의 표정을 살폈다.
“일단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저쪽 계좌 동결했고 이미 입주까지 하신 상태라 그나마 유리하신 상황입니다.”
금세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우주가 다가왔다.
“일단 나가시죠. 식사하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 *
명의만 빌려 준 집주인은 경찰의 전화를 받고 바로 집을 내놓았다고 한다.
자신의 명의를 빌린 실주인이 경찰에 쫓기는 살인범인 걸 알았으니,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단다.
도하가 이사 온 1003호뿐만 아니라 903호도 이중계약 된 상태였다.
총 다섯 명의 피해자 중 도하만 먼저 이사를 온 거라고.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동결된 그 사람의 계좌에 돈은 그대로 있습니까?”
도희와 도하가 동시에 물었다.
“네. 계약금들과 입금된 전세금들은 그대롭니다.”
“제가 선계약입니까?”
“네. 1003호는 이도하씨가 선 계약자라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후 계약자는 법정 싸움까지 가면 계약금 반환되는 기간이 좀 길어질 거 같습니다.”
“그 집주인이 이중계약 인정하고 반환 의사 표해도 안 됩니까?”
도하의 말에 긍정하듯 도희도 고갤 끄덕였다.
“흐음… 더 조사는 해봐야겠지만, 아직 집주인이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도 없고… 반환 의사 표시로 동결 계좌 풀어보겠습니다.”
우주에 대답에 또 도희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이제 범인만 잡으면 되겠네요?”
다시 맑은 미소를 되찾은 도희였다.
“이도하씨 집에서 뭔가 증거가 나오길 바라야죠. 아래층도 내일 영장 나오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요.”
‘오늘 아래층 조심히 둘러봐야겠네요. 내일 경찰한테 괜한 꼬투리 안 잡히려면.’
—채비 잘하거라. 자네만 조심하면 되느니.
‘그럼 일단 집에 가서 준비 좀 하고 와야겠어요.’
—준비할 게 뭐 있다는 말이냐.
‘도사님! 요즘 같은 최첨단 시대에 흔적 없는 도둑질이 어디 쉬운 줄 아세요? 잘못하면 내일 옥에 갇히는 건 저라구요.’
—그것도 나쁘지 않구나. 거긴 악한 놈들 천지일 터이니.
‘허! 너무하시네, 정말.’
—다 뿌린 대로 거두느니.
* * *
고층 오피스텔 앞 골목.
검은 모자,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인이 창문을 보며 층수를 세고 있다.
“저기서부터 1호니까 1, 2, 3… 그리고 밑에서 9층이니까 4, 5, 6, 7… 저기네요.”
여인의 손가락이 정확히 한 창문을 가리켰다.
903호의 베란다였다.
—준비는 되었느냐.
긴 머리는 묶어 올려 돌돌 만 뒤 머리망 안에 넣었고, 장갑에, 신발 위에 검은 봉투까지 덧신은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가자꾸나.
“넵.”
도희의 손이 그녀가 멘 메신저 백 속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가방에서 새어 나온 연붉은빛은 도희를 감쌌다.
“악!”
철퍼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희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졌다.
—쉿!
‘또 공중으로 이동했죠! 아오…….’
도희는 연신 자신의 엉덩이를 문질렀다.
—크흠, 어서 불부터 켜 보거라.
이제 불은 도희에게 맡기는 도사였다.
암막 커튼 때문인지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집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요.’
도희가 주머니 속 휴대 전화를 꺼내는 찰나.
띠리릭—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 쪽이 밝아진다.
‘어……!’
딱 봐도 수상한 차림으로 거실 한복판에 앉아 있는 도희와.
“…도희씨? 여기서 뭐하세요?”
역시나 수상한 차림으로 현관을 들어서는 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