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몸은 어제의 기억을 지워 버렸다.
도희는 차마 고갤 돌리지 못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누가 서 있을지.
“강도희.”
재차 도희의 심장을 내려 앉히는 목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칵테일 잔에 닿은 도희의 손은 긴장한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기야.”
그 목소리다.
‘저 어제 문지혁씨랑 같이 있었어요. 호텔에서요.’
여자의 목소리의 고갤 돌려 버린 도희였다.
항상 궁금했다.
문지혁이 만나는 여자가 어떤 여자일지.
여자는 고운 몸 선이 드러나는 우아한 검은색 원피스는 입고 있다.
어둑한 조명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그녀의 하얀 피부가 도희의 시야를 하얗게 가렸다.
‘…예쁘네.’
여자의 팔은 문지혁의 허리에 둘러 있었다.
도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현실 감각이 사라진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몽롱하다.
술 때문인지, 털어내지 못한 감정 때문인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솟아올랐다.
“왔어? 어디 앉을까.”
그렇게 문지혁은 여자와 함께 멀어져 갔다.
도하는 그들이 사라진 곳을 넋 놓고 바라보는 도희의 손을 잡고 급히 바를 나섰다.
* * *
문지혁은 도희의 전부이자,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런 그가 도희를 떠났을 때.
도희는 다신 남자를 믿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 * *
어김없이 아침은 밝았다.
전날 방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몸은 어제의 기억을 지워 버렸다.
지이잉—
[도희씨 준비되시면 문자 주세요.]
정말 딱딱한 문자였다.
그러나 도희에겐 어떤 말보다 다정한 문자였다.
“웃긴 남자야. 회사에선 팀장님, 밖에선 도희씨. 공과 사가 아주 확실하네. 참나.”
빈정대는 말과 달리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다.
답장을 보낸 도희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나와요. 아침 먹게.]
* * *
“와, 특보! 감사부 지금 난리 났대요!”
소하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며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지금 막 그룹 본사에서 온 사람들이 감사부 서류 다 쓸어 담고! 한 부장님은 경찰에 잡혀가고 부서원들은 전부 개별 면담 중이래요!”
사내 소식은 마당발인 소하가 항상 빨랐다.
“예?!”
놀란 진명이 소릴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찰까지 왔다고요?”
두산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네! 완전 다 뒤집던데요? 사무실 난리 났어요! 근데 중요한 건 부사장님 사무실에도 본사 직원들이 올라갔대요!”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그녀는 곧 숨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소하씨.”
도희의 목소린 평소와 같았다.
“네, 팀장님.”
“시안은 받아오셨나요?”
차분히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고운 목소리.
“아! 지금 드리려고 했어요!”
“네. 오늘 점심은 나가서 먹어야겠네요. 다들 메신저에 먹고 싶은 메뉴 올려 주세요. 투표해요.”
역시나 상냥한 어투였다.
“팀장님 지금 감사부는 난린데 저희는 괜찮을까요?”
“우리가 감사부랑 관련이 있나요?”
“음, 저흰 개선부 소속이 감사부잖아요!”
“저희도 조사한다고 하면 조사받으면 되죠.”
바쁘게 눈짓을 주고받는 진명과 두산을 힐끔 쳐다본 도희가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면 겁먹지 말아요.”
그들에게 진심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 * *
회사는 며칠 동안 떠들썩했다.
부사장 포함 그와 가까운 많은 이들이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정작 부사장 황이재는 손쉽게 풀려났다.
부사장이 지시한 증거와 정황이 확실함에도 부사장에게 잘 보이고 싶은 한 부장과 박 비서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박 비서의 죄명은 무려 살인미수였다.
한 부장과 함께 감사부원들 몇몇도 재판에 넘겨질 예정이었으며 당연히 회사 징계도 피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감사부엔 여러 공석이 생겼고, 부장직엔 도희가 오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감사부 경찰 조사랑 본사 감사받은 거 전부 강도희가 한 일이라던데?”
“강도희, 진짜 대단하네.”
“야, 난 이제 무서울 지경임.”
“와, 대리에서 팀장도 놀랄 지경인데 이제 부장까지 다는 거야?”
“아니, 이 정도면 진짜 회사 실세 아니냐?”
“부사장도 이젠 강도희한테 ‘깨갱’ 해야 하는 거 아냐?”
“부사장도 이번에 조사받으면서 끝났지, 뭐.”
“정황 증거 확실하다는데 혼자 빠져나왔잖냐. 아직 빽은 있는 거 같은데?”
“하긴 그 온갖 비리를 한 부장 혼자 저질렀다는 걸 누가 믿어. 한 부장으로 꼬리 자른 거 뻔한데.”
“그나저나 강도희는 줄 진짜 잘 섰네. 이제 장 이사 라인 살아나는 거 아냐?”
“강도희는 사장 라인이지, 장 이사 라인은 아니잖아?”
“사장 라인이 더 확실하긴 하지. 부럽다. 그 나이에 부장이라니, 이제 진짜 성공한 여자네.”
“개선부 애들만 노났네. 이젠 진짜 감사부 위에 개선부잖아.”
곧 사람들은 감사부 위에 개선부라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요한 태풍의 눈, 개선부는 그 어느 때보다 잔잔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팀장니임~ 우리 오늘도 밖에서 먹어요! 제가 파스타 진짜 잘하는 곳 알아 왔어요.”
“저희 또 파스타 먹나요? 오늘은 해장국 어떻습니까.”
“헐.”
도희의 외마디 외침에 팀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해장국 완전 좋아요. 저도 오늘 국물이 땡겨서…….”
소하의 눈칠 보며 읊조리는 도희를 본 팀원들의 입가엔 소소한 미소들이 떠올랐다.
“치이, 알았어요! 대신 내일은 파스타 어때요?”
“소하씨한테 파스타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봅니다.”
“다들 이러기에요? 막상 가면 맛있게 먹으면서!”
“하루 이틀이야 맛있게 먹죠! 삼 일 연속은 심하잖습니까.”
투정 부리는 말과 달리 표정은 밝은 진명이었다.
“저도 오늘은 해장국이 좋을 거 같네요.”
서 대리도 금세 팀원들과 많이 가까워졌다.
“소하씨, 서류 확인은 끝났나요? 좀 도와드릴까요?”
업무에 익숙해진 팀원들은 본인 업무는 물론 소하의 업무를 돕거나 줄줄이 안건을 올리고 있었다.
“다들 업무 대충 마무리된 거 같은데, 오후 회의 당겨 하고 밥 먹으러 갈까요?”
* * *
막 해장국 한 숟갈을 뜨려는데 소하가 말을 걸었다.
“팀장님 저번에 말씀하신 그 스토커 아이디 알아보는 건 어떻게 되셨어요?”
“아, 친구한테 말은 해뒀는데, 오늘 물어볼게요.”
‘이강아 요즘 바쁜가.’
며칠 동안 통화를 한 기억이 없다.
‘전화해봐야겠네.’
“아! 그리고 오늘 새로운 감사부장님 오신대요.”
소하는 사내 소식통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팀장님 알고 계셨어요?”
어깰 작게 들썩인 도희는 말없이 눈웃음만 지었다.
“우린 팀장님이 부장님 되시는 줄 알았어요.”
“풉, 왜 소하씨가 실망해요.”
“아니! 사람들이 팀장님이 부장될 거라면서 욕이란 욕은 다 했는데! 진짜 부장이라도 돼야 안 억울하잖아요.”
“저 하나도 안 억울해요.”
사실 부장 자리를 거절한 것은 도희였다.
“저는 팀장님 부장 자리에 오르시는 거 반댑니다.”
진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뜬금없는 정색에 모두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팀장님 가시면 개선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될 걸요.”
“걱정 마요. 저는 부장되기 전에 퇴사할 거라니깐요.”
“그러고 보면 팀장님이랑 도하 대리님이랑 좀 닮았어요!”
“네?”
도희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짓자, 묵묵히 식사하던 도하도 고갤 들어 소하를 쳐다본다.
“가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돼요.”
“두 분 분위기도 비슷하잖아요. 속 모를 표정 짓는 것도.”
진명도 보탰다.
“근데 팀장님은 정말 만나는 남자 없어요?”
가볍게 묻는 소하의 질문에.
“…없어요.”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도희였다.
* * *
“반가워요. 강서진입니다.”
새로운 감사부장은 곱지만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의 여성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도희입니다.”
강 부장은 허리 숙여 인사하는 도희를 보며 온화한 미소로 답했다.
“강 팀장 무척 보고 싶었는데, 예쁘네요.”
“강 부장님도 아름다우십니다.”
두 여자가 풍기는 분위기에 팀원들은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부장님 반갑습니다. 저는…….”
진명의 인사를 시작으로 개선부 팀원들 모두 인사를 마쳤다.
* * *
“…헤에? 여기 진짜 우리 사무실이에요?”
소하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햇빛이 쏟아지는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그러게. 당근인지, 채찍인지 모르겠네.”
뚱한 표정으로 짐을 정리하는 두산과 진명의 말에 소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당연히 당근 아니에요? 개선부 고생했다면서 사무실 옮겨 준 거잖아요.”
이곳은 원래 VIP 접객실이었다.
강 부장은 그동안 고생했고 전적으로 믿고 돕겠다며 이곳으로 개선부 사무실을 옮겨 줬다.
“부장님이 옮겨 준 거 아닌 거 같은데.”
두산의 혼잣말에 진명이 답했다.
“애초에 팀 하나가 임원 사무실 밑층을 쓴다는 게 말이 안 되지.”
말을 마친 진명의 시선은 묵묵히 책상 정리를 하고 있는 도희를 향한다.
“새로 오신 부장님이 능력이 좋으신 걸지도 모르죠.”
어째선지 오늘따라 표정이 어두운 도하였다.
“하긴, 강 부장님 본사에서도 이름 꽤 날리셨다는 소문이 있긴 하더라고요.”
강서진 부장은 본사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감사부 비리 사건 뉴스까지 났잖습니까. 본사도 신경 쓰는 거 아닐까요.”
“우리만 더 바빠지겠네.”
“여러분! 심각한 이야긴 그만하고 여기 봐봐요. 여기 창가에는 탁자를 놓을까요? 사무실이 넓어서 꾸며도 될 거 같아요!”
두산이 호응하며 소하에게 다가가자, 진명은 고갤 절레절레 내저었다.
* * *
“아우… 피곤해.”
—또 요령 피우는 게냐.
“무리한 운동은 몸을 상하게 한다잖아요.”
—너는 무리하게 하지 않으니 괜찮다.
“아니, 몸이 피곤하다는데 그럼 무리가 아니고 뭐예요?”
도희가 운동을 빼기 위해 도사와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이잉—
“응, 강아야.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
—도희야…….
“왜 그래. 왜 울어. 무슨 일인데?”
강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가… 있잖아, 엄마가…….
“어느 병원이야? 지금 갈게. 울지 말고 잠깐 기다려. 금방 괜찮아지실 거야, 알았지?”
정신없이 휴대 전화만 챙겨 들고 집을 나선 도희였다.
그리고.
“현재로선 뇌사상태로 보입니다.”
병원으로 달려간 도희가 들은 첫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