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누구야?
정신을 잃었던 강아는 다음 날 아침이 밝고 나서야 깨어났다.
“출근하라니까.”
아침부터 노트북을 붙들고 있는 도희를 본 강아가 말했다.
“됐어. 급한 결재 건은 다 해결했어. 며칠간은 괜찮아.”
헝클어진 머리에 퀭한 눈, 푸석한 피부에 메말라 보이는 입술까지, 강아의 눈에 보이는 도희의 꼴은 엉망이었다.
“밥은?”
“조금 이따 먹으러 가자. 배고파 죽을 거 같아.”
“배고파 죽겠다면서 왜 이따 가제. 나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
“흑기사 불렀어. 오면 가자.”
지이이잉—
“왔나 보네.”
* * *
“야 너 뭐야, 진짜 이러기야?”
“뭐가.”
“누구야?”
“우리 회사 대리님.”
도희의 젓가락질은 쉼 없이 이어졌다.
강아는 그런 도희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이강아, 밥이나 먹어. 여기 병원 밥 맛있네.”
“네가 너희 회사 남자 대리님을 사적인 곳에 부른다고?”
“어쩔 수 없잖아? 병실에선 밥 못 먹는데 그럼 어머님 혼자 둬? 이 상황에?”
“한 명씩 먹고 와도 되잖아.”
“…….”
“강도희, 솔직히 말해. 뭔 속셈이야.”
애써 시선을 멀리 던지는 도희의 고갤 강제로 돌린 강아였다.
“뭘, 무승 속뗌, 그렁거 엄써.”
강아 손에 양볼이 잡혀 붕어 입이 된 도희는 꽤 귀여웠다.
“저 남자랑 썸타?”
도희는 볼을 잡은 강아의 손등을 찰싹 내려쳤다.
“악! 아프잖아!”
“썸은 무슨 썸이냐. 회사 사람이랑.”
“너 얼빠잖아. 얼굴 보니까 딱 네 스타일이구만.”
“그런 거 아냐. 여자 둘만 있는 것보단 남자 하나 더 껴 있는 게 나을 거 아냐.”
강아는 도희만 들리도록 가까이 다가와 작게 속삭인다.
“둘이 있든, 셋이 있든 우리가 병실을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쟤들이 무슨 짓이야 하겠어?”
“도하씨도 내 비밀 다 알아.”
“뭐?!”
“사건 하나 해결하다가 그렇게 됐어.”
강아는 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뭐라도 도움 되겠지.”
“솔직히 어젠 진짜 막막하더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니까 팽팽 잘 돌던 머리가 안 돌아. 그냥 머릿속이 캄캄하니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 근데… 형사님 오니까 좀 낫더라고.”
“…강도희 많이 변했네.”
“뭐가.”
“너 뭐든 혼자 해결하려는 쓸데없는 고집 있었잖아. 처음엔 내가 뭐 도와준 데도 절대 안 받고.”
“나 네 도움 잘 받는데?”
“그게 문제야. 그게! 지금은 내 도움만 받는 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잖아. 쓸데없는 빚지기 싫어.”
“그럼 형사님이랑 그 대리님은?”
“글쎄. 그러고 보니까 형사님한테는 처음부터 도움받았네.”
“저 얼굴에 성격도 좋아. 직업도 형사야. 돈도 많은 거 같던데?”
“근데?”
“아니, 그냥 그렇다고.”
“너 형사님한테 관심 있어?”
“미쳤어?”
“미치긴 뭘 미쳐. 관심 있을 수도 있지.”
“형사님 너한테 관심 있잖아.”
“야, 국 먹어봐. 국물 장난 아니야.”
괜히 말 돌리는 도희가 귀여운 강아였다.
“너도 참 골치 아프게 산다.”
“형사님 괜찮은 사람인 거 나도 알아. 그래서 더 안 돼.”
“미안. 네가 제정신이 아닌 걸 내가 깜빡했다.”
“몰라. 나도 몰라. 내가 날 제일 몰라.”
“그래, 약 먹자 도희야. 여기 병원이야. 어서 밥부터 먹어.”
* * *
병실로 돌아온 도희의 눈엔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다.
“두 분 뭐하세요?”
우주는 손가락 하나를 올려 살포시 입에 가져다 대었다.
다시 뒤돌아선 우주는 침상 밑이며 테이블 밑이며 의자며, 커튼이며 구석구석 만져가서 샅샅이 살폈다.
검은 막대를 든 도하도 병실 곳곳을 휘젓고 있었다.
두 남자의 행동에 도희와 강아는 조심스러운 발길로 살금살금 병실로 들어섰다.
“없네요. 깨끗합니다.”
도하가 말했다.
“뭐, 도청 장치라도 있을까 봐요?”
“두 분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그 순간, 도하가 테이블 위에 놓인 꽃병을 들어 보이며 바닥을 가리켰다.
어제는 없던, 처음 보는 꽃병이었다.
“아까 간호사가 놓고 간 겁니다. 보호자 분들 기분 전환하시라면서.”
조화가 꽂힌 꽃병 바닥엔 검은색 작은 물체가 붙어 있었다.
“도청?!”
말해 놓고도 스스로 놀란 강아는 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도하씨가 물 부었어요. 지금은 작동 안 되는 거 확인했습니다.”
“아니,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환자 병실에 도청기까지 넣는다고?”
—저들이 급하단 뜻이지.
침상에 누운 여인의 손 위에 고이 올려져 있던 서책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도사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허허. 거짓말이 서툰 저 여인 덕분이었네.
“간호사까지 한통속이라면 병원 옮겨야지! 뭘 믿고 맡겨.”
입술을 짓이기며 머릴 쓸어 넘기는 도희의 표정은 아주 사나웠다.
“일단 다들 앉으시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어제 저희가 예상한 게 대충 맞았다는 말이네요?”
약물 검사 결과 근육 이완제와 다량의 수면제가 검출되었다.
“예. 지금도 어머님이 맞고 있는 수액에 뭐가 있을지 몰라요. 일단 병원부터 옮기는 게 시급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수액을 함부로 뽑을 수도 없었다.
“그럼 저 수액이 증거가 될 수도 있겠네요?”
“예. 증거는 제가 따로 확보하겠습니다.”
“정말 치밀하네요.”
도하도 이미 우주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다.
“보호자들이야 의료 전문인이 아니니 의사 말만 믿을 테고, 고작 직접 확인 가능한 건 동공 확인이나 자가 호흡 정도인데 누가 감히 환자의 호흡기를 떼겠습니까.”
무거운 표정의 도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큰 숨을 내뱉었다.
“일반적이라면 꼼짝없이 당할 수법입니다.”
우주가 말을 보탰다.
“그리고 알아보니 여기 고위층 장기이식 병원으로 유명해요. 암암리에 대기 없이 받는 거로요.”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에 강아는 고갤 떨어트렸다.
“그거 불법 아니에요?”
“예. 만 퍼센트 불법이죠.”
“와, 나…….”
도희는 치솟는 화를 힘겹게 억눌렀다.
전날,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걸 배운 뒤였다.
“작년에 음주 운전 뺑소니범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사망했는데 무죄를 받아 꽤 떠들썩했죠.”
다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우주의 말을 듣고 있다.
“그 뺑소니범이 여기 의사 아들입니다.”
우주는 테이블을 ‘탁’하고 내려쳤다.
“그 판사 아내는 3개월 후 여기서 간이식을 받았고요. 물론 비밀리에.”
“형사님이 알 정도면 소문이 다 났을 텐데 그걸 그냥 넘어갔다는 말인가요? 누가 봐도 이상한데?”
“비밀리에 받았다고 말씀드렸죠? 이거 엄청 고급정보입니다. 아주 힘들게 얻은.”
우주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자, 그의 예쁜 보조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위 고위층이라고 불리는 양반들 사이에서만 퍼져 있는 소문이라 밖으로 퍼질 리가 없죠.”
“형사님은 어떻게 아시는데요?”
모두 도희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 그건 뭐, 언젠간 알게 되실 거고, 저희도 이제 작전을 짜는 게 우선이겠죠?”
“약물 결과만으로 정황 입증이 가능하겠습니까?”
침착하게 묻는 도하 질문에 우주가 답했다.
“힘들죠. ‘약물 투입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으나 환자의 뇌 손상과는 관련 없다.’ 하면 끝.”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
모두가 도하의 말에 수긍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모두 저희의 예상일 뿐, 사실 확인된 게 없습니다. 눈으로 본 게 아니니깐요.”
우주의 말도 틀린 게 없었다.
그때, 도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말했다.
“오케이. 그럼 일단 사실 확인부터.”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 * *
병원 한편의 작은 사무실.
의자에 누워 삐딱하게 다릴 꼬고 앉은 여자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다.
“이런 씨X. 5호 환자 갑자기 전화 와서 동의 못 하겠다는데?”
선한 인상과 달리 여자의 입에선 상스러운 비속어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왜 안 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네. 어! 싸인 직전에 친구년이 막더라니까? 분명 그년이 반대한 거 같은데 지가 뭔데 나서길 나서!”
여자는 욕만으로는 부족한지,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마구 내려쳤다.
“그러니까! 이게 돈이 얼마짜린데! 나 벌써 카드 긁을 거 다 긁어놨는데, 아! 진짜 짜증 나.”
탁!
창가에서 난 소리에 여자가 고갤 돌렸다.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뭐야… 응? 아무것도 아니야. 자기 말해.”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시 통화에 집중한다.
“회장님 일정까지 다 비우셨다고? 아오! 진짜 미치겠네. 조직 맞는 환자를 또 어디서 찾으란 말인데? 기껏 힘들게 작업 다 해놨더니!”
여자는 입술을 질겅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계속 반대하면 돈이라도 더 쥐여 줘야지. 젊은 애가 어차피 아픈 엄마 병간호하느라 모아둔 돈도 없을 텐데 큰돈 생긴다면 그냥 동의하지 않겠어?”
돈이라면 뭐든 가능한 줄 아는 여자였다.
“그래. 그럼 자기가 가서 다시 말해 보고, 그 뒤에 나도 다시 가 볼게. 응, 응. 이따 봐.”
통화를 끝낸 여자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끼이이—
여자가 사무실을 나선 후 다시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가 닫혔지만 복도에선 누구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 * *
곧이어 강아의 병실 문이 열리더니 순식간에 도희와 우주가 나타났다.
“후…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이거 정말로 쫄깃한데요?”
목걸이를 뺀 도희와 도포를 벗은 우주였다.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면 들킬 뻔하였네.
투명 도포는 상관없었지만, 목걸이의 지속시간은 10분 정도로 아주 짧았다.
“그것보다 제가 먼저 나설 뻔했어요. 아오, 아까 그 여자 입을 확 그냥!”
“뭐 알아냈어?”
여자와 전화 통화 후 두 사람을 목 빠지게 기다린 강아와 도하였다.
“강아씨, 전화 끊고 바로 누군가와 통화하는데 관계자인 거 같습니다. 일단 여기 의료진들이 뭔가 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문제는 관계자들이 한둘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찾는 게 힘들 거 같은데…….”
“서류는 완벽하게 꾸며놨을 거고, 기증자나 이식자들 확인도 당연히 힘들고.”
도하의 말대로 이미 죽은 사람을 데려올 방법은 없었다.
불법 이식자도 마찬가지.
“그럼 그 방법밖에 없네요.”
“방법이 있습니까?”
“두 분 친한 기자 있어요?”
도희의 말을 들은 우주의 입가엔 질 나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