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그 여자 만나지 말까요?
“내가 안 올리는데 누가 글을 이렇게 올리는 거지?”
“글 읽고 열받은 사람들이겠지! 잘됐네.”
도희의 말에도 여전히 의문 띤 표정의 강아였다.
“그만 보고 눈 좀 붙여. 요즘 잠도 못 잤잖아.”
병원을 옮겼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24시간 돌아가며 병실을 지키는 중이었다.
“넌 오늘 별거 없었어?”
“응. 조용해. 그 뇌사 진단 내린 의사랑 장기 코디랑 불륜 사이라는 거 정도?”
쉽게 넘길 정보는 아니었다.
“우주씨는 어떻게 됐어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우주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병실에서 자겠다며 우겨서 얻어 낸 결과물이었다.
“확실한 정보원을 심어 뒀습니다.”
티 없이 맑게 웃어 보인 그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훌훌 털었다.
제집같이 지내는 걸 보니 붙임성 하나는 좋은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한 도희가 입을 열었다.
“괜히 무리한 부탁드린 거 아니에요?”
“당연히 무리한 부탁이죠.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 조건도 세던데요?”
“조건요?”
“선보기로 하고 정보 받기로 했습니다.”
“선이요? 요즘도 선을 보는구나.”
별생각 없이 고갤 끄덕이며 맞장구치던 도희는 놀란 듯 쏟아지는 강아와 도하의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네? 선이요?!”
“우리가 아는 그 선? 여자 만나는 그거 말하는 거예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강아도 나섰다.
“근데 우리 아버지도 참, 비산병원 비리 파헤치는 형사 아들한테 비산 그룹 딸이라니. 뭐 병원 하나 엎어져도 비산은 비산이라는 건가.”
“정보원이 아버지셨어요?”
‘아버지랑 사이 안 좋은 거 같더니.’
예전에 들은 우주와 어머니의 대화를 떠올린 도희였다.
“상대가 비산 그룹 딸이요? 워… 우주씨 혹시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딴 세상 이야길 듣는 듯 소스라치게 놀란 강아는 괜히 자신 때문에 일이 커지는 건 아닌가 싶어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도하는 뒷말은 예상했는지 다시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꼴에 정치하신다고 재벌가 집안이랑 혼사를 꿈꾸시나 봅니다. 이름은 예쁘던데요? 손모아인가.”
우주의 아버지는 정치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희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이유가 아니었다.
“손 뭐요?”
“‘손 모아’라던데요.”
우주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모으며 윙크해 보였다.
무슨 일인지 사색이 된 도희는 말없이 병실을 뛰쳐나갔다.
* * *
잔잔한 클래식이 울려 퍼지는 고급 한식당.
화려한 나무 문양이 촘촘히 새겨진 미닫이문이 열리고 웃는 낯의 중년 사내가 룸으로 들어선다.
주름진 이마와 미간에 쌓인 주름들이 그의 만만치 않은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기회라고 생각하는지 자꾸 연락들이 오네요.”
자릴 잡고 앉은 손남수 사장은 끊임없이 진동이 울리는 휴대 전화를 뒤집어 돌려놓았다.
“하하, 아닙니다. 가진 게 많으시니, 잡음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요.”
웃는 낯으로 뱉는 말들이었으나 서로를 겨냥한 말들이었다.
그것을 닳고 닳은 이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아이고, 능력 없는 놈이 혼자 하려니까 힘든 게지요. 벅차면 의원님께 도움 요청 좀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언제든 말만 하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전 우 의원님만 믿겠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아드님 외모가 훤칠합니다?”
“따님이 분명 좋아할 겁니다. 저와 달리 여자에 크게 관심도 없고 아주 괜찮은 놈입니다.”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게 무슨 흠인가요. 허허. 다른 욕심도 없는 거 같던데… 아드님 때문에 속앓이 꽤나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들 걱정이야 손 사장님만 하겠나요. 이제 초등학생쯤 되겠네요. 요즘 아이는 괜찮은지요?”
서로의 걱정으로 포장한 뼈아픈 공격들이 오고 갔다.
이 남자 저 남자와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모아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아들을 둔 비산 그룹의 손남수 사장이 잃을 것이 더 많은 대화였다.
“하하… 다 옛날이야기지요. 지금은 아들보는 낙으로 삽니다.”
물론 거짓이었다.
“그럼 따님 걱정은 이제 좀 더셔야죠.”
“우 의원님도 아들 걱정 더셔야겠네요.”
“어떻게 날짜 한 번 잡아볼까요?”
“아이, 좋습니다. 빠를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이 차갑게 식어 가는 동안 이미 서로의 속내를 파악한 뒤였다.
드러내지 않는 척 모든 것을 드러낸 서로였다.
“그럼 제가 그 전에 우리 손 사장님 속 시끄러운 것부터 해결해드려야겠네요. 이번 잡음은 말입니다. 제가 고견을 하나 드리자면…….”
우주가 자신에게 손을 내민 순간, 이 모든 걸 계획한 우정모의 악랄하고 비열한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 *
뛰쳐나갔던 도희는 한참 후에나 돌아왔다.
“도희씨 나 그 여자 만나지 말까요?”
사색이 되어 뛰쳐나간 도희를 오해한 우주였다.
“만나요. 돈 많지, 예쁘지. 다 갖췄네. 그런 여잘 왜 안 만나.”
칭찬 가득한 말뜻과는 다르게 가시 돋친 말투였다.
“예쁘다고는 안 했는데.”
“재벌 딸인데 관리하니까 당연히 예쁘겠죠.”
도희는 그녀를 봤기에 한 말이었지만 우주는 또 다르게 이해했다.
“안 만날게요.”
뭐가 좋은지, 실실 웃는 낯의 우주는 화나 보이는 도희의 태도에도 좋아죽겠단 표정이다.
“하, 지금 오해하시는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전 우주씨가 누굴 만나도 상관없어요.”
“에이, 또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아, 몰라. 난 그 일에 안 끼고 싶으니까 알아서 해요.”
보조 침대에 등을 돌려 누운 도희는 그대로 잠을 청했다.
곧 영문 모르겠단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가 헤어 나온 강아의 설명으로.
어둡던 도하의 안색은 한결 밝아지고, 우주는 심연의 그늘로 빠져 버렸다.
* * *
달빛도 모습을 감춰 어둠이 깊은 새벽녘.
보조 침대 두 개를 붙여 엉겨 붙어 자는 두 여자와 접객용 소파를 각각 차지한 두 남자는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순간, 정기 가득한 항아리에 담겨 과거 상념에 빠져 있던 도사는 심상치 않은 묘한 기운을 느끼고 겨우 과거에서 벗어났다.
—‘이 기운은 대체 무엇인가.’
사람인지, 영물인지, 또 다른 무언가의 기운인지.
도사의 짐작으로도 알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어느덧 병실 문 앞까지 다가왔다.
—‘안 된다!’
불길한 생각이 스치며 그 기운을 막고자 서책이 막 공중으로 날아올랐을 때!
“꺄아아아아!”
쨍그랑—!
여성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카로운 유리 깨지는 소리가 병실을 울리고,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다.
* * *
“괜찮아?”
“어…….”
난생처음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악몽을 꾸고 깨어난 도희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직 악몽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 도희를 보며 강아는 그저 안쓰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다.
도하는 보조 침대에 걸터앉은 도희에게 다가와 살포시 담요 하나를 감싸 주었다.
곧이어 병실 문이 열리며 우주가 나타났다.
“일단 CCTV 요청은 해놨는데… 이쪽 병원에서도 저희가 비산병원 일로 온 걸 아는지 협조적이진 않네요. 친구한테도 부탁은 해뒀습니다.”
“치사하게 그걸 안 보여줘요?”
“말 그대로 협조 사항이라 영장 없다고 끝까지 보여주지 않으면 답이 없긴 합니다.”
—목적이 있다면 또 올 터이니 기다려 보자꾸나.
“갑자기 멀쩡히 있던 화분은 왜 깨진 걸까요?”
도희의 비명보다 유리 깨지는 소리에 더 놀란 강아였다.
—…느낌이 좋지 않구나.
각자의 생각에 잠긴 넷은 그렇게 다시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기운을 되찾은 도희와 화기애애한 아침 식사를 마친 넷이었다.
넷의 휴식을 위한 도사의 배려기도 했다.
도사의 전음을 들을 수 있는 네 사람인지라 무슨 일이 생기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하와 우주가 출근하고, 유달리 넘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한 도희도 증거를 잡겠다며 비산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나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한 그녀는 늦은 저녁 병실로 돌아왔다.
* * *
“끝났네.”
“하…….”
우주가 내민 휴대 전화 화면을 보던 강아는 이마를 짚으며 쓰러지듯 도희에게 기대었다.
“이제 다 끝났어. 괜찮아, 강아야.”
도희는 부드러운 손길로 강아의 어깰 토닥였다.
“예상은 했지만 충격적이군요. 세상에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다니.”
“이보다 더한 놈들도 많습니다. 이도하씨 같은 사람만 있다면 그땐 제가 형사를 관둬야 할 겁니다.”
도하와 우주는 이제 제법 친해진 듯 보였다.
“문자 내용과 이 녹취만으로 법적 소송 진행이 가능하겠습니까?”
“하, 실제 사건이 행해진 내용은 아니라서… 이 또한 정황 증거에 가깝긴 하죠.”
장기이식을 급히 받고 싶다며 상담한 내용에 불과했다.
물론 순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불법을 의미했다.
“이 사람은 비산병원 직원인가요?”
“비산병원 장기이식 브로커라고 소개받았습니다. 근무지가 비산병원인 것도 확인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우주가 브로커를 직접 만나 담아 온 녹취 파일이 비산병원이 불법 장기이식을 행한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형사님 기자 친구 분은 괜찮으세요?”
“특종 잡았다고 좋다던데요.”
“그럼 특종 하나 더 드리죠.”
“네. 바로 부를게요.”
* * *
우주의 친구라는 설 기자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녹취록을 듣는 동안 기사 작성을 완료한 그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을 좋아한다며, 한참 설레발을 떨다 돌아갔다.
* * *
오랜만에 출근한 도희는 아침 일찍 뿌려진 기사들은 읽어 내려갔다.
제보자에게 받았다며 녹취 파일의 내용을 꼼꼼히도 적어 놓은 기사였다.
역시나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였지만, 연이어 터진 기사들의 여파로 의혹은 한층 더 쌓여만 가고 있었다.
지이잉—
지이이이잉—
“응, 강아야.”
—야! 너 어디야?
“어디긴 회사지.”
—병원에 경찰들이 찾아왔어! 너랑 나 사기죄로 고소당했대!
“뭐? 고소? 사기죄에?!”
어안이 벙벙한 도희가 상황 파악을 위해 애쓰는 사이, 어정쩡하게 서 있던 팀원들을 제치고 사무실로 경찰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강도희씨, 당신을 사기 및 공갈 협박, 허위사실 유포죄로 긴급체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