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75)화 (75/120)

074화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부족한가?”

“아닙니다.”

그가 준비한 돈이 부족할 리 없다.

“똑똑하니 알아들었을 거라 믿네.”

“예.”

예상한 일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모아가 자신 몰래 다른 여러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곤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것도.

“모아가 연락해도 받지 말게.”

“예.”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안 통해.”

“예.”

“아, 그리고 모아 곧 결혼할 걸세. 자네도 새 사람 만나야지.”

남자는 지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갈하게 차려진 수십 가지의 음식들은 그에게 자리 대여용에 불가했다.

언제나 밀폐된 공간에서 비밀리에 만나기에 아는 척도 할 수 없는 남자.

이 사람과 만날 땐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는 말하고, 지혁의 대답은 늘 같았다.

‘예.’

지혁이 거절의 답을 내놓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요즘 모아가 자네만 만난다길래 궁금해서 불렀네. 적당히 놀다 끝낼 수 있게 선은 지키고.

‘예.’

그가 모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들은 말이었다.

‘결혼이니 뭐니, 책임이니 뭐니, 애한테 헛바람 넣지 말고.’

‘예.’

딸과 적당히 놀다 끝내라는 아버지.

‘돈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섭섭지 않게 챙겨 줄 테니.’

딸의 남자를 한낱 고용인으로 여기는 아버지.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혁도 언젠가 이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물론 그 ‘언젠가’는 아직 오지 않았다.

*     *     *

포근한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 정원.

언젠가 유럽 미술관에서 본 듯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젊은 남녀가 하얀 원탁 티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있다.

주변을 가득 메운 화사한 꽃장식과 유럽풍 정원 인테리어로 인기가 가장 좋은 자리였다.

“커피 안 좋아하세요?”

“좋아합니다.”

“한 모금도 안 드시길래…….”

“입맛이 없네요.”

남자의 딱딱한 대답에 여자는 애써 표정을 다듬었다.

“얼굴은 왜 그래요? 요기.”

여자는 남자의 상처 난 부위와 같은 입술 부근을 자신의 얼굴에서 짚었다.

그녀가 입술을 봉긋 세운 표정을 본 남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반응이었다.

“왜요. 너무 눈부신가요.”

물론 이 반응은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의 잘난 얼굴에 자부심을 가진 듯 무척이나 도도했다.

“잘생긴 얼굴에 상처가…….”

그에게 다가가던 여자의 손길은 남자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거칠게 뿌리쳐졌다.

“스킨십 싫어하세요?”

“그럴 리가요.”

여자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간다.

“직업이 형사님이라고 들었는데.”

“정직 중입니다.”

“정직이요?”

“정직 모르세요? 아, 단어 설명까지 해드려야 하나.”

시큰둥한 우주의 표정에 여자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봐요.”

“예.”

“이런 자리 나와서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버지 얼굴을 봐서라도.”

그녀도 더는 ‘척’할 필요를 못 느끼는지 싸늘한 표정엔 비틀린 미소만 떠올라 있다.

“그럼 더더욱, 무례하게 굴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겁니다. 모아씨.”

“그럼 뭐, 저도 편하게 이야기할게요. 어차피 아버지들끼리 이야기 다 한 거 같은데 우리도 힘 빼지 말죠?”

“뭘 말씀이십니까?”

이번엔 그녀의 비틀린 미소가 우주에게로 옮겨왔다.

“우리 결혼요.”

*     *     *

“자넨가? 인물이 의원님을 쏙 빼닮았구나.”

“듣기 좋은 소린 아니군요.”

“허허, 배포는 더 좋은 거 같네.”

손남수는 평소에도 젊고 당당한 친구들을 예뻐했다.

솔직한 그들은 이 바닥에서 구르고 굴러, 속이 시커먼 늙은이들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수월했다.

물론, 언제가 이들도 그 뒤를 따르겠지만.

“마음에 들어. 아주.”

“비산병원 일은 사장님이 꾸미신 겁니까?”

“치기도 있고. 뭐, 그 나이 땐 있을 만하지.”

“억울한 사람 그만 만드시죠.”

“자넨 그만 나서게. 아버지 체면도 생각해야지.”

“아버지랑 저랑 사이 안 좋으신 거 모르셨어요? 정보가 많이 부족하시네.”

찻잔을 집어 든 손남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간다.

“아직은 배포라고 해두지. 그 선을 넘으면 건방진 걸로.”

“제가 선 넘는 걸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손남수는 우주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우주의 무례한 발언도 웃어넘길 수 있는 이유였다.

“여자 때문인가? 자네 아비도 여자 꽤나 좋아하지? 근데 아버지에게 많이 배워야겠네. 놀긴 좋아도 깊게 엮이면 골치 썩는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텐데.”

도희가 ‘여자’라는 단어로 손남수의 험한 말에 함부로 담기는 게 싫던 우주는 입술을 짓이겼다.

“저는 아버지랑 달라서요.”

“아… 어릴 적부터 아비 때문에 집 밖으로 돌았다지? 남자가 여자 좀 좋아하는 게 뭐 흠이라고.”

이젠 우주의 가정사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손남수였다.

타인을 길들이는 그의 화법인 것을 우주가 알 리는 없었다.

“뭐, 모아씨가 남자 좋아하는 것도 흠은 아니죠.”

“자식은 아비를 닮는다지. 자네도 자네 마음대로 살게. 나는 손댈 생각 없어.”

“전 일편단심 민들레로 살 거라서요.”

우주는 이 상황에서도 도희가 했던 말이 떠올라 터질 뻔한 웃음을 애써 억눌러 작게 터트렸다.

“이보다 좋은 혼처 구하기 힘들 거고.”

“에이, 그건 사장님 생각이죠.”

“자네도 욕심 좀 가져야지? 형사 생활하다 은퇴할 건 아니잖은가?”

비산 그룹 손남수 사장의 어린 아들이 아프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하여 전문 경영인을 두더라도 실질 경영주는 사고뭉치인 그의 딸 손모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계 진출 좀 해보겠다고 딸 파는 아비라니. 당신 딸 꼴이나, 내 꼴이나 둘 다 우스운 꼴이네요.”

이젠 대놓고 비아냥대는 우주의 말에 표정이 사라진 손남수였다.

한계점에 도달한 그는 상념을 떨쳐내고자 주름진 미간을 매만졌다.

“아들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나도 문제만 일으키는 아들이 하나 있거든. 자네 아비도 골치 좀 썩겠어.”

비산 가의 아들이라면 우주가 아는 모세라는 아이였다.

“저희 아버지 걱정은 그만하시고, 본인 걱정이나 하시죠.”

우주가 막 선을 넘으려는 찰나였다.

“본인 걱정?”

“예. 손남수씨 걱정요.”

“하, 하하하!”

“제가 좀 정의로운 형사라서요.”

결국 그 선을 넘고야 만 우주였다.

*     *     *

“어제 난 네 이름 듣고 꿈에서 온 전화인 줄 알았잖아. 네가 나한테 전화를 한 것도 모자라 도와달라고까지… 이도하 많이 변했네.”

“보상은 충분히 해줄게.”

“야, 난 너 다시 본 것만 해도 좋다. 몇 년 만이냐.”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이었다.

“바로 와줘서 고마워.”

“역시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하는구나. 이도하가 사람이 다 됐네.”

옅게 미소 짓는 도하의 모습에 친구의 눈은 더 커다랗게 뜨였다.

“와, 웃기도 잘 웃네? 애들 보면 놀라겠다, 야. 동창회도 나오고 해.”

“그래. 이번엔 나갈게.”

“아 참, 그리고 어제 부탁한 거.”

도하의 변호사 친구는 도하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사기꾼 사진이랑 인적 사항. 지금 서부서에 있대.”

*     *     *

‘저 사람입니다.’

도하의 눈길이 향하는 곳엔 유치장 갇혀 있지만, 코까지 골며 천하태평 자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만나주질 않네요. 위에서 막는 건지도 알 수 없습니다.’

도사와 함께 사기꾼을 찾아온 도하는 접견 신청을 거부당했다.

경찰서에서 쫓겨나다시피 문전박대를 당한 도하는 도포를 쓴 채 다시 이곳으로 왔다.

—허허, 잡범일세. 잡범이야.

‘잡범이요?’

—혼자 큰일은 못 할 상일세.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게 명백하구만.

‘자고 있는데 당장은 어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흐음… 자네 저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나?

도사가 말하는 저 속이란 유치장 안이었다.

‘어…….’

쉬이 당황하지 않은 도하였지만, 유치장으로 들어갈 방법이 바로 떠오르진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하는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해보겠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가 도포를 벗고 성큼성큼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 도하는 남자 하나를 붙잡고 주먹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새…! 형사, 악! 형사님! 악!”

그는 특수 강도죄로 잡혀 온 남자였다.

*     *     *

—하하하하하!

도하의 귓가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정한 사내군. 진짜 사내야! 하하하하.

도사도 도하의 생각을 읽었지만, 평소 그가 익히 알던 도하가 그것을 행할 줄은 몰랐기에 더 재밌는 일이었다.

남자를 실컷 쥐어팬 도하가 합의는 없다며 못을 박으니, 얻어맞은 남자는 당장 도하를 쳐 넣으라며 고래고래 악을 쓰며 난리였다.

도하는 남자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무사히 유치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게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라…….’

어쩌면 도희보다 더 막 나가는 사람이 도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도사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더니. 허허.’

‘이 남자가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아닐세. 준비되었는가? 5분 안에 끝내야 함이야.

이제 이곳의 시간 개념에 대해 익숙해진 도사였다.

‘예.’

—일단 자네도 눕게나.

도사의 말에 따라 도하가 남자 옆에 드러눕자, 유치장의 쇠창살이 옅은 푸른빛을 뿜으며 잘게 흔들렸다.

그 빛은 곧 쇠창살로 된 문 전체를 막처럼 덮더니 조용히 흩어 사라진다.

딱딱한 유치장 바닥에도 아늑하게 잠을 청하던 남자는 순간 온몸을 감싸는 냉기에 놀라 깨어났다.

“뭐야. 에어컨 틀었어? 이봐! 온도 좀 높여줘! 추워!”

매사 반말이 일상인 예의 없는 남자였다.

“왜 대답이 없어.”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난 남자가 쇠창살문으로 다가간다.

“에? 다 어디 갔대?”

쇠창살 사이로 경찰서 내부가 훤히 보이지만,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김진수씨.”

고갤 돌린 남자 앞에는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법한 훤칠한 미남이 꼿꼿한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에게선 거부할 수 없는 묘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김진수는 얼떨결에 대답하고 나서야 그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비산에서 나왔습니다.”

이제야 남자는 안심한 표정으로 낯선 남자에게 다가갔다.

“뭘 또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그쪽에서 약속만 확실히 지켜주신다면 저도 확실히 합니다.”

“약속은 무슨. 당신 죽이러 온 건데?”

“…예?”

여긴 경찰서였다.

문제는 아무도 없다는 점.

도움을 청하러 고갤 돌린 남자의 얼굴은 진한 어둠으로 서서히 물들어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