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76)화 (76/120)

075화 여전히 심장을 울리는.

김진수는 지금 눈앞에 잘생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여, 여기서? 내 입 막으려 하나 본데! 여기 경찰서야!”

“알아.”

“이 남자가 미쳤나. 무슨 경찰서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허! 저기 카메라 안 보여?”

남자의 구부정한 손가락은 천장에 달린 방범용 카메라를 가리켰다.

쇠창살 문 너머에선 미리 걸어둔 도술로 인해 이들이 누워 잠을 청하는 걸로 보이고, 천장 카메라 또한 일시 정지된 상태였다.

어떠한 장면도, 어떠한 소리도 도술을 넘어 이곳을 빠져나갈 순 없다는 걸 남자가 알 리가 없었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남자는 한 발짝씩 김진수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요즘 의학 기술을 모르나 본데.”

“…뭐?”

갑자기 왜 의학 기술이란 말이 튀어나온 건지, 김진수는 영문 모를 오싹함이 온몸에 솟아났다.

김진수에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느린 손짓으로 쓸어내렸다.

“얼굴 정도는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어서 말이야.”

방금 전 잘생긴 미남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이 길고 눈이 사나운 젊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넌 내가 누군지 죽을 때까지 모를 거야.”

더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김진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그것도 내 얼굴 아니거든.”

정신이 혼미해진 남자는 바닥에 엎드려 손바닥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가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경찰서에서 살인이라도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경찰서에 아무도 없는 것도 이 남자가 손 쓴 게 분명했다.

그 정도 일은 비산 그룹 정도면 일도 아니었다.

“허… 나 정말 말 안 해요! 정말이에요! 살려만 주세요! 혹시 돈 더 달라고 해서 이러시는 거예요? 안 받을게요! 제발, 제발 살려만 주시면…….”

“그게 아니지.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예, 예예. 뭐든 다 시키는 대로 할게요!”

바닥에 바짝 엎드려 싹싹 빌던 남자는 슬며시 고갤 들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김진수의 말에 한층 더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인 사내는 비산을 옥죌 질문을 시작했다.

*     *     *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큰소리와 비속어로 소란스러운 이곳.

항상 오가는 많은 이들로 정신없는 경찰서 안이었다.

오늘따라 이곳에선 평소완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경찰서를 방문한 많은 이들의 시선이 유치장 한편을 차지한 미모의 여성에게로 모여 있다.

“형사님 저도 이따가 저기로 들어갑니까?”

“되겠냐?”

“여성분이 혼자 쓸쓸해 보이시길래…….”

“떼고 와. 그럼 저기 넣어줄 테니까.”

“형사님 참 말씀도 무섭게 하셔.”

“너 같으면 너한테 고운 말이 나오겠냐? 몇 번째야. 몇 번째. 그만 좀 와!”

형사에게 질타를 받는 와중에도 남자의 시선은 줄곧 쇠창살 너머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아직도 유치장에 수감 중인 도희의 외모는 이 삭막한 풍경 속에서도 홀로 빛을 발했다.

‘안 그럼 내가 죽어.’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듯, 홀로 사색에 잠긴 그녀는 백 실장의 말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부사장 쪽 사람한테 쫓기고 있어. 잡히는 건 시간문젠데, 네가 날 좀 도와줘.’

백 실장은 부사장과 한 부장, 박 비서가 조사를 받은 날부터 도망자 신세라고 했다.

‘차라리 감옥 가는 게 나을 뻔했다고!’

울부짖듯 도와달라고 청하는 백 실장의 말을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아오, 증말… 부사장이나 비산 놈들이나 어째 주변에 죄다 쓰레기뿐이냐!”

백 실장이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부사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박 비서가 잡혀 들어간 살인 미수 사건들만 봐도 운이 좋아 살인 미수였지, 자칫하다 목숨을 잃을 만한 사고들이었다.

‘그것도 다 부사장이 시킨 걸 텐데… 박 비서가 없으면 또 다른 사람이 나서려나? 진짜 황이재도 그냥 둬선 안 되겠네.’

입술을 짓이기며 얼굴을 쓸어내린 도희는 황이재만큼은 꼭 벌을 받게 하리라 다짐했다.

‘근데 내가 지금 여기 이 꼴인데 백 실장을 어떻게 돕지.’

당장 생각나는 사람들은 이번 일로 같이 몸이 묶인 사람들뿐이었다.

‘강아랑 나는 여기 있고, 우 형사님은 연락 안 되고, 도하씨는 병실에…….’

순간 기발한 해결책이 떠오른 도희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다.

‘네가 정말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나와서 여기로 연락해. 나도 한계야. 제발 도와줘.’

백 실장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힘껏 쥐어 보는 도희였다.

*     *     *

“뭡니까 이게.”

“들고 가 보시죠. 당신 윗분한테.”

“이걸 지금 저보고 믿으라는 건가요?”

“믿고 말고는 당신 사정이고.”

남자의 곱상한 외모와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냉기 맺힌 말들뿐이었다.

“불법으로 녹취된 내용은 증거 효력이 없습니다.”

“아, 제가 말씀 안 드렸군요. 증인도 서기로 했습니다.”

또 말과 다른 남자의 부드러운 손짓에 천 변호사의 짙은 눈썹이 티 나게 들썩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통화를 하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안 먹히면 플랜B로 가겠습니다.’

—먹힐 걸세.

도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도하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다음 꺼낼 말들을 나열했다.

“후…….”

며칠 사이 많은 일은 겪으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도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커피로 겨우 달래는 중이었다.

—‘쓰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함이야. 타고난 기운이 좋아서 그런 게지.’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매만지고 있는데 천 변호사가 돌아왔다.

도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여자는 느릿한 손짓으로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급하신 건 알겠지만…….”

여자는 말을 하다 말고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킨다.

“이것 또한 공갈 협박인 거 아시죠? 김진수씨 저희랑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이어진 그녀의 말에 오히려 확신을 가진 도하였다.

“공갈 협박 아닌 건 이미 아시는 거 같고.”

도하의 싸늘하고 매력적인 미소에 시선을 뺏겨 버린 여자였다.

“언론에 제보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럼 이걸 저희에게 가지고 오신 이유가 뭐죠? 돈인가요?”

말을 마친 여자는 요염하게 다릴 꼬며 치말 슬쩍 들추더니, 매끈한 다리를 훤히 드러냈다.

“돈이 다 해결해 주진 않습니다.”

남자가 더욱더 마음에 든 여자였다.

“서로 진흙탕 싸움이 될 게 뻔한데, 조용히 해결하시죠.”

그는 목소리마저 감미로웠다.

하지만 이어진 남자의 요구에 여자의 미소는 빠르게 식어 갔다.

*     *     *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황당한 눈길로 도희를 바라보는 무혁이었다.

며칠 동안 씻지도 못했을 텐데 여전히 향기 나듯 눈부신 도희였다.

“죄송해요. 회사는 당분간…….”

“하하하, 이 상황에서 회사 걱정이라뇨. 이래서 도희씨를 미워할 수 없나 봅니다.”

“미워하셔도 싸죠… 이대로 전과자로 낙인찍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정말 솔직한 도희의 심정이었다.

“억울하십니까?”

이 말이 더 억울한 도희였다.

“허… 억울하다 뿐일까요. 억울하다 못해 억장이 뒤집어지는 걸요?”

“도와드릴까요?”

“예?”

“전 상무를 통해서 대충 상황 파악은 했습니다. 뭐, 원하신다면 도와드릴 수도…….”

“아니요.”

도희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자 무혁이 의문 띈 표정으로 물었다.

“왜죠?”

“더는 주변인들이 피해보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제가 그렇게 능력이 없어 보이시나요.”

“그런 말이 아니라, 사장님까지 괜히 적 만드실 필요는 없다는 거죠.”

화정기획 사장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비가 와도 비산 그룹이라면 어떻게든 엮어서 엿 하나 줄 게 분명했다.

“흐음… 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은데.”

“저도 이렇게 당하진 않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나올 방법은?”

“아직은 막연하긴 한데… 뭐 여기서 이렇게 무너질 거 같진 않아요.”

“본인을 너무 믿는 거 아닙니까.”

“제가 저를 안 믿으면 누가 저를 믿나요.”

무혁의 기다란 손가락이 본인을 가리켰다.

“나?”

도희가 웃음을 터트리자, 무혁의 옆에 앉아 있던 전 상무도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걱정 많으십니다. 하루 빨리 복귀하셔야죠.”

“으… 여기 있으면서 좋은 게 딱 하나 있어요.”

무혁과 전 상무의 머리 위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출근 안 하는 거.”

“푸웁.”

“하하, 하하하.”

사장 앞에서 출근하지 않아 좋다고 말하는 사원이 또 있을까.

그것도 유치장에 갇힌 채로 말이다.

웃음보가 터진 무혁과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전 상무는 위로가 담긴 말을 늘어놓더니 곧 회사에서 보자며 돌아갔다.

*     *     *

“팀장니이임.”

울먹이는 소하의 얼굴을 보니 도희는 괜히 마음이 찡해졌다.

“여기까지 왜 왔어요. 뭐 좋은 데라고.”

눈시울이 붉어진 도희의 눈동자는 소하의 양옆으로 앉은 진명과 두산에게 닿았다.

“몸은 괜찮으세요?”

왠지 풀이 죽어 보이는 진명이었다.

“풉… 나 뭐, 어디 고문당했어요? 조선시대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어디 좀 아팠으면 좋겠는데 멀쩡하네요.”

“그래도 아픈 곳은 없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남이 보면 여기 병원인 줄 알아요.”

작게 속삭이는 척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농담까지 뱉는 도희였다.

“진짜 이럴 순 없어요! 팀장님이 사기꾼이라니 말도 안 되죠!”

소하는 여전히 울분 가득 찬 표정으로 씩씩대고 있었다.

“회사는 어때요… 별일 없죠?”

일부러 말을 돌리는 도희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두산과 진명은 앞다퉈 회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     *

오늘따라 도희를 찾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연달아 그녀를 찾아온 이들로 정신없는 하룰 보낸 도희였다.

“하, 여기가 만남의 장소인지 유치장인지를 모르겠네.”

그녀를 접견실로 안내하는 남자는 시종일관 투덜거렸다.

“에휴… 사기꾼 얼굴이 반반해 봤자 사기꾼인데, 뭘 이리들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건지.”

“아저씨.”

“저 아저씨 아닌데요?”

“그러니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거 아니라고요.”

“허…….”

벙찐 남자를 뒤로한 채 스스로 접견실로 걸어 들어간 도희였다.

접견실로 들어선 도희는 밖에 있는 남자보다 더 넋이 나간 얼굴로 변했다.

“네가 왜…….”

더는 볼일 없을 거라 여긴.

잊었다고 여긴.

그러나 여전히 심장을 울리는.

이렇게 만나서는 안 될 그가 쓸쓸한 눈길로 눈앞에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