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77)화 (77/120)

076화 우리 결혼 할래?

지금 도희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분명 문지혁이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

대학에서 만나 회사까지 동반 입사한 남자.

학생 땐 공부한다고 시간이 없어서.

입사 후엔 신입이라 비밀 연애한다고.

아낌없이 사랑하지 못해 더 아쉬운 남자.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한 짓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이를 악문 도희였다.

“…도희야.”

익숙한 미소였다.

멋쩍은 듯 연하게 웃어 보이는 미소.

“허.”

늘 이런 식이었다.

도희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늘 이렇게 다가와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럼 도희도 그의 설레는 미소에 결국 웃어넘겨 버리곤 했다.

“문지혁, 네가 여길 왜 와.”

냉기 가득 담긴 목소리에도 상관없다는 듯 도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지혁이었다.

결국 경찰관의 제재를 받고서야, 둘은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보고 싶었어.”

여전히 감미로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넌 항상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지.”

누구보다 지혁에 대해서 잘 아는 도희였다.

“원하는 건 갖고, 하고 싶은 건 하고.”

머리까지 좋은 그였기에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일은 없었다.

“근데 거기서 난 빼주라, 지혁아.”

지혁의 입은 굳게 닫혀 있다.

“깨진 유리는 붙인다고 해도 깨진 유리일 뿐이야.”

“되돌릴 수 있어. 다시 처음부터…….”

“아니.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나 두 번은 같은 실수 안 해. 너도 나 알잖아.”

“응. 나도 같은 실수는 두 번 안 해. 너도 날 알잖아?”

“처음엔 정말 술 먹은 실수였어. 그날은 너무 취해서! 너도 알잖아. 나 술 먹으면 아무데서나 잘 자는 거.”

지혁은 헤어지고도 술만 취하면 도희에게 전화해 같은 말을 늘어놓았기에 수십 번도 더 들은 변명이었다.

“두 번째엔 호기심이었고… 넌 항상 바빴으니까.”

“내 핑계대지 마. 결국 다 네 선택이잖아.”

“도희야.”

“지혁아.”

지혁이 그토록 듣고 싶던 다정한 목소리가 도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발 고집 그만 부려.”

지혁도 알았다.

본인이 억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는 것도.

“우리 결혼 할래?”

“뭐?”

“결혼해서 외국 가자. 너 세계일주하고 싶어 했잖아. 평생 일만하다 죽고 싶지 않다면서, 응? 가자. 내가 다 준비할게.”

그의 미소 지은 얼굴만 보면 없던 화도 풀렸기에, 지혁에게 화 한번 제대로 내본 적 없는 도희였다.

“너어…….”

세상 맑은 미소로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를 보며.

도희는 그를 만나 쌓아 왔던 분노들을 한 번에 터트릴 수 있는 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     *     *

유치장으로 돌아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속으로 아는 욕이란 욕은 다 내뱉으며 삭이고 있는 도희에게 도사의 전음이 들려왔다.

—쯔쯧, 고놈 참 성질하고는.

‘도사님!!!’

고갤 돌린 도희는 환한 미소의 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도하씨.”

“고생했어요.”

굳게 닫혀 있던 쇠창살문이 열리고 도희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     *     *

강아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희에게 뛰어 안겨들었다.

“도희야…….”

“뭘 또 울어 이것아. 살 빠졌네? 맛있는 거 먹자.”

도희는 눈시울이 붉어진 강아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토닥였다.

“고생했네, 고생했어.”

“난 진짜 우리 감옥 가는 줄 알고오… 흑… 진짜 무서워서 혼났다니까!”

“으그, 도사님이랑 도하씨가 있는데 걱정도 팔자다.”

병원으로 오는 동안 도하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진짜 나쁜 사람들.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멀쩡한 사람을 감옥에 넣어?”

“그렇게 태어난 놈들이겠지.”

강아가 그들에 대한 원망을 뱉어 내는 동안, 도희의 시선은 병실 한편을 차지하고 서 있는 백 실장에게 향했다.

미리 도하에게 부탁해 백 실장을 불러온 도희였다.

특수부대원 출신인 그녀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아 어머님을 지키기에 충분했고, 어머니 곁엔 도사가 있으니 백 실장에게도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도희의 뻣뻣한 눈길을 받은 백 실장은 가볍게 고갤 숙였다.

비록 표정은 새초롬했지만.

‘저거 고맙다는 거지? 으그… 저 여자도 참.’

그녀의 고개는 다시 창 너머 먼 산을 향한다.

다시 시선을 돌린 도희도 강아와 도하를 데리고 잠시 병실을 나섰다.

*     *     *

“언론은 조용하네? 엄마 팔아먹은 사기꾼들이라고 난리였다더니.”

누구보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강아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러게. 무죄라는 기사 하나 안 떴네.”

말을 끝낸 도희가 도하를 바라보자, 그의 입이 열린다.

“전부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그쪽도, 저희도.”

“그럼 저희 이제 이 일은 묻어야 하는 건가요?”

“당장은 그래야 할 거 같습니다.”

‘당장은’이라는 말뜻을 이해한 도희가 도하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갤 끄덕였다.

눈치 빠른 강아도 말뜻을 알아들었다.

“받기로 했던 병원비와 보상금은 그대로 받기로 했습니다. 그게 강아씨에게도 좋을 거 같아서요.”

“병원비라도 받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애초에 그들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었다.

“강아야 아까 도사님이 그러시는데…….”

—회복이 가능할 듯허이.

“정말요?”

—느리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님세.

“영단 재료를 다시 구해 볼까요? 혹시 다시 가면 찾을 수도 있지 않나. 저번에 다 돌아보진 못했잖아요?”

“영단? 그게 뭔데?”

조용히 영단 이야기를 듣던 강아는 당장 다음날부터 산에 간다며 채비에 나섰다.

*     *     *

“좋은 아침~”

“팀장님!”

“팀장니이임!”

“어? 나오셨어요?!”

사무실에 도희가 등장하자 팀원들은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랬다니까요? 우리 팀장님 그럴 분 아니라고!”

“나 믿은 건 소하씨밖에 없네? 고마워요, 소하씨.”

“저도 팀장님 믿었습니다.”

“저도 껴주셔야 합니다.”

갑자기 들이미는 두산의 얼굴에 웃음이 터진 도희였다.

“이제 다시 안 가시는 거죠?”

“어머, 진명씨 무슨 그렇게 무서운 말을… 왜요? 저 다시 갈까요?”

도희가 다시 문밖으로 나가는 시늉을 하자, 진명은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고개까지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일은 다 해결되셨냐~ 그런 말이죠.”

“살면서 별일이 다 있네요. 이제 유치장 갈 일은 없을 거예요.”

헛웃음을 터트린 후 자리에 앉은 도희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풀었다.

“그럼 숙제 검사랑 쌓인 일 좀 해볼까요.”

*     *     *

연차를 뺀 도하가 급히 찾은 곳은 도심 근처에 있는 고급 주택가였다.

고급 주택가여서인지 골목엔 가끔 보기 드문 외제 차량만 오갈 뿐, 오가는 이 없이 한적하다.

도로 한편에 차를 세워 둔 도하는 자신의 휴대 전화 속에 적힌 주소와 대저택 문패에 적힌 번지수를 번갈아 쳐다본다.

[29—4번지.]

우주가 보낸 주소가 여기임은 틀림없다.

차에서 내리기 전, 도하는 먼저 푸른 옥빛 도포를 목에 동여맨 뒤, 목걸이를 목에 걸고 손목시계 타이머를 10분 뒤로 맞췄다.

도포를 뒤집어쓰면 앞이 보이지 않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거울에 비치던 자신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짧게 내뱉었다.

‘할 수 있어.’

도사도 없기에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해선 안 되었다.

곧 검은색 차 문이 덜컥 열렸다가 닫히지만,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심호흡으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도하를 가로막는 것은 하늘 높이 솟은 담장이었다.

그의 키보다 두 배는 높은 담장에 막힌 그는 망설임 없이 주택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운동화 끈을 다시 꽉 동여맨 그가 담장을 넘기 위한 발돋움을 하려는데!

찌이잉— 턱!

큰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앞치마를 맨 중년의 여성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온다.

*     *     *

깔끔하게 잘 꾸며진 긴 정원을 지나, 거실 창문을 넘어 집안까지 힘겹게 들어온 도하는 두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아무리 찾아도 지하실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우주에게 전활 걸어봤지만, 여전히 전화는 꺼져 있다.

그때, 앞치마를 맨 중년의 여성이 식판을 들고 도하 앞을 지나친다.

결국 그녀의 도움으로 무사히 지하실 문 앞에 도착한 도하였다.

*     *     *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물론 정말 이해를 못 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내 말이 어려웠나요? 제가 전적으로 개선부를 믿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강 팀장은 보고만 착실히 하면 됩니다.”

“모든 보고는 원래도 부장님께 올라갑니다.”

“아니요. 사무적인 보고 말고.”

강 부장은 일부러 뜸을 들여 말했다.

“내부적인 보고까지도요.”

반달눈을 한 웃는 낯의 강 부장이었지만 왠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진다.

“어떤 내부적인 보고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누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고, 그렇기에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세세한 보고들?”

“개선부에서 행해지는 모든 업무는 보고서화 되어 부장님께 올라갑니다. 저희도 사람인지라 보이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아요.”

도희는 어깰 으쓱이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제가 강 팀장의 든든한 편이 되어 드린단 말이었는데… 못 알아들은 건지, 싫다는 건지.”

뒷말은 혼잣말인 듯했다.

물론 도희에게도 들렸지만.

“못 알아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새로운 감사부장에게 허릴 90도로 숙여 인사를 마친 도희는 거침없이 돌아서 감사부를 나섰다.

*     *     *

“오랜만에 사내 식당 밥 먹으니까 맛있네요.”

“유치장에선 뭐 드셨어요?”

해맑은 소하의 질문에 팀원들은 모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 대리는 입까지 막고선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거기 밥 잘 줘요. 음… 짜장면도 맛있고, 국밥도 맛있었고, 특히 국밥집 깍두기가 너무 맛있…….”

갑자기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식당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무슨 일 났나?”

능청스러운 도희의 대답을 들이며 미소 짓던 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서 상황 파악에 나섰다.

“무슨 일이죠? 불이라도 났나?”

그때, 저 멀리 무채색 복장의 한 무리의 남자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다가온 그들은 도희의 주변을 둘러싸더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강도희씨, 당신을 산업 기술 보호법 및 부정 경쟁 방지법 위반으로 긴급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뭐, 뭐라구요?”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도희의 양손에는 은빛 수갑이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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