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79)화 (79/120)

078화 이보다 좋을 순 없을걸요.

우거진 나무숲 사이를 당차게 헤쳐 걸어 나가는 여인은 산뜻한 산 내음을 맡으며 어미에게 달여 줄 약초를 찾고 있었다.

그런 마음씨 고운 여인의 뒤를 몰래 따르던 불순한 자들은 여인을 제치고는 앞을 막아섰다.

험상궂게 생긴 도적 떼는 서로 앞다퉈 여인에게 우악스러운 말들을 뱉어 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순한 도적의 손길에 겁은 먹은 여인이 눈을 감고 잔뜩 움츠려든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에 의해 불순한 도적패는 산 아래 비탈길로 굴러 떨어졌다.

‘도사님.’

과거의 상념에 빠져 있던 도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짙은 기억의 골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이제 꺼낼까요?’

—그러려무나.

강아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갈색 둥근 항아리 속에 들어 있던 누런 양피지 서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서책은 다시 병상에 누워 있는 여인의 손 위로 고이 놓인다.

‘에휴, 저 사람들 언제 갈까요.’

병실 입구엔 병실 문에 달린 유리창으로 안을 힐끔힐끔 확인하는 형사들이 있었다.

—어째 이번엔 느낌이 좋지 않구나.

‘도사님, 도희한테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목숨 달린 일은 아니니 되었다.

자신의 어머니 때문이라 생각한 강아는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괜찮데도. 너무 걱정 말거라. 그 아이라면 잘 해낼 터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소식을 전해주는 우주가 있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은 가능했다.

강아가 도희 걱정에 빠진 사이, 다시 과거의 깊은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 도사였다.

*     *     *

솨아아아아—

“악! 어푸…….”

“푸우!”

머리 위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폭포수에 의해 도희와 도하의 머리는 다시 물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물속에서 눈을 뜬 도하는 물에 잠겨 허우적대며 서서히 가라앉는 도희를 떨어지는 폭포수 옆으로 겨우 끌어 올렸다.

“푸!”

“커어… 컥!”

그리고 난 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도희를 끌고 바닥이 보이는 곳을 향해 힘껏 헤엄쳤다.

“커, 커억……!”

“후! 후아, 후…….”

죽을힘을 다해 땅에 다다른 도하는 빠르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침으로 물을 뱉어 낸 도희도 가쁜 숨을 들이켜고 있다.

“도희씨, 괜찮아요?”

“후하… 후하… 네… 미안해요, 저 때문에.”

턱까지 몰아친 가쁜 숨에 말하기도 벅찬 도희였다.

“아니에요. 무사히 도착한 거 같은데요?”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수 뒤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빛은 동굴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늘은 해가 쨍한가 보네요.”

“동굴이라 어두울 줄 알았는데 무척 밝네요.”

“실망하셨어요?”

“예?”

“풉, 아니에요.”

자리에서 일어선 도희는 손으로 입고 있는 티셔츠의 밑부분을 돌돌 말아 쭈욱 돌려 짰다.

“옷도 몇 벌 안 가져왔는데…….”

도희의 손이 닿는 옷의 곳곳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을 보며 도하도 상의를 훌렁 벗더니 물을 짜기 시작했다.

탄탄한 근육질의 상체가 버젓이 드러났다.

저도 모르게 도하의 가슴골에 시선을 보냈던 도희는 급히 고갤 돌렸다.

‘뭐야, 왜 말도 없이 훌렁훌렁 벗어.’

평소 도하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돌발 행동이었다.

도희는 젖은 상의를 들어 올려 얼굴에 오른 열을 겨우 식혔다.

도하는 그런 도희의 행동을 귀엽단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구… 가방도 다 젖어 버렸네. 분명 저기를 생각했는데 물 한가운데로 떨어질 줄은 몰랐네요.”

도희의 시선은 동굴 가운데 위치한 평평한 돌단 위를 향해 있었다.

“오히려 시원하고 좋네요. 오랜만에 수영도 하고.”

싱긋 웃어 보이는 도하였다.

도하의 예쁜 미소에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낀 도희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돌단이 생각보다 좁았네요. 더 넓은 줄 알았는데.”

평평한 돌단 위에서 잘 생각으로 부피가 작은 담요 몇 개만 챙긴 그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인 모텔을…….”

“무인텔도 CCTV 없는 곳이 없으니까요. 전 여기도 좋은데요. 그리고 여기보다 안전한 곳은 없을 거 같네요.”

뭐든 좋다고 말하는 도하가 귀여운 도희였다.

‘오늘따라 신나 보이네.’

“도하씨는 꼭 놀러 온 거 같아요.”

도하가 곁에 있으니 도망자 신세인 것도 잊게 된 그녀였다.

도희의 옅은 미소를 본 도하는 더 진한 미소로 답했다.

“도희씨도 그렇게 생각할래요?”

“좋아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도희의 좌우명이었다.

“좋아요. 그럼 전 일단 여기 정리 좀 해야겠네요. 편히 쉬실 수 있게.”

도희의 의아한 눈빛을 받은 도하는 싱긋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설마…….”

곧 환한 빛에 휩싸인 도하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     *     *

“이런 동굴에 모닥불이 아닌 가스난로라니.”

“모닥불 연기 도희씨한테 안 좋아요.”

사라진 도하가 다시 나타날 때마다 동굴 살림은 하나씩 늘어갔다.

어느새 평평한 돌단 위에는 에어 매트가 깔려 있고, 동굴 한편에는 캠핑 테이블에 캠핑 의자까지 생기더니 그 옆엔 난로까지 놓여 있는 상황이다.

“산속인데 생각보다 춥진 않네요.”

어둠이 스며든 동굴은 켜켜이 놓인 촛불들이 저마다 빛을 내는 덕분인지 오히려 아늑하고 포근했다.

“새벽엔 추워질 수도 있어요. 추우시면 말씀하세요.”

“저도 난로 켤 줄 알아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예?”

“왜 놀라세요. 담요 드리려고 했는데.”

“우 형사님이랑 친해지더니… 큰일 났네, 큰일 났어.”

도희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작게 차자, 도하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우 형사님이 왜 도희씨 놀리는지 알겠네요.”

“왜요. 놀릴 맛이 나요?”

“너무 귀여워요. 그 표정.”

손가락으로 양 눈 끝을 쭉 당긴 도하였다.

“풉, 내 표정이 그렇다구요?”

“봐요. 지금도 똑같아요. 거울도 가져와야 할까 봐요.”

다시 가자미눈이 된 도희를 보며 웃음이 터진 도하였다.

“도하씨 오늘 말을 엄청 잘하시네요?”

“제가 원래 말을 못 했나요?”

“아니… 뭐, 그건 아닌데 오늘 좀 분위기가 달라서요.”

“다행이네요.”

“뭐가요?”

“가까워진 거 같아서요.”

“원래 같이 고생하면 친해진데요.”

“저흰 그럼 이제 친한 건가요?”

“그럼 안 친해요? 난 우리 팀에서 도하씨랑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도하의 입가를 차지한 싱그러운 미소를 보며 도희가 말을 이었다.

“진명씨랑 두산씨는 스파이인지 뭔지, 부사장이랑 만나긴 한 거 같지. 소하씨는 혼자 업무만으로도 벅차 보이지. 새로운 강 부장은 또 어떤지 알아요?”

“어떻습니까.”

표정을 잃은 도하를 보지 못한 도희였다.

“내 편이 되어 준다면서 뭐든 다 말하래요. 아니지, 말이 아니라 보고하래요. 이젠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만 믿으세요.”

“풉.”

도하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갑자기 남자들이 막 여자 꼬실 때 ‘이 오빠만 믿어’ 하는 그런 상황이 떠올라서요.”

목소리까지 낮게 깔며 남자 목소릴 흉내 낸 도희였다.

능청스러운 표정의 도희를 보며 도하는 또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면 이상한 건데… 도희씨랑 있으니까 웃게 되네요.”

“그러게요. 아휴… 전 도대체 며칠째 범법잔지 모르겠어요.”

유치장에서 나온 지 하루 만에 다시 체포당할 뻔한 도희였다.

“그리고…….”

도희는 양 손가락을 마주 잡고 얼마간 꼼지락거리더니, 오물대던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정말 미안해요. 저 때문에 도하씨까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도하의 눈을 보며 전하는 도희의 말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지금 제 기분이 어떤지 아세요?”

“…어이없으시겠죠. 황당하고 열 받…….”

“이보다 좋을 순 없을걸요.”

해맑은 도하의 모습에 도희도 피식 웃음이 났다.

“도희씨 실종됐을 때 생각했어요.”

그 뒤로 말을 이어지지 않자, 의아함에 고갤 든 도희와 도하의 눈이 마주 닿았다.

“이 여자 곁에 항상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도희는 그런 도하에게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     *

모두가 잠들었을 깊은 밤.

바 테이블에 홀로 앉은 미남자는 왠지 쓸쓸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겨 있다.

곧 그의 옆으로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가진 한 여자가 다가온다.

“이 시간에 보자고 할 줄은 몰랐네요.”

여자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게요. 이 시간에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남자는 덤덤하게 답했다.

그의 시선은 줄곧 손에 들린 온더락 잔을 향해 있었다.

“앉으세요. 그래도 보고 싶으니까 나온 거 아닌가?”

잔에서 시선을 거둔 남자는 여자를 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선보였다.

당당한 남자의 태도에 피식 웃어 보인 여자는 못 이기는 척 옆자리에 앉았다.

“와인? 위스키?”

“술 잘 마셔요?”

여자가 물었다.

“모아씨보다는?”

“아닐 건데.”

입꼬리를 올린 여자는 자연스럽게 술을 주문했다.

“술 좋아해요?”

이번엔 남자가 물었다.

“뭐, 싫어하진 않아요.”

“나보다?”

뜬금없는 우주의 말에 모아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주씨보다 술을 좋아하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면 우주씨도 술을 좋아하는데 그것보다 더 좋아하냐고 묻는 거예요?”

“생각보다 독해력이 좋으시네.”

“뭐야.”

“웃자고 한 소립니다.”

“갑자기 왜 이래요? 아빠 화 많이 났던데.”

“근데 왜 결혼은 하자고 하신답니까?”

“복수겠죠. 아빠는 절대 남 잘되는 꼴 못 보거든요.”

“어느 누가 잘되는 꼴 보기 싫은 놈을 딸이랑 결혼시킨답니까?”

“우주씨가 원하지 않는 거. 그게 결혼이니까.”

“딸이 이상한 놈한테 시집가는 것보다 본인 감정이 우선이라는 건가요?”

“음… 말이 그렇게 되나요?”

“그렇죠.”

“어차피 이미 아빠는 우주씨가 마음에 들었고, 놓아줄 생각 없으실걸요.”

“제가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 마음에 드신 거겠죠.”

“같은 거죠. 우주씨를 얻으면 우 의원님을 얻는 거니까.”

“모아씨 생각은 어때요?”

“제 생각이 중요한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지금껏 모아가 편하게 수많은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결혼만은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하겠단 약속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딱히 결혼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래서 저랑 결혼을 하겠단 말씀?”

“아버지가 원하면요?”

“사랑 없는 결혼이래도?”

“사랑해서 결혼해도 다들 이혼하고 그러던데? 결혼만큼은 아버지한테 반기를 들 생각 없어요.”

모아에게 결혼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였다.

어차피 갇혀 살 생각 없는 그녀였기에.

“난 사랑 없는 결혼은 할 생각이 없는데.”

“그럼 열심히 엎어 보세요. 이 결혼.”

“딱히 엎을 생각도 없는데.”

그래서 대체 어쩐다는 건지, 모아의 표정엔 의문이 들어찼다.

“룸에서 한잔 더 할래요?”

물음표는 느낌표가 되어 모아 입가의 미소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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