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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80)화 (80/120)

079화 몸에 손끝 하나 닿지 않은 남자

달빛도 빛을 잃은 고요한 새벽.

고이 잠든 여자를 스치듯 쳐다본 우주는 그대로 침실을 나섰다.

곧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잠든 줄 알았던 여자의 감긴 눈이 서서히 뜨인다.

몸을 일으킨 모아는 남겨진 우주의 메모를 보며 작게 코웃음 쳤다.

밤새 자신의 몸에 손끝 하나 닿지 않은 남자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곧 저 뻣뻣한 남자도 자신의 발밑에서 기어 다닐 게 뻔했으니까.

다만 홀로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모아는 휴대 전활 들어 누군가에게 전활 걸었다.

“자기야, 비산호텔 내 룸으로 와.”

—늦었어. 그만 자.

“나 안 보고 싶어?”

—어.

“자기 또 우리 아빠 만났구나. 아빠 원래 맨날 그러잖아. 뭘 신경 써.”

—지겹지도 않니.

“무슨 말이야.”

—난 이제 지쳐. 너도 이제 진짜 너 아껴 주는 남자 만나.

“왜? 강도희가 다시 받아주기라도 한대?”

—나 강도희 안 만나.

“안 만나긴, 자기가 죽고 못 사는 강도희잖아.”

—나 만나주지도 않아. 그러니까 걘 건들지 마.

“하! 아주 비싼 몸 나셨네, 그치?”

—손모아! 이제 네 연락 안 받을 거야.

“뭐?”

—너도 이제 정상적인 빛나는 연애를 해. 돈 보고 만나는 남자 말고.

“너 미쳤어?”

—끊을게.

뚜뚜—

쨍그랑—!

던져진 휴대 전화가 거울에 부딪히며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볼이 따끔하다.

볼을 닿은 손가락엔 피가 묻어났다.

“꺄아아아! 으으으!!!”

분을 참지 못한 모아가 소릴 질러 대자, 놀란 객실 직원들은 황급히 스위트룸으로 몰려왔다.

그들을 맞이한 건 엉망이 된 스위트룸과 피투성이의 손모아였다.

*     *     *

손모아는 지혁에게 작은 관심이라도 가지는 여자는 철저히 망가트렸다.

그게 자신의 친구일지라도.

그렇기에 더욱 조심했지만, 모아의 입에서 ‘강도희’란 이름이 나올 땐 가슴이 철렁한 지혁이었다.

사람 마음이 본인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도희’란 이름은 그도 떨쳐내고 싶지만, 절대 떨쳐낼 수 없는 이름이다.

그가 아는 손모아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건 도희가 곤란해지거나, 위험해진단 뜻이었다.

“하아…….”

밤이 깊어가는 동안, 그의 고민도 더욱 깊어만 갔다.

오늘도 손모아를 만난 밤을 후회하는 지혁의 밤은 길고도 길었다.

*     *     *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걸까.”

“저도 상상이 안 갑니다.”

무혁의 질문에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전 상무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절대 황이재 혼자 벌인 짓은 아닌데.”

“황이재 사이즈는 아닌 거 같습니다. 아마 강 팀장이 엮인 이번 비산 사건과 관련 있는 듯한데…….”

“황이재가 비산 손남수 사장을 만난 건 확실해?”

“한옥 식당 종업원에게 사진 보여 주고 확인했는데 맞는 거 같답니다.”

고고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무혁은 꼬아 올린 긴 다리를 ‘툭툭’ 흔들었다.

“강 팀장 친구는 만나봤나?”

“만나긴 했는데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흐음…….”

“뭘 알아야 도와줄 텐데 말입니다.”

“감옥에 가기 싫었던 강 팀장이 사기 고소를 취하하는 대가로 우리 회사 기밀자료를 비산에 넘겼다.”

“그럴 듯하게 짜인 각본이긴 하죠?”

“여기까진 그럴 듯하지. 근데 실제론 자료를 받을 생각 없던 비산이 그 자료를 다시 우리 회사에 주면서 사실대로 밝혔다? 왜?”

“이런 산업 스파이를 걸러 내라는 좋은 의미였답니다. 진짜 자료를 줄지도 몰랐답니다.”

“강 팀장 사기 고소 취하는 왜 했는데?”

“그러게요. 굳이 돌고 도는 일을.”

“퍼즐이 이상하게 안 맞춰져.”

“근데 강 팀장은 왜 도망갔을까요. 진짜 아니라면 어떻게든 아니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사기 혐의 때도 꼼짝없이 잡혀들어 갈 뻔했잖냐.”

“그 일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강 팀장이 돈을 밝히긴 했어도 그럴 사람은 아닌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 비산에 적을 진 건 확실해. 이젠 부사장도 그 판에 낀 거 같고.”

“일단 저희도 준비하던 자료는 계속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황이재도 한 번은 빠져나와도 두 번은 힘들겠지.”

박 비서와 한 부장이 잡혀들어 간 재판에서도 황이재가 겨우 빠져나온 걸 아는 무혁이었다.

“강 팀장 흔적은 아예 없나?”

“예. 이도하나 강 팀장이나 생체 신호가 아예 없습니다. 현금 뽑은 흔적도 없고요.”

“탐나는 인재야. 도망에도 소질이 있네.”

“그걸 농담이라고 하십니까?”

“계속 찾아봐. 어차피 한국에서 오래 숨진 못해.”

“예.”

“그리고 황이재한테 전화 넣고.”

“만나시게요?”

“매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

*     *     *

“하아, 웬일이실까. 우리 사장님께서 절 다 찾으시다니.”

“비꼬는 건 여전하시네요.”

“사장님도 여전하십니다.”

이 상황은 예상한 전 상무는 멀찍이 떨어져 이들의 승자 없는 기 싸움을 그저 구경할 뿐이었다.

“차 한 잔 안 줍니까?”

“제가 그렇게 물으니 누가 그러더군요. 오래 계실 건가요?”

“하, 하하하!”

웃겨 죽겠다는 듯 크게 웃어젖히는 무혁이었다.

이내 곧 표정은 지운 그가 입을 열었다.

“강 팀장이 그러던가요?”

황이재는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그래도 전 차 한잔해야겠는데.”

무혁의 말에 황이재는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비서가 가지고 들어온 향긋한 차향과 고소한 커피 향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차향이 아주 좋네요.”

“글쎄요. 전 차는 마시지 않아서.”

황이재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급하셨나 봅니다. 절 다 찾아오시고.”

“제가 급할 게 뭐 있습니까.”

“아, 전 다 알고 찾아오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봅니다.”

“뭘 말씀이십니까.”

“강 팀장 혼자 한 일이 아니라던데.”

황이재의 말에 무혁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럼 누가 시킨 거다?”

눈을 껌뻑이며 고갤 끄덕이는 황이재의 표정은 아주 얄궂었다.

“하, 하하하.”

웃음이 흘러나오지만 웃고 있진 않은 무혁이다.

헛된 웃음을 그친 무혁의 입에선 냉기 가득 찬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시킨 거다?”

이번엔 황이재의 고개가 옆으로 까닥거리며 어깨는 들썩였다.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싸늘한 무혁의 말에 황이재가 답했다.

“돌려 드리는 겁니다, 전부.”

이 또한 함정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무혁이었다.

*     *     *

찰칵, 찰칵—!

찰칵—!

커다란 나무 기둥에 기대앉은 남자의 몸엔 나무 기둥과 함께 묶은 굵은 마 끈이 칭칭 감겨 있다.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입가엔 섬뜩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런 밧줄은 어디서 구하는 거야.”

박 경위가 투덜거리자 막내가 끼어들었다.

“줄다리기할 때 쓰는 줄이잖아요.”

“그걸 몰라서 묻냐? 이런 범행 도구는 전부 판매처 조사해야 되는 거 몰라?”

“이거 인터넷에도 팔 텐데…….”

“하… 잠깐 조용하다 했더니 또 이상한 사건이 걸리네.”

“외상은 없어 보이는데 사인이 뭘까요?”

“그걸 알면 내가 검사관 하고 있지.”

“에이, 우리 박 형사님 오늘 왜 또 까칠하실까.”

“진짜 팀장님도 너무한 거 아니냐. 우 경위 정직을 풀어주던가, 사람을 늘려주던가! 지금까지 못 쉬었는데 이렇게 사건 터지면 또 언제 쉬란 건지, 원.”

“그냥 때려치워.”

“어… 팀장님 오셨습니까.”

막내는 눈치를 보며 서 팀장과 박 경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냥 때려치우고 쉬면 되잖아. 아니면 우 형사처럼 사고 쳐서 정직 먹던지. 뭘 원해?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도와줄게. 골라봐.”

다가오는 서 팀장을 본 박 경위는 뒷걸음질 치며 서서히 물러섰다.

“에이, 이 와중에 저까지 없으면 우리 팀 힘들어서 어떡합니까. 제가 우 경위 몫까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여튼 말은 잘해요, 말은.”

“팀장님 오셨습니까.”

주변을 둘러보고 온 이 경위였다.

“특이 사항은.”

“신원은 아직 파악 중인데 50대 남자로 추정됩니다. 현장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인은 검사해 봐야 알 거 같습니다.”

“자살 정황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남자를 감싼 굵은 마 끈의 매듭이 나무 기둥 뒤에 있습니다. 묶은 것도 신기하긴 한데, 나무 기둥이 굵어서 혼자선 절대 불가능하답니다.”

“타살이란 말이네.”

“…또 이상한 살인 사건이네요.”

고생길이 예고된 팀원들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     *     *

철푸덕—!

“아!”

“꺄아아!”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도희가 비명을 지르면서 작은 캠핑 의자가 뒤로 무너졌다.

“아오…….”

돌에 부딪힌 팔을 문지르며 소리 난 곳을 쳐다보는 도희의 눈에 바닥에 주저앉아 엉덩이를 거듭 문지르며 아파하고 있는 우주가 보인다.

“우 형사님?”

“아… 도희씨 보고 싶었어요.”

‘풉, 아파하든가, 웃든가 하나만 하지.’

우주의 표정은 아주 기괴했다.

우주 곁으로 다가간 도하가 우주에게 손을 내밀자 우주는 그 손을 잡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있었어요?”

“우리 어제 봤어요.”

“십 년은 지난 줄 알았잖아요.”

또 가자미눈이 된 도희였다.

—아주 이곳에 살림을 차렸구나.

“도사님은 좀 반갑네.”

오랜만에 듣는 도사의 목소리였다.

—고생했구나. 고맙다.

“도사님이 왜 고마워요.”

—너는 어쩜 그러려니 하는 법이 없는 게냐.

“아직 고생길이 천 리라서 그런가 봐요.”

반가움에 투덜거려 보는 도희였다.

—쯔쯧, 고얀 놈.

“하하, 거참, 놈 아니라니까.”

—허허허, 여전한 거 보니 고생을 덜 했나 보이.

“헐. 어떻게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이곳에서 식사는 어찌 챙겨 먹느냐.

“저기 천연냉장고 있잖아요.”

폭포수 웅덩이 끝자락에 겹겹이 비닐로 쌓인 무언가가 둥둥 떠 있었다.

—허허, 양을 보니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그래도 영양 보충은 해야죠.”

우주는 넘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가방을 주워들고선 흔들어 보였다.

“뭐 사 왔어요!?”

달려드는 도희의 뒤를 도하도 따랐다.

“일단 먹고 이야기해요. 할 이야기가 많아요.”

“그래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금강산이라 함은 기달산을 말하는 게구나. 거기 경치가 아주 뛰어나 여름엔 봉래…….

지이잉—

“…도희씨.”

우주가 사 온 음식을 내놓느라 도사의 말도 흘려듣던 도희는 우주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도희씨!”

“네?”

이제야 고갤 들어 우주를 쳐다본 도희였다.

심각한 우주의 표정을 보니 덩달아 불안해졌다.

도희에게 다가온 우주는 자신의 휴대 전화 화면을 도희에게 내밀었다.

그 문자를 읽은 도희는 사색이 되어 바닥으로 무너진다.

“무슨 일이에요?”

도하의 물음에 넋을 잃은 그녀가 말했다.

“…마 부장이 죽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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