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얼굴에 닿는 그의 숨결
동굴 구석에서 전화를 마친 우주가 도희 곁으로 다가왔다.
“호, 혹시 스스로…….”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도희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우주가 고갤 내저었다.
“타살 가능성이 크답니다.”
“……!!!”
“살해당했단 말입니까?”
“누가 마 부장을…….”
그의 평소 행실을 되짚어 보면 누군가에게 원한 살 만한 행동을 자주 하긴 했었다.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네요.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하나.”
—관계없네. 어찌 되었건 살인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일세.
“물론 그렇죠. 그래도 착하게 살면 적은 많이 안 생기잖아요.”
—그럼 못되게 사는 것들은 이미 다 죽었단 말이냐?
“뭐, 그건 그렇네요.”
아무리 싫어하던 마 부장이라도 죽었다니 마음이 좋지 않은 도희였다.
“근데 문제는… 발견 장소가…….”
뜸 들이며 입을 떼지 못하는 우주에게 시선이 모였다.
“여기 오악산이랍니다.”
“네에?!”
“예?”
좀처럼 놀라지 않는 도하에게서도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토끼 눈을 한 도희와 도하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괜히 속에선 불안함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우주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 도희씨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또 무슨 폭탄 발언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 건지 영 불안한 도희였다.
“잠시만요. 나 심호흡 좀 할게요. 후… 후…….”
이마와 가슴에 손을 올린 도희는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 부장 집에서 이상한 게 발견됐답니다.”
“어떤……?”
“그게… 도희씨를 살해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 같답니다.”
우주도 적잖이 당황한 모양인지 그의 눈동자는 쉼 없이 흔들리고 있다.
“도희씨가 요즘 연차를 쓰거나, 회사에 나오지 않아서 번번이 실패한 거 같아요. 집에서 발견된 메모와 각종 살해 방법들, 그리고 회사 앞 CCTV에서도 그 행적이 확인되었답니다.”
“…나, 날 죽이려 했단 거죠…….”
또다시 다리에 힘이 풀린 도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하는 주저앉은 도희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깰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주었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주의 눈빛에 살짝 이채가 서렸다 사라진다.
“비산병원까지 찾아왔던 거 같습니다. 병실 옮긴지 모르고요.”
“그럼 혹시 저번 새벽에 우리 옮긴 병실에 누군가 찾아왔다는 게…….”
—아닐세.
도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답한 도사였다.
—마 부장 그자의 기운은 내가 기억하네. 그자의 기운이 아니였으이.
“지금 병원에서는 CCTV를 자료 공개를 안 하고 있어서 확인이 안 되네요. 일단 영장이 나와도 도희씨가 피해 입은 건 없어서 자진 협조가 아니라면 보기 힘들 거 같습니다.”
입술을 짓이기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우주에게서 답답함이 묻어났다.
“일단 도희씨는 안전한 곳에 더 계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여기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거예요.”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우주와 도하에게 도희는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바깥 상황이 좋지 않아요. 아침부터 뉴스와 기사로 도배되더니 도희씨 신상까지 공개된 상황이라…….”
“전 괜찮아요. 이미 다 팔린 신상 뭐 아깝다고.”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닌 그녀였다.
“도희씨 실종 사건부터 비산병원 사기 혐의, 이번 산업 스파이 일까지 묶어서 보도되고 있어요. 실종도 자작극이 아니냐고 난리 난 상태고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트리는 거 같네요.”
“비산이겠죠.”
“회사 내부자도 돕고 있을 거예요. 저도 보지 못한 그 기밀 서류란 게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는 없잖아요?”
“황이재. 알아보니까 고소 지시 내리고 있는 사람이 화정 기획 황이재입니다.”
“부사장이네요. 뭐 너무 뻔해서 놀랍지도 않네.”
“비산 쪽은 누굽니까? 저희가 서류 전달했다는 사람이.”
“증인 보호 요청으로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곧 밝혀지겠죠.”
“근데 서류는 비산에서 받았다는데 고소는 화정 기획에서 했다? 이건 뭔 말이죠.”
“비산에선 도희씨가 진짜 기밀 서류를 넘길지도 몰랐고, 내용상 심각한 기밀이라 화정에 ‘산업 스파이 여기 있습니다!’ 하고 넘긴 거라네요.”
“스토리상 비산에선 자신들은 정상 참작 받으려고 빠진 걸로 보이네요.”
기밀을 넘겨받은 상태로 그대로 고소를 당한다면 도희나, 비산이나 같은 피의자였다.
“그렇죠. 아마 비산이랑 화정은 미리 이야기가 된 거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도희씨를 함정에 빠지기 위해서 뭉친 거죠.”
“참, 두 회사가 나 하나 잡으려고 용을 쓰네요. 용을 써.”
“우리 도희씨가 워낙 능력자라…….”
우주의 농담에도 웃음이 나질 않았다.
“아니, 그럼 그 서류 받고 난 왜 풀어줬는데? 거기다 사기 혐의로 씌우면 되는 거잖아요. 왜 굳이 풀어주고 다시 잡는데? 말이 안 되잖아.”
무혁과 같은 의문이 든 도희였다.
애초에 비산 쪽에서도 도희를 풀어준 도하와의 거래를 공개할 수 없기에 생긴 구멍이었다.
“원래 급하게 끼워 맞추다 보면 틈이 생기죠. 그리고 그 틈이 균열을 만들 겁니다.”
도하의 말에 우주가 수긍하는 고갯짓을 보였다.
“전 일단 나가서 상황 좀 알아볼게요. 도희씨 절대로 밖에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아시죠?”
“하… 형사님한테 이렇게 신세만 져서 어떡하죠?”
“세상에 공짜는 없죠. 다 돌려받을 건데요?”
“네. 얼마든지 돌려드릴게요.”
“혹시 뭘로……?”
“뭐긴 뭐예요. 사건 해결이지!”
구겨진 도희의 표정에 웃음이 터진 우주와 도하였다.
“그리고 이도하씨.”
도하와 우주의 눈이 마주 닿았다.
“잘 부탁해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우주는 다시 도사와 동굴을 빠져나갔다.
* * *
산 능선에 걸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주황빛 노을이 내리깔린 폭포 위 언덕.
하산하기엔 늦은 시각이라 지나가는 이 하나 없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이곳에 저 높은 곳부터 거침없이 떨어지는 폭포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다.
동굴을 빠져나가는 우주와 도술의 기운을 느낀 남자의 시선은 언덕 아래 깊고 깊은 골로 향한다.
언덕과 바닥 사이 까마득한 거리와 뿌연 물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무언가 보이는 듯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였다.
이 자의 기운은 도사가 느낀 병원의 기묘한 기운을 닮았지만, 이미 산을 빠져나간 도사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 시간 그곳에 서 있던 남자는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눈 깜짝할 새 물안개와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 * *
‘강도희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한참 동안 도희 집 앞을 서성이던 남자는 이제 대놓고 현관문 앞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사기에다 산업 스파이라…….’
“하하…….”
지혁은 어이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터트렸다.
도희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인물이 못된다.
찝찝하다며 거리에 쓰레기 하나 못 버리고, 급해도 무단횡단 한 번 안 하던 여자다.
상처가 많아 항상 이기적으로 살 거라며 다짐하지만 매번 손해 보고 사는 여자가 강도희였다.
물론 본인은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켜보는 지혁의 입장에선 답답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똑똑해 보이지만 허점투성이인 여자.
당차 보이지만 은근 걱정이 많은 여자.
매사 쿨해 보이지만 어떨 땐 누구보다 소심한 여자가 그녀였다.
‘강도희가 사기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녀가 돈 욕심이 많은 것도 전부 돈 문제로 집을 나간 부모 때문이었다.
아무리 돈 욕심이 많아도 대가 없는 돈은 없다 여기는 그녀였기에 불법적인 알바는 쳐다보지 않던 그녀였다.
“후우…….”
지혁의 입에서 무거운 숨이 흘러나온다.
도희는 누명을 쓴 게 분명하다.
게다가 손모아의 아버지 회사인 비산과의 일이었으니 지혁의 불안한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 * *
사람은 변한다.
지금의 도희는 지혁이 알던 도희가 아니었다.
“이번에 나가면 부사장 어떻게든 감옥 넣고, 회사 확 때려치워야겠어요.”
“제가 적극, 도와드리겠습니다.”
“회사 나가면 뭐 하죠? 하긴 뭐, 도사님 요물만 있어도 돈 벌 방법은 천지라.”
이제는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할 판이었다.
“도사님한테 머리카락 나게 하는 빗도 있다니까요. 그걸로 몰래 탈모 환자들 치료만 해도…흐흐.”
도희의 얼굴엔 음흉하다 못해 노골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하, 떼부자되시겠는데요?”
“그러면 소원이 없겠네요. 평생 돈 걱정 없이 놀고먹을 수 있다면.”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뭘요?”
“놀고먹게 해드릴 수 있는데.”
“뭐야… 도하씨도 진짜 이상해졌어!”
가스난로 위, 주전자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그 소원 제가 이뤄드리겠습니다.”
능청스러운 표정도 지을 줄 아는 도하였다.
“책임이라도 지시게요?”
“그럼요.”
“이봐, 이봐. 남자들은 이렇게 공수표를 막 날려서 문제야.”
도희가 컵에 끓는 물을 따르자, 고소한 커피 향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일반화는 위험합니다.”
도희의 눈이 쭉 찢어지더니 도하가 제일 좋아하는 가자미눈으로 변했다.
“풉, 도희씨 그 표정은 정말 사진 찍어서 액자라도 걸어 두고 싶네요.”
도희는 커피 향 가득 품은 잔을 도하에게 건넸다.
“원한다면 찍어 드릴게요. 대신 평생 간직하셔야 해요. 버리기만 해봐.”
“버리다뇨. 안고 자야지.”
순간 도희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인지, 숨도 쉬기 힘들다.
“뭐예요. 정말. 도하씨는 그런 말 안 하게 생겼는데.”
볼에 닿은 손바닥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진다.
쑥스러워하는 도희의 행동에 도하는 의자를 끌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더워요? 난로 끌까요?”
언젠가부터 온 신경을 쏟아 도희만을 배려하는 도하였다.
그런 그의 배려가 싫지만은 않은 도희는 지금껏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제가 폭포에서 떨어지고 여기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든 생각이 뭔지 알아요?”
도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아… 만약 내가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도희씨 존재감이 그렇게 작진 않습니다.”
“그 존재감도 며칠이면 잊혀요. 어차피 다 남이잖아.”
“난 못 잊겠던데.”
도희와 도하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터질 듯 귓가를 울려서인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도하는 도희 앞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이내 무릎을 굽혀 도희와 시선을 맞춘 도하의 다홍빛 입술이 느리게 열린다.
“많이 더운가요? 얼굴이 빨갛네.”
도하의 부드러운 손길이 볼을 와 닿았다.
도희의 갸름한 턱선부터 볼까지 한 번에 품은 도하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얼굴에 닿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도희도 도하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도하씨도 더운 거 같은데.”
도희의 손길이 그의 볼에 닿자, 세상 환한 미소를 띤 도하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