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혹시 도둑질 해 보셨어요?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남자는 여자의 목소릴 들었지만, 고갤 드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삐죽인 여자는 새침한 표정으로 바텐더에게 손짓을 보낸다.
곧이어 바텐더는 익숙한 듯 여자에게 술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화는 좀 풀렸어?”
남자는 대답 없이 술잔만 휘저었다.
“정말 재미없게 이럴 거야?”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잔잔한 재즈 음악을 뚫고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손모아.”
남자의 부름에 여자는 향긋한 미소로 답했다.
“너 결혼한다면서.”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당황한 여자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빠가 그런 말도 했어? 알잖아. 나 아빠랑 약속한 거.”
“잘 알지. 아주 잘.”
남자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간다.
“자기 그 말 듣고 이러는 거야? 결혼이 뭐 대수인가. 그냥 서류상일 뿐이야. 어차피 그 남자나 나나 서로 자유는 보장된 채 서류로만 엮이는 거라구.”
손에 들린 술잔을 내려다보는 모아의 긴 속눈썹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모아는 술잔을 들고 휘휘 저으며 얼음을 녹였다.
마치 정말 결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행동이었다.
“넌 그렇게 살아. 네 말대로 자유롭게. 대신 이제 내가 어떻게 살든 나는 놔두면 안 돼?”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지혁의 말은 모아의 심기를 자극했다.
“자기도 자유롭게 살아. 누가 뭐래?”
“그래. 그럼 내가 누굴 만나든 그냥 둬.”
“마음대로 해. 대신 강도희는 안 돼.”
지혁의 고개가 급하게 꺾이며 모아에게 향했다.
“이제 포기할 때도 안 됐어? 자기 미련한 사람 아니잖아. 받지도 않는 연락을 왜 그렇게 해.”
“너 내 뒷조사까지 하니?”
지혁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모아가 자신에게까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유치장까지 찾아갔더라? 아주 눈물겨운 사랑 나셨어.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어땠어? 좋았어?”
모아의 비아냥에 지혁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 갔다.
“손모아.”
“왜. 뭐.”
“혹시 너랑 관련 있어?”
“뭐가.”
“도희 지금 상황.”
“걔 상황이 어떤데? 나랑 걔랑 무슨 상관이야.”
무심한 척 입술을 삐죽이며 먼 산을 쳐다보는 모아였다.
“또 그 표정이네.”
“내 표정이 뭐.”
“거짓말할 때 나오는 그 표정.”
마주 닿은 모아의 눈빛에선 싸늘한 냉기가 쏟아졌다.
* * *
솨아아아아—
눈가에 비친 따사한 햇살에 도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귓가를 울리는 세찬 폭포수 소리는 소음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으~!”
에어매트에 누워 있던 도희는 꿈틀대며 기지개를 켜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어요? 커피?”
언제 깼는지, 캠핑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도하가 웃으며 말했다.
“완전 좋아요.”
도희의 미소를 본 도하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의 불을 켰다.
“야생에서도 살 만하네요. 괜히 돈 번다고 고생하고 아등바등하며 집 살 필요가 없었네.”
“캠핑 용품 덕분 아닐까요?”
“아! 인정. 마트 덕분에 채집할 필요도 없으니 역시 돈은 벌어야겠네요.”
“놀고먹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니까.”
또 가자미눈을 기대한 도하였지만, 해맑게 웃으며 넘기는 도희였다.
“오늘은 영화 볼래요?”
“우리 수배 중인 거 맞죠?”
“잠깐 기다려요. 다녀올게요.”
“어, 어딜 가요. 또!”
괜히 혼자 남겨지는 게 싫었던 도희가 도하를 붙잡았다.
“10분이면 돼요.”
도사의 은가락지는 이제 도하 새끼손가락의 차지였다.
“20분 줄게요. 조심해요. 급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잔소리인지 걱정인지 어쨌든 도하에겐 듣기 좋은 말이었다.
“전부 모자에 마스크 끼고 다녀서 이상해 보이지도 않아요.”
곧 영롱한 빛에 휩싸인 그는 눈 깜짝할새 사라졌다.
* * *
“하아… 우리 팀장님 정말 괜찮을까요.”
“이번에도 돌아오실 겁니다.”
“이번엔 힘들 거 같은데…….”
휴게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근심 어린 표정의 세 사람에게 커피를 든 서 대리가 다가왔다.
“정말 강 팀장님이 사기 혐의 벗으려고 기밀자료 넘겼다고 생각하세요?”
팀원들은 서 대리가 주는 커피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러실 분은 아닌 거 같은데…….”
“에이, 소하씨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뭐든 하게 돼 있어요.”
“근데 그 기밀자료라는 게 뭘까요?”
“글쎄, 뭐 그건 팀장급 이상만 아시지 않을까요?”
“그건 나도 궁금하네요.”
문 쪽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놀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 부장님… 여기까진 어쩐 일로.”
이곳은 개선부만 사용하는 휴게실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팀원들은 저마다 인사를 하며 강 부장을 맞이했다.
“강 팀장과 이도하 대리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 정말 없나요?”
강 부장의 물음에도 대답할 수 있는 이는 하나 없었다.
* * *
띠리링—
띠리리링—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 전화 소리가 동굴 가득 울려 퍼졌다.
우주가 주고 간 대포폰이었다.
전화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선 도하의 얼굴 위로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 화면이 겹쳐지고, 곧 영화를 멈춘 도하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예. 우 형사님.”
—도희씨 좀 바꿔 주시겠어요.
“스피커폰입니다.”
—비산에서 병실로 찾아왔어요. 거래 제안할 게 있다고요.
“거래요? 지들이 무슨 낯짝으로 거래니 뭐니…….”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지만, 도하의 얼굴을 보고 삼켜 낸 도희였다.
“무슨 거래요?”
—만나서 이야기하자는데 어떡할까요. 일단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딱 잡아떼긴 했습니다.
“일단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그리고 화정 기획 사장도 도희씨 찾는다고 찾아왔길래 돌려보냈습니다.
“이무혁 사장이 병실에 왔어요?”
—예. 꼭 전화라도 달라고 전해달라면서 연락처를 주길래 일단 받아뒀습니다.
“네. 고마워요, 우 형사님이 제일 고생이네요.”
우주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도희였다.
—비싼 밥 사요.
“적금 깨죠, 뭐.”
—크큭, 네. 그리고 저쪽에 기밀 서류 받았다는 증인이 아마 천 변호사, 그 여자인 거 같습니다.
“설마 했는데… 천 변호사랑은 몇 번 만난 적이 있으니 끼워 맞추기 편했겠죠.”
—일단 만나 봐야 저들이 무슨 생각인지 파악될 거 같아요. 거래하자고 찾아온 거 보면 딴 목적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게요. 만나는 건 위험할 거 같고, 전화라도 해봐야겠네요.”
도희를 잡기 위한 함정일지도 몰랐다.
—천 변호사 번호 보내드릴게요.
“네. 공중전화라도 찾아볼게요.”
* * *
“우 형사님 도희 일이라고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정직 중이라 할 것도 없어요.”
“그래도… 이렇게 병실에 계셔 주는 것도… 저는 너무 고맙긴 한데…….”
“그럼 강아씨도 밥 사세요.”
“우 형사님한테 밥이야 백 번도 사죠.”
“저랑 밥을 백 번이나 드시게요?”
“왜요. 너무 적나요?”
“하하하, 아니에요. 충분하죠.”
“형사님 아니었으면 지금 저나, 도희나 둘 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으, 상상도 하기 싫어요. 그나마 우 형사님이랑 도하씨가…….”
도하란 이름을 말하고 나니, 왠지 불편한 마음이 드는 강아였다.
“왜 말을 하다 마세요.”
마치 다 안다는 듯 능글맞은 표정으로 묻는 우주였다.
“도희가 그렇게 좋아요?”
“좋으면요?”
“아니, 뭐… 지금 도하씨랑 도희랑 계속 붙어 있으니까… 남녀가 둘이 그렇게 붙어 있으면 없던 정도 생기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제 걱정하시는 겁니까?”
우주는 여전히 능글맞은 표정으로 밝게 웃어 보였다.
“걱정이라기보다…….”
걱정보다 어울리는 다른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걱정 맞네요. 우주씨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상처받을 일 안 생겼으면 좋겠어요.”
강아는 진심으로 도하와 우주, 도희 모두가 상처받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생한 보람은 있네요. 강아씨한테 칭찬도 듣고.”
“은혜도 모르면 사람이 아니죠.”
“하하, 형사 일할 때보다 더 보람 있네요.”
“에이, 나랏일이랑 어떻게 비교하나요.”
“…곁에 있는 사람 하나 못 지키면서 무슨 남을 지키나요.”
말하는 우주의 낯빛은 왠지 모르게 어두웠다.
“형사님도 사연 있는 남자였네.”
“예?”
“내가 눈치 백단인데, 형사님 얼굴 보니까 딱 사이즈가 나오네요.”
“하하하, 그래요? 여자들은 사연 있는 남자 좋아하지 않나?”
“그건 형사님이 더 잘 알지 않아요? 여자 많이 만나 보셨을 거 같은데.”
“제가 그래 보이나요?”
강아는 격하게 고갤 끄덕였다.
“역시 여자의 촉이란 무섭군요.”
“세상에 여잔 많아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세요.”
“전 일편단심 민들레라.”
“에?”
“그리고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도하씨라면 저도 인정.”
우주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양팔을 들어 보였다.
역시 우주가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든 강아였다.
* * *
“네. 그럼 준비되는 대로 제 친구 강아에게 연락 주세요. 네. 사장님도 조심하시고요. 들어가세요.”
도하는 전화를 끊은 도희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대화 내용이 궁금한 모양새다.
“비산이랑 황이재 부사장이랑 붙어먹은 게 확실하네요.”
“뭐라고 합니까?”
“황이재가 이무혁 사장한테 똑같이 돌려주는 거라면서 강도희가 전부 사장이 시킨 거라고 말할 거란 뉘앙스로 말했대요.”
“도희씨가 이무혁 사장까지 엮는단 말인가요?”
“예. 이무혁 사장이 말이 사장이지, 전문 경영인으로 사장 계약직이잖아요. 회사 옮겨 다니면서 기밀 정보 팔아먹는 걸로 낙인찍어 주겠다 이거죠.”
“한 방에 머리를 보내겠다. 이거네요.”
“황이재의 타겟은 제가 아니라 이무혁 사장이었네요.”
“부사장이 도희씨한테 딜 걸기도 전에 도희씨는 도망쳐 버렸고.”
“아마도?”
“하하하, 나름 치밀하게 짜인 판이었네요.”
“부사장 보통 영악한 게 아니네요. 역시 쉽게 볼 사람은 아니야.”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면 남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나 봅니다.”
“아니, 내가 사장이 다 시켰다고 증언하면 나도 내 죄를 인정하는 건데 내가 그 짓을 왜 해요? 근데 무슨 제안을 한다는 거지?”
“벌금이나 형량 거래 아닐까요.”
“허! 앉아서 범죄자 되란 말이네. 그것도 아니면 혼자 다 뒤집어쓰던가?”
이러나, 저러나 도희는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선택지였다.
“진짜 악질이네요.”
“생각할수록 진짜 나쁜 놈이네.”
“근데 이무혁 사장은 뭘 준비한다는 거죠?”
준비되면 연락 달라며 전화를 끊은 도희였다.
“아, 황이재가 접대 명부를 가지고 있을 거래요. 한마디로 비리 명부죠, 뭐. 한 부장, 박 비서 재판 때도 그걸로 누군가 협박해서 나온 거 같다네요.”
“여러모로 비열한 인간이군요.”
“그동안 이런 식으로 사람 누명 씌우고 협박한 게 한두 번이 아닐 거래요.”
“예전에 장 이사라인 사람들이 고초를 많이 겪긴 했죠. 이대로라면 우리도 빠져나갈 방법이…….”
도하가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해맑은 도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도둑질 해 보셨어요?”
도하의 입가엔 이상하리만큼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도희와 함께라면 지옥에도 떨어질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