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치명적인 남자
초승달이 홀로 빛을 내는 야심한 밤.
불이 꺼진 사무실 안이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큰 통유리창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한 두 남녀의 몸이 바삐 움직인다.
“잠깐.”
새하얗고 가녀린 여성의 손이 남성의 탄탄한 팔을 멈춰 세운다.
“천천히 해요. 천천히.”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녀의 손길에 남자의 얼굴이 열기로 붉게 달아올랐다.
속삭이듯 작게 읊조린 차분한 말과는 달리 두 남녀의 몸은 여전히 쉼 없이 움직였다.
“아!”
예고 없이 튀어나온 신음에 스스로도 놀란 도희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아요?”
“쉿!”
그녀의 입가에 있던 새하얀 손은 어느새 도하의 입가에 닿아 있었다.
“괜찮아요. 종이에 살짝 베었나 봐요.”
그녀는 길고 가느다란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듯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아, 여긴 아무것도 없는 거 같습니다.”
도하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분명 칠흑 같은 어둠 속인데 왜 이 남자의 얼굴만 빛이 나는 건지.
애써 눈길을 거둔 도희가 책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눈을 감는다.
지금 이 남자의 얼굴이나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부사장 집으로 가 봐야 할까요? 역시 철두철미한 인간이라 여긴 깨끗하네요.”
도하의 말에 도희의 입술이 움직이려는 순간.
—그자가 오네!
도희의 귓가로 중후한 남성의 긴박한 전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재빠른 동작으로 허리춤에 묶어 뒀던 하늘빛 도포를 풀어 제쳤다.
그리고 두 팔을 들어 도포를 뒤집어쓴 뒤, 도하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찰나!
간발의 차로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말끔한 수트 차림의 덩치 큰 남성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에서 그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강도희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부사장? 이 시간에 왜…….’
물론 부사장이 부사장실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이 새벽 한 시만 아니었다면.
부사장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두근두근.
그의 기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희는 입가에 닿은 도하의 손 덕분에 새어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두근두근.
“죽었는지 살았는지 무조건 찾아내.”
삑—
통화를 끝낸 부사장의 손끝이 책상 끝단에 닿자, 사무실의 어둠이 달아났다.
“흐음…….”
부사장의 시선이 빠르게 책상 위를 훑더니, 매서운 그의 눈매가 더 가늘어진다.
누군가 그의 사무실을 뒤졌다.
그의 눈길이 사무실을 곳곳에 닿았다.
책상 위를 제외하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흔적을 남겨? 증거를 찾고 있다는 경고? 아니면…….’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 그가 급히 사방을 둘러보지만, 이곳에 누군가 숨을 만한 공간은 없다.
그의 발이 천천히 창가로 옮겨진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불 꺼진 빌딩 숲과 줄지어 움직이는 주황빛 점들.
‘창문으로 들어오진 못했겠지.’
사방이 훤히 오픈된 고층 빌딩의 창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출입문은 하나다.
침입자가 있다면 보안 카메라를 확인하면 될 터.
잠시 멈칫한 그는 무언가를 챙긴 뒤 다시 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리깔린 사무실엔 한쪽 벽면을 차지한 큰 수족관의 기계 소음만 울려 퍼졌다.
“아휴…….”
도희가 덮어쓴 도포를 내리자, 은은한 달빛에 두 남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나의 도포를 같이 뒤집어쓰느라 둘은 서로의 숨결을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코앞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 닿았다.
“…간 거 같아요.”
민망한 도희가 도하의 곁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푸른 도포가 걸쳐져 있는 도희의 어깨는 투명해서 사물이 그대로 투과되어 보였다.
다소 괴기스러운 장면이었지만, 도하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도희가 처녀 귀신이었어도 그는 두 손 들어 환영이었다.
“큰일 날 뻔했네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한 도희가 끝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희씨 괜찮아요?”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왔던 부사장의 기척에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만 알았다.
덮어쓰면 투명해지는 도포는 유용했다.
눈을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만 뺀다면.
“괜찮아요. 얼른 뒤쫓아 갑시다. 악당 물리치러!”
애써 괜찮은 척하는 그녀의 입에서 다소 유치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정의의 사도라도 된 느낌이네요.”
도희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도하의 입에서 한술 더 뜬 유치함이 흘러나왔다.
* * *
“결국 아무것도 못 건졌네요.”
황이재는 그대로 술집으로 퇴근해 버렸다.
여자들에게 가득 둘러싸여 노는 그를 보고 몰래 그의 집을 찾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다.
“아까 혹시 들으셨어요?”
토끼 눈의 도희가 고갤 옆으로 기울였다.
“누군가에게 도희씨가 살아 있을 가능성을 물었습니다.”
“뭐라고 했던 거 같긴 한데… 너무 놀라서 기억이…….”
갑작스레 등장한 부사장보다 도하 곁에 안기는 바람에 더 놀란 도희였다.
“분명 그랬습니다. 도희씨가 살아 있을 가능성을 묻는다는 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건데…….”
“듣고 보니 이상하네요. 체포 안 되려고 도망쳤다고 생각하지, 죽었다고 생각하진 않을 텐데.”
“…만약 마 부장이 도희씨를 노리는 걸 알았다면요?”
“어… 황이재가 마 부장이 날 살해할 계획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 그런 마 부장이 연락이 닿지 않는다?”
이미 죽은 마 부장과 연락이 될 리 없었다.
“그럼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죠.”
도하가 정확하게 들은 것이라면 쉬이 넘길 상황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도하는 도희의 말을 기다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또 다른 누군가가 저를 노리고 있거나요.”
* * *
“팀장니이임!”
도희를 제일 먼저 반겨준 건 여전히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소하였다.
“모두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이 자리엔 도희를 돕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서 대리부터 진명, 두산, 소하 개선부원은 모두 있었고, 백 실장과 그 옆엔 강 부장까지 있었다.
강 부장을 향했던 도희의 시선은 다시 의문을 띤 채 우주를 향했다.
미소 띤 우주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본 도하가 나섰다.
“강 부장님, 저희 어머니세요.”
“예?!”
다수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도희도 놀랐는지, 벌어진 입을 한 손으로 급히 막았다.
놀란 도희가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단 저희 아버지가 법원에 있어서 좀 물어봤는데요…….”
우주에게 증거 목록과 증인 목록을 넘겨준 소하의 법원 소문을 시작으로.
“오죽하면 소지품 검사까지 시켰습니다. 저희가 증인이 되면 부사장이 평소 강 팀장님을 노리고 있었다는 건 증명할 수 있습니다.”
부사장이 평소 도희의 약점이나 사생활을 감찰하여 보고하게 했다는 진명과 두산의 증언.
“먼저 여러분들이 이번 사건에 부사장을 엮으면 난 예전 무죄 받았던 일을 다시 끄집어내 볼게요. 이번 재판에 실질적 도움은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참작은 해주겠죠.”
같이 지옥 불에라도 가겠다는 백 실장.
“부사장 황이재와 비산 그룹 사장 손남수가 만났다는 사진이에요.”
고급 한식당을 나오는 둘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내미는 강 부장까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보니 웃는 모습이 도하를 쏙 빼닮았다.
그동안 강 부장에게 내뱉은 말들과 행동을 다시 되짚어 보는 도희의 안색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모두가 돌아가고도 여전히 충격에 빠진 도희에게 백 실장과 두산이라는 예상치 못한 조합의 두 사람이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지금 이건 전부 훼이크야.”
백 실장의 반말이 기분 나쁘지 않은 도희였다.
“저들을 다 믿을 순 없어. 네가 아무리 저들의 생각을 전부 읽는다 해도 행동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 방금은 쑈를 한 거다?”
“어쨌든 우리가 움직이면 저쪽에서 뭐든 알아내려 할 거야. 방금 나눈 말들이 들어가면 저들은 방심하며 코웃음이나 치겠지.”
“그럼 진짜는 뭔데.”
“나랑 두산이가…….”
그렇게 마지막 히든카드는 도희 손에 쥐어졌다.
* * *
‘도하씨 연기라고 생각해요! 치명적인 남자. 잘 할 수 있죠?’
도하는 도희의 말을 떠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혼자 왔나요?”
“싫으신가요?”
도하의 매력적인 웃음에 또 여자의 입꼬리는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강도희씨는 어디 있나요.”
“글쎄요. 저도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는 잘…….”
퉁명스럽고 도도한 말투였다.
“두 분 친하시잖아요? 연인 관계인가?”
커피잔에 닿는 천 변호사 손짓은 아주 느긋하면서도 요염했다.
도희와 연인 관계인지 굳이 물어보는 그녀의 속내를 도하도 모를 리 없었다.
“연인이라뇨. 직장 상사입니다. 도와달라고 해서 그저 도와드렸을 뿐입니다.”
“에이, 그냥 직장 상사 말에 따라 그런 일을 하셨다구요?”
“변호사님도 지금 여기 이러고 계시잖아요. 직장 상사 말에 따라.”
도하는 일부러 뒷 문장에 힘을 주어 말했다.
“훗, 그렇네요. 우리야 뭐, 시킨 대로 하는 거니까.”
천 변호사의 미소 머금은 시선이 도하의 얼굴로 닿았다.
도하도 그런 그녀의 눈빛을 온전히 받아주었다.
“주변 사람을 잘못 만나면 나쁜 일에 휘말리곤 하죠. 지금 도하씨처럼.”
도하를 한참이나 바라본 후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혼자 절 찾아오신 이유가?”
여자의 입가에는 이미 승리의 미소가 걸려 있다.
“궁지에 몰렸단 뜻이겠죠.”
“음… 사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는데.”
여자는 말을 느리게 뱉으며 도하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럴 리가.”
“저희 윗분이 워낙 화가 많이 나셔서.”
윙크하며 손가락 하나를 위로 향해 보이는 그녀였다.
도하는 일부러 실망한 내색을 비췄다.
그늘진 그의 안색을 본 여자가 느리게 입을 연다.
“뭐… 도하씨 정도면 집행유예까지도 가능하긴 해요. 물론 내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어차피 모두의 타겟은 강도희였다.
“그럼 전 천 변호사님만 믿으면 될까요.”
이번엔 여자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낸 도하였다.
여자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도하의 얼굴에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뭐, 당신 하는 거 보고.”
“어떻게 해드려야 하나.”
“글쎄요. 그건 당신이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야 뭐, 뭐든.”
도하가 치명적인 미소와 함께 어깰 으쓱이자, 더는 참을 수 없단 표정으로 변한 천 변호사가 도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