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화 우리 같이 살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풉, 나는 상상이 안 가.”
실눈으로 변한 강아의 큰 눈은 격한 곡선을 만들어 내더니, 웃겨 죽겠다는 듯, 입에선 작은 웃음들이 실실 새어 나온다.
“급히 막았습니다. 급할 거 뭐 있냐고. 약속부터 해달라고 했습니다.”
“올~ 박력! 도하씨 그런 면이 있었어요? 의왼데.”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봐서 힘들었습니다.”
여자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무시해 본 적은 많았지만 받아주기는 처음인 도하였다.
“그 연기 실력 다시 한 번 보여줘요. 치명적인 남자 역할. 우.”
강아가 입술을 봉긋이 모으며 이상한 소릴 내기 시작했다.
“뭐야, 이강아 징그러워.”
“왜 치명적이잖아. 우.”
“으, 저리 가. 미쳤어, 정말.”
몸서리치는 도희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도하 놀리기에 여념 없는 강아의 모습에 우주가 나섰다.
“저도 그런 역할 잘하는데 기회가 없네요.”
“우 형사님은 잘할 거 같아요.”
“예?”
“왜 막 평소에도 막 흘리고 다니시잖아요.”
“제가 뭘 흘리고 다닙니까.”
곧이어 강아 말에 답한 우주의 눈빛이 음흉하게 변했다.
“아, 혹시 매력?”
“으! 어떻게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다시 한 번 몸서리친 도희는 더 크게 웃었다.
“누구랑 닮았네. 강도희 너도 자존감 하늘을 찌르잖아.”
“야 내가 무슨.”
“높을 만도 하죠. 도희씨처럼 완벽한 여자라면 더더욱.”
우주를 보는 도희의 시선엔 불편함과 함께 묘한 감정이 들어찼다.
애써 시선을 돌린 도희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뗐다.
“근데 강아 너 약초는 찾았어?”
“…아니, 도사님 말로는 없을 수도 있대. 이름이라도 알아보려고 약초 도감 책 사서 도사님이랑 같이 훑어봤는데 없더라고.”
—너무 실망은 하지 말게나. 정 방도를 찾지 못하면 내 묘향산이라도 다녀옴세.
“묘향산이 어디예요?”
“저번에 거기, 북한.”
“아… 북한…….”
당장이라도 묘향산에 달려갈 기세였던 강아는 기가 한풀 꺾였다.
“북한이라니요?”
우주는 흥미로운 듯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도사님 동굴이 북한에도 두어 곳 더 있대요. 근데 보다시피 멀고도 먼 곳이라.”
“최대한 북쪽 가까이 가서 이동하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처자 기운으로는 턱도 없으이.
‘웬일로 처자래.’
—우리 청년이라면 모를까.
‘우리 청년?’
도사의 얼굴을 띄운 서책은 도하 주위를 빙빙 맴돌며 도하에게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저 표정은 뭐…….’
너무 노골적이라 도희까지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강아는 차마 입은 떼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대고 있다.
“도하씨는 가능해요?”
—당장은 힘드이. 다만 청년이 내 말만 들어준다면야 나머진 시간문젤세.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도하가 선뜻 나서자, 신난 표정으로 날아오른 서책은 도하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자네 명상은 좀 해봤는가.
본격적으로 도하 길들이기에 나선 도사였다.
* * *
“우 형사님.”
“왜 또 심각한 표정이십니까.”
도희가 자신만 불러낼 때부터 이미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던 우주였다.
“고맙고 미안해서요.”
“미안은 빼시죠. 고맙단 말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제 직업 모르세요? 이래 봬도 대한민국 형산데.”
도희는 너스레 떠는 우주의 모습에 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주씨.”
“왜 자꾸 심각하게 부르실까.”
“이제 더는 애써 주지 않아도 돼요.”
우주는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부담가지시라고 도와드린 건 아닌데.”
“지금까지 도와주신 것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언제든 우주씨가 도움이 필요하면 저도 도와드릴게요.”
말없이 도희는 바라보는 우주였다.
“정말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고마워하세요. 전 계속 도희씨 도와드릴 거니까.”
“저… 도하씨 좋아해요.”
차마 우주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도희는 그의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요.”
“도희씨가 왜 미안해요. 도희씨 마음은 도희씨 건데.”
살짝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그가 웃고 있진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가 도움 받은 게 더 많아요. 빚 갚고 있는 건 저니까 더는 부담 갖지 마시죠?”
대답할 수 없는 도희였다.
“저 쿨해요. 그럼 전 이제 도희씨 친구로서 좋아하는 걸로!”
“솔직히 불편할 거 같아요.”
이미 자신에게 감정을 가졌던 그가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제가 안 불편하니까 괜찮아요.”
“우주씨.”
“저 도희씨한테 빚지게 하고 다 받아낼 겁니다. 앞으로 엄청 부려 먹을 거니까 진짜 각오 하셔야 해요.”
“우주씨가 이러…….”
“그만. 일부터 해결해야죠. 도희씨 지금 수배자예요.”
단호하게 말하며 일어선 우주 때문에 더는 말을 잇지 못한 도희였다.
* * *
“천 변호사가 뜻대로 움직여 줄까요?”
“글쎄요. 제 매력이 어디까지 통할지는 저도 몰라서…….”
“하하, 이제 그 컨셉으로 정한 거예요?”
“이게 꽤 잘 통해서.”
도도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도하의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멍해진 도희가 눈만 껌뻑이며 바라보자.
“역시 잘 통하네.”
평소완 다른 치명적인 미소를 선보인 도하였다.
“천 변호사가 집행유예 준다며 매달릴 만한 컨셉이긴 하네요.”
왠지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혹시 질투나세요?”
“네에?”
“전 도희씨가 다른 남자한테 이랬다고 생각하면 그럴 거 같아서요.”
“도하씨 정말 많이 변했어요.”
“좋은 겁니까?”
“뭐, 조금은?”
만족스럽게 웃는 도하를 보니 도희도 그를 따라 웃게 되었다.
그러다 문뜩 속에서 불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도하씨… 만약, 정말 만약 일이 잘못되면요.”
“평균 2년에서 3년 형.”
“찾아보셨어요?”
“대비는 해야죠.”
“만약 도저히 엎을 수 없는 판이 되어 버리면, 도하씨는 절대 관계없다고 주장하세요.”
“그럼 도희씨가 관련 없다고 주장하세요.”
“네? 어떻게 그…….”
“저도 못 합니다.”
“아니, 둘 다 감옥 가는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사는 게 낫잖아요! 그리고 도하씨는 진짜 무슨 죄예요.”
“도희씨는 죄가 있나요?”
“저, 저는…….”
“우리 같이 살아요.”
“후… 그래요. 이번엔 최악의 상황은 생각도 안 해 볼게요.”
항상 실망하지 않기 위해 최악을 염두에 두는 그녀였다.
“진짜 같이 살 거예요?”
“예?”
우주에게 이상한 농담만 배워 온 도하였다.
* * *
도하와는 가벼운 포옹을 나눈 후 같이 경찰서로 걸어 들어왔다.
마지막일지도 모르기에, 더 진한 인사를 기대했지만 안기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정이 솟는 걸 보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랐다.
경찰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수배자를 맞이했다.
도주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 내려진 둘은 곧 구치소로 이감됐다.
도희와 도하는 각자 준비한 대로 구치소 생활을 이어 나갔다.
재판까지 최소 2개월은 걸릴 거라 예상했지만 누군가 손을 쓴 것인지 그보다 빨리 재판을 받게 된 둘이었다.
그리고 재판 날의 아침은 오고야 말았다.
* * *
“흐으음, 흐음.”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쾌한 아침이다.
“큭, 크크큭.”
샤워하다 말고 혼자 웃음이 터진 황이재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더 크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하.”
강도희는 생각보다 더 독하고 치밀한 여자였다.
결국 그에게 굴복하고 말았지만.
끝까지 증언하지 않겠다던 그녀는 결국 재판 날이 다가오자 백기를 들었다.
‘의리는 얼어 죽을.’
그녀는 이무혁 사장을 증언하지 않는 대가로 이무혁에게 받기로 했던 돈의 두 배를 요구했다.
자신의 집행유예와 함께.
만약 강도희가 모든 주동자는 이무혁이라고, 자신은 시킨 대로 했다는 증언만 해준다면 재판은 진흙탕 싸움이 되어 이무혁에게도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묻힐 게 분명했다.
‘둘 다 끝이겠군.’
어차피 도희에게 보상할 생각도 없었다.
비산에선 그녀의 처벌을 바라기에 그녀를 빼낼 수도 없다.
황이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그녀가 다시 증언을 번복해도 어차피 그녀만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힐 뿐, 이무혁에게 묻은 오물들도 어느 정도 효과를 발할 것이다.
무혁을 끌어내리기엔 그 정도면 오명이라도 충분했다.
흥얼거리며 샤워를 마친 그는 오늘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며 준비를 시작했다.
* * *
청중석 자리를 채운 얼굴 중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담담한 도희의 시선이 소하부터 진명, 두산, 백 실장을 거쳐 전 상무와 무혁에게 잠시 머물렀다.
시선을 느낀 무혁이 고갤 끄덕이며 인사하자, 도희도 연한 미소로 답했다.
그 옆으로 앉은 강 부장도 보였는데 아들의 재판에 참여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밝은 모습이었다.
그 뒤로는 수첩을 꺼내든 낯선 사람들이 빽빽이 앉아 있었다.
아마도 기자들인 거 같았다.
며칠 전 면회 온 강아의 말에 의하면 모두를 속이는 ‘팜므파탈’이라며 도희의 팬클럽이 생겼고, 사기꾼도 예쁘면 팬클럽이 생긴다며 사회 공분을 크게 샀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번 재판도 사람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했다.
멋대로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판사가 입장하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건번호 145…….”
판사가 사건번호를 읊는 순간, 재판은 시작되었다.
도희는 저지른 적도 없는 혐의를 외치는 검사와 누명이라며 억울하다는 변호사의 뻔한 변명으로 재판은 도희네가 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리고 시간을 흘러 드디어 증인 출석의 시간이 다가왔다.
예상대로 비산 측 서류를 전달받은 증인으로 천 변호사가 등장했다.
법정에 선 그녀가 증인 선서를 하는 동안, 도희와 도하의 안색은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가뜩이나 하얀 도희의 피부는 더 창백해져서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질 않은 행색이었다.
그런 도희를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도하였다.
증인석에 선 천 변호사의 시선은 도희를 바라보는 도하에게 향했다가 다시 검사에게 향한다.
“증인, 증인은 이도하씨에게 화정 그룹의 기밀이 적힌 서류를 건네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검사가 물었다.
“예.”
그녀의 대답이 끝나자 도희와 도하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져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