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저 어때요.
“퇴사라니요! 부장 자리가 부담스러워 시위하시는 거라면 팀장 자리 유지하세요. 연봉은 올려드리겠습니다.”
바로 방금 도희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부장 자리를 제안한 무혁이었다.
그것도 무려 최연소 부장 자리였다.
혹시나 반복될 감사부의 폐해를 막기 위해 감사부 견제 부서로 개선부를 독립시키겠다는 무혁의 의지기도 했다.
“아니에요.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이젠 제가 회사에 있어 봤자 사장님 속만 시끄러우실 걸요?”
“제 속 시끄러울 게 뭐 있습니까. 지금 강 팀장이 퇴사한다는 게 더 속상한데.”
“그동안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부장 자리는 거절할 수도 있다 예상했지만, 퇴사는 충격적이네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전 상무를 힐끔 스쳐본 무혁은 말을 이었다.
“제 비서 실장 자리는 어떻습니까.”
“전 상무님은요?”
“전 상무도 이제 독립해야죠.”
진심이냐는 표정을 지은 전 상무가 무혁을 쳐다본다.
그리고 그의 반짝이는 눈은 이제 도희를 향했다.
“궁금하긴 하네요. 사장님 비서실장 자리면 돈 많이 주나요?”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많이 드릴게요.”
“하하, 듣기만 해도 좋네요. 근데 정말 저는 좀 쉬어야 할 거 같아요. 다른 할 일도 있고, 놀고도 싶고.”
마음을 굳힌 표정이었다.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편안한 얼굴.
그녀의 표정을 읽은 무혁은 더는 잡을 방법이 없단 걸 깨달았다.
“그럼 장기 휴가라고 생각하십시오. 도희씨가 복직한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마음은 감사히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 * *
“그럼 너 이제 진짜 백수야?”
“응.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백조야. 꺄아아.”
“그렇게 좋아?”
“그럼 안 좋아? 나 처음 쉬어 봐!”
고등학생이 된 후로 일정 없는 삶은 살아본 적 없는 도희였다.
“하긴, 학생 땐 알바하랴 공부하랴, 졸업 후엔 취업해서 회사 다니랴, 바쁘게 살긴 했지.”
“내일 뭐하지? 모레는 뭐하지? 난 이런 생각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 줄 몰랐잖아. 미리 알았으면 진작 때려치웠지!”
“그래서 이제 뭐할 건데?”
“응. 부탁인데 일주일은 묻지 말아 줄래?”
“크크큭, 너 별생각 없지?”
“몰라. 일주일은 아무 생각 없이 놀 거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줘.”
—후회할 수도 있음이야.
“도사님이 후회 안 하게 해주면 되겠네.”
—큰 결정했다. 고맙다.
뜬금없는 둘의 대화에 갈피를 못 잡은 강아는 서책과 도희를 번갈아 쳐다봤다.
—젊은 청년과 다녀올 때가 있으니 돌아올 때까진 편히 쉬고 있거라.
아마 북한의 묘향산을 다녀올 모양이었다.
“언제 가요?”
—쯔쯧, 회포 풀 시간은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 거라.
역시 도희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도사를 속일 순 없는 노릇이다.
“뭔데, 왜 나만 이해 안 돼? 강도희 뭔데, 뭔데.”
“뭐긴 뭐야. 아무것도 아니지.”
“야, 우리 사이에 뭔 비밀이야.”
“비밀은 무슨.”
“너 도하씨랑 뭐 있지.”
“없어. 아직은.”
“곧 뭐가 있단 거네.”
“근데 어머님 검사 결과는 나왔어?”
“얘 말 돌리는 것 봐.”
피식 웃어 보인 강아는 말을 이었다.
“뇌 손상이 크진 않대. 도사님 덕분에도 많이 좋아지셨어. 어제는 손가락도 움직였다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항아리와 강아 어머니의 손을 오가는 도사의 노력 덕분이었다.
—곧 더 좋아질 걸세. 염려 말게나.
“다 갚을게요. 고마워요, 도사님.”
—크흠.
멋쩍은 표정의 도사는 다시 항아리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 * *
“처음 보는 장부입니다.”
취조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입을 연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황이재씨 혐의 인정하십니까?”
오랜 시간 이어진 취조에 형사의 표정은 지쳐 있었다.
남자는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황이재씨 이렇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고 해결되진 않습니다. 이미 증거는 넘치고 증인들도 한둘이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 * *
“나 고등학생 때 강아랑 와보고 놀이공원 처음 와봐요!”
“그럼 남자랑은 처음입니까?”
“…그러네요. 생각해 보니까 나 남자랑 놀이공원 한 번 못 와봤네.”
“하하하, 그게 시무룩해질 일인가요?”
“아니, 그냥 갑자기 뭔가 억울해서요. 너무 일만 하고 살았나.”
입이 삐죽 나온 도희는 말을 이었다.
“무엇을 위해 그리 정신없이, 열심히도 살았나 싶어서요.”
“이제부터 열심히 노시면 되잖아요. 나랑.”
“도하씨가 나랑 놀아줄 거예요?”
“그럼요.”
“하고 싶단 거 다 해줄 거예요?”
“그럼요?”
과하게 초롱거리는 도희의 눈빛에 의아함을 느낀 도하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그럼 저거! 우리 저거 해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교복 대여]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 * *
한참을 기다려도 도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입어본 교복이 어색한 도하는 괜히 상가 유리문에 비치는 자신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도하씨.”
고갤 돌린 도하가 본 것은 쭈뼛거리며 짧은 치마를 부여잡고 있는 도희였다.
“아니, 이거 입고 놀이기구를 어떻게 타란 거지… 하하, 치마가 전부 짧은 것밖에 없어서…….”
도하는 멍하니 도희의 치마를 쳐다봤다.
“도하씨? 이상해요?”
정신이 번쩍 든 도하는 괜한 헛기침을 해 보이며 시선을 돌렸다.
“크흠, 도희씨만 불편하지 않다면… 뭐. 괜찮을 거 같은데요.”
처음 보게 된 도희의 새하얗고 매끈한 맨다리에 혼이 쏙 빠진 도하였다.
“보기 이상하진 않죠?”
“너무 예쁜데요.”
예쁜 반달눈이 된 도하의 모습에 도희도 웃어 보였다.
“좋아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요.”
“뭐부터 탈까요.”
자신에게 뻗은 도하의 손을 본 도희는 자연스레 그 손을 맞잡았다.
“베스트 3부터 정복하러 갑시다!”
발길을 옮기는 그들의 얼굴엔 벅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방금 도희와 도하가 지나간 교복 대여점 앞에 한 사람이 멈춰 선다.
모두가 연인, 가족, 친구와 찾은 이곳에서 홀로 인파 속에 섞여 있던 그는 줄곧 도희와 도하를 쫓아다녔다.
새벽녘 강아의 병실 앞에서도.
그들이 숨었던 동굴 위 언덕에서도.
언제가 둘을 쫓아 나타난 기묘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늘도 그의 노골적인 시선은 둘의 뒤를 오랫동안 쫓았다.
* * *
“푸,풉.”
“재밌는 일이 있나요?”
“푸… 아니에요. 우리 뭐 먹을까요? 푸훕흐흐.”
작은 웃음을 흘리던 도희는 결국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에요. 도하씨 메뉴판 보세요. 이거 어때요?”
어색하게 말 돌리는 것을 보니 도하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저한텐 말씀 안 해주시고 혼자만 웃으실 겁니까?”
새침한 표정을 지어봤자 그의 입가를 차지한 미소 때문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특히나 머리 위에 얹어진 갈색 고양이 귀 모양의 머리띠는 그를 더욱 귀엽게 만들었다.
“도하씨도 삐질 줄 알아요?”
“예? 그게 뭡니까.”
모르는 척 퉁명스럽게 말하는 폼이 살짝 삐진 모양이다.
“그게… 풉. 도하씨 고양이 머리띠 너무 잘 어울려요.”
“아!”
“푸하하. 놀이공원에서는 다 끼고 있어서 그냥 ‘귀엽구나’ 하고 말았는데 여기서 보니까 정말 귀엽네요. 아, 왜! 빼지 말아요.”
“여, 여기서 이걸 하기엔…….”
“완전 귀여워.”
반짝이는 눈의 도희를 보곤 도저히 머리띠를 빼지 못한 도하였다.
머리 위로 올린 손을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머리띠를 그대로 두었다.
“머리띠는 살 생각도 못 했는데 아까 그 꼬맹이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우연히 만난 모세가 자신은 이제 집에 간다며 주고 간 것이었다.
“도희씨가 좋다면 잘 때도 껴야겠네요.”
“어머, 잘 때도 보라구요?”
“예?”
당황한 도하의 표정이 낯설고 귀여워 자꾸 놀리고 싶은 도희였다.
“근데 도하씨 얼굴이 엄청 작았네요.”
테이블에 턱을 괸 도희의 얼굴이 한 뼘 가까이 다가왔다.
빤히 쏟아지는 도희의 시선을 곧게 받아친 도하가 답했다.
“도희씨 얼굴도 만만치 않습니다.”
또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였다.
“생각보다 표정도 다양하고, 회사에선 맨날 이렇게 계셨잖아요.”
도희가 도하의 도도한 무표정을 따라 했다.
“하하, 제가 그러고 있었나요?”
“네! 맨날 이렇게 허리는 꼿꼿하게 피고, 표정은 요렇게 눈 내리깔고 도도하게. 똑같죠?”
열심히 도하 흉내를 내는 도희는 무척 귀여웠다.
“하하, 거울을 잘 안 봐서 모르겠네요. 앞으론 거울도 좀 보겠습니다.”
“근데 도하씨 요즘은 표정도 엄청 다양해졌어요. 말도 잘하시고.”
“그러게요. 저도 요즘 제 다양한 면을 발견하는 중입니다.”
“호오… 예를 들면 치명적인 남자 같은?”
“도희씨 그 얘긴 넘어가기로 하지 않았…….”
“풉, 알았어요. 왜 영상 보니까 엄청 치명적이더만.”
도희도 녹음만 들었지, 영상은 법정에서 처음 본 것이었다.
“천 변호사가 달려들 만했지. 도하씨가 마음만 먹으면 못 홀릴 여자가 없을 걸요?”
“진심이십니까?”
도하의 입꼬리가 한껏 솟아올랐다.
“그럼요. 도도하고 건방진 말투며, 행동이며, 난 정말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도희에겐 항상 친절했던 그였기에 더욱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연기라고 생각하니까 쉽던데요.”
“오, 혹시 연기 천재? 도하씨 정도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전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어서요.”
“꿈이 있어요?”
“꿈이요? 꿈이라 하기엔 거창하고…….”
“뭔데요?”
도하는 괜히 목덜미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왜 뭔데요. 궁금해요.”
도희의 성화에 못 이겨 대답하는 도하였다.
“…사랑하는 여자 만나는 거요.”
“네?”
“진짜 제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 게 제 바람이었어요.”
“아…….”
도희의 긴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인다.
연신 이마를 매만지는 것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도희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밝게 빛나는 도하의 까만 눈동자엔 도희만 가득 담겨 있었다.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 도희는 도하 눈에 담긴 자신이 어떨지 궁금했다.
“지금 저 어때요.”
바로 나올 줄 알았던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도하는 빤히 도희를 바라보더니 느리게 대답했다.
“예쁩니다. 아주.”
그의 대답에 도희가 말했다.
“그럼 나랑 만나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