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신묘한 탐정 놀이.
“뭘 차린다고?”
“사무실.”
“그러니까 지금 진짜 사무실까지 열어서 탐정을 해보겠다고?”
“그럼 가짜로 차려?”
도희는 명함 한 장을 강아에게 내밀었다.
“뭐야, 벌써 명함까지 만들었어?”
역시 실행력 하나는 빠른 도희였다.
“오늘 사무실 찾아서 바로 계약할 거야.”
“퍽도 사람들이 잘도 찾아오겠다.”
“설 기자한테 기사도 하나 더 써달라고 했어. 이왕이면 이전에 나간 기사 이용하려고.”
“무슨 기사를 또 써?”
“신묘한 탐정! 신기 있는 무당 탐정이 사건을 해결해 준다!”
입을 연 도희는 신나서 말을 이었다.
“어때?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지만, 확 구미가 당기는 기묘한 조합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신기 있다고 뻥쳐서 돈 받고 일을 해결해 주겠단 말이지?”
“뻥이라니. 아예 거짓말도 아니잖아. 그리고 사설탐정이라고, 사설탐정!”
“경찰이 있는데 탐정이 왜 필요해?”
“강아야, 우리가 이번에 유치장 들어갔을 때 누가 우릴 잡았지?”
“그야 경찰… 아니, 뭐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그니까! 경찰들은 증거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아니잖아!”
“골치 아픈 일만 골라서 맡겠다는 거네.”
“억울하거나, 누명을 썼거나, 나쁜 놈한테 괴롭힘은 당하는데 경찰에 도움을 못 받는 사람들. 내가 도울 수 있잖아?”
“정의의 사도 나셨어.”
“왜 또 삐뚤어.”
“나는 네가 잘나가는 회사까지 그만두면서 이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걱정도 되고.”
“내가 애냐. 나 일단 사무실 보러 나간다.”
그렇게 강아의 걱정을 뒤로 한 채 밝게 손을 흔들어 보인 도희는 병실을 나섰다.
* * *
“예? 이 코딱… 아니 좁은 곳이 얼마요?”
“아가씨, 이 정도 상권이면 이 가격도 싼 겁니다. 아니면 아까 거기 하셔야죠.”
“아까 거기는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원래 전부 가격 따라가는 겁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도 있잖아요.”
종일 도희와 함께한 중개사도 이젠 지친 모양이다.
그의 표정에도 슬슬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보증금이 너무 비싼데.’
“혹시 보증금을 내릴…….”
“여긴 이 이하로 안 내려줘요.”
“그럼 제가 오늘 저녁에 문자로 알려드려도 될까요?”
“예에, 뭐 그렇게 하세요.”
‘증말, 어딜 가든 뭘 하든 돈, 돈, 돈. 으! 지겨워.’
* * *
딸랑딸랑—
도희가 골동품 상점 문을 거칠게 열며 들어섰다.
“사장니임!!”
곧 상점 안쪽에서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인 영감이 걸어 나왔다.
“귀 안 먹었다.”
“사장님 환불하러 왔어요. 어제 제가 판 술병 안 팔려구요.”
다급히 용건부터 말하는 도희였다.
“안 판다.”
“네?!”
말을 끝낸 영감은 다시 가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도희는 급하게 그 뒤를 쫓으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제가 어제는 정신이 없었나 봐요. 그 술병 잘못 판 건데, 돈 드릴 테니까 다시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안 판다.”
‘아니! 어제 사장님이 다른 가게 가도 많이 쳐줘야 이백이라면서요? 여기 길 건너 골동품 가게만 가도 똑같은 술병 천만 원 준대요! 천만 원!’이라고 외치고 싶지만 억지로 참아낸 도희였다.
보증금이 급했던 그녀가 다시 골동품 가게를 찾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갈 일이었다.
“사장님, 저희 엄마 유품이에요. 제발…….”
“앞집에서 얼마 준다디.”
“예?”
주인 영감은 벌써 도희의 속셈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았대. 허! 이 영감님 알고 보면 상습범 아냐?!’
“사장님 제가 이런 말씀까진 안 드리려고 했는데 여기 사업자가 있잖아요? 개인 거래가 아닌데 환불이 안 된다니요?”
“자네가 산 게 아니라 내가 산 거지. 난 환불 받을 생각이 없는데?”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에이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돈 드릴 테니까 다시…….”
“낙장불입!”
‘씨! 고집불통 영감탱이!!’
차마 머리가 하얀 백발 영감님에게 대놓고 욕할 수도,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생각 바뀌시면 여기로 연락주세요.”
명함을 내려놓은 도희는 속으로 욕을 백 번쯤 한 뒤 힘겹게 발길을 돌렸다.
* * *
탕!
“빌어먹을 영감탱이! 으! 그냥 면전에 욕이라도 하고 올 것 그랬나.”
맥주잔은 내려놓는 도희의 손길은 매우 거칠었다.
“그러니까 딴 가게도 가 보고 결정하지, 뭘 거기서 덥석 파냐.”
백 실장의 배려 덕분에 오랜만에 외출한 강아는 한 귀로 흘려들으며 열심히 안주를 주워 먹는 중이었다.
“행색만 보면 전문가가 따로 없다니까? 고집은 있어 보이는데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나도 모르게 홀리더라니까!”
“쯔쯧, 누굴 탓하겠어. 누굴 탓해.”
“으, 사기꾼 영감탱이! 속은 내가 모질이지.”
“알긴 아네. 자아 성찰 아주 좋아요.”
얄미운 표정의 강아였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도희 눈에 보일 리 없었다.
“처음 갔을 때도 다짜고짜 내 옥반지 보더니 팔라고 난리더라? 아! 그때 쎄한 느낌 들었을 때 그냥 나왔어야 했는데.”
북한에 간 도하에게 ‘은가락지’를 주고 나니 허전해서 끼게 된 ‘옥가락지’였다.
“네 손에 껴진 옥반지를 보고 팔라고 했다고?”
“그래!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보는 눈은 있는지 귀한 건 줄 어떻게 알고, 참나.”
“용하긴 용하네. 그게 보통 귀한 건 아니잖아. 너 진짜 얼굴에서 광나.”
피부가 좋아지는 것에 불과했지만, 요물은 요물이었다.
건강에도 좋다나 뭐라나.
“나 피부는 원래 좋았거든.”
“으, 재수 없어.”
강아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게 얼마 만인지, 티격태격 말싸움조차 즐거운 도희였다.
그때, 두 여자의 시야에 술집으로 들어오는 한 남녀가 들어왔다.
“야 저기 우 형사님 아니야?”
도희의 시선을 끈 것은 우주가 아니었다.
우주의 옆에 선 어여쁜 여자였다.
“옆에 여자 엄청 미인이네. 우 형사님도 진짜 쿨내 쩐다. 너 도하씨 만난다고 바로 다른 여자… 야 너 왜 그래? 충격 받았어?”
여전히 대답 없는 도희였다.
“도희야. 야.”
어깨에 닿은 강아의 손길 덕분에 정신을 되찾은 도희였다.
그리고 도희의 눈길은 여전히 여자를 쫓고 있었다.
“강아야, 저 여자야.”
“뭐가? 그럼 저 여자가 여자지. 뭔 소리야.”
“손모아. 문지혁이랑 바람났던 년.”
* * *
“아으… 허리야!”
며칠에 걸쳐 혼자 정리한 사무실은 이제 꽤 사무실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 정도면 그럴싸한데? 이제 손님만 오면…….”
몸이 편해지니 또 도하 생각이 난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돌아오지 않는 도사와 도하가 걱정되는 그녀였지만, 애써 좋게 생각하며 더 바쁜 하루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겠지! 내 걱정이나 하자. 월세 내야지 도희야.”
홀로 다부진 각오를 외친 도희는 본격적으로 탐정 사무실 홍보에 나섰다.
* * *
도희와 관련된 기사 댓글마다 사무실 주소를 적은 광고 효과가 있었는지, 저녁부터는 사람들이 뜨문뜨문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내분이 바람나신 거 같다구요? 어… 사장님 제가 불륜 일은 받질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 남편분이 다른 여자를 만나시는 거 같다고요? 사모님 여기 길만 건너시면 앞에 흥신소가 있거든요?”
대부분 불륜이거나.
“예? 남자친구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다고요?”
거짓말 탐지기 역할을 해달라거나.
“강아지요?”
반려견, 반려묘를 찾아달라며 사무실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속마음을 듣는다, 거짓말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등 신기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인지, 별의별 희한한 의뢰가 다 들어오는 실정이었다.
‘이건 아니야.’
저녁 내내 사람들에 시달린 도희는 결국 특별책을 마련했다.
* * *
“너 이거 돈 주고 만들면 얼만지 알아?”
강아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사랑해.”
“허! 이번엔 영혼이 좀 있다?”
“나는 강아 네가 능력자라는 걸 가끔, 아니 자주 잊거든. 이렇게 자주 상기시켜 주렴.”
“아, 막 갑자기 일이 하기 싫어지네.”
“강아님 야식은 무엇으로 드시겠습니까. 소녀 뭐든 대령하겠나이다.”
“보쌈으로 준비 해 보거라.”
“예.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근데 그거 오늘 안으로 돼?”
강아는 지금 도희의 탐정 사무소 홈페이지 게시판을 만드는 중이었다.
“밤새면?”
사실 강아에게 밤샘 근무는 일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대령하겠나이다. 후식은 커피면 되겠사옵니까.”
강아가 도도히 고갤 끄덕이자, 도희는 급히 음식 배달부터 시켰다.
“근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대. 요령 피우는 건 최고야 진짜.”
“전화번호 노출 시키니까 연락이 너무 와. 하나하나 답장도 해줘야 되고, 어차피 나는 진짜 억울한 사건이나 나쁜 놈들이 관련된 사건만 받을 거니까 게시판에 올린 글로 보고 고르는 게 나.”
“일을 골라 받아서 돈이 되겠냐.”
“돈 때문에 하는 거 아니라니까.”
정말 도사를 돕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경찰이 아닌 도희가 여러 사람을 돕기 위해선 가장 적절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거 만들어 주면 관리는 네가 해.”
“당연하지. 관리까지 너 시키면 내 양심은 일 안 하는 거지.”
“말은 잘해요. 말은.”
그렇게 도희의 탐정 사무소 홈페이지는 다음 날 바로 완성되었다.
* * *
“영감님?”
이제는 한창 홈페이지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도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을 보며 의아함을 비췄다.
“잘 찾아왔구먼.”
“영감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자신이 골동품 상점 주인을 영감이라 부르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도희였다.
빈손인 걸 보니 술병을 돌려주려 온 거 같진 않았다.
“나도 일 하나 맡겨 볼까 하는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대.’
“무슨 일 있으세요?”
“그 전에 자네에게 몇 가지 물을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내가 없는 어미까지 지어내서 거짓말하는 자넬 어찌 믿을까.”
“예?”
불현듯 도희 머릿속에 술병을 팔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내가 술병 팔 때 엄마 유품이라고 거짓말한 거 말하는 거야? 어떻게 알고?’
“무슨 말씀이세요.”
“부모 없이 자라느라 고생 꽤나 했겠구나. 아비가 떠나고 그 뒤를 어미가 따랐어.”
‘뭐, 뭐야.’
누가 먼저 사라졌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사실이다.
“앞길이 열렸는데 그 길도 굽은 길이라 고생 꽤나 하겠고.”
입 한 번 떼지 못하는 도희의 안색은 사색이 되어 가고 있다.
“떠나간 연인은 돌아오지 않고, 적들은 쌓여만 가고, 가는 길이 쉽지는 않겠구나.”
“당신 뭐야.”
“어떠냐, 내가 널 도울 테니 너도 날 도와줄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