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90)화 (90/120)

089화 또 무슨 상상 했어요?

“급한 건 아니니, 고민해 보고 이리로 연락다오.”

그렇게 도희를 폭풍의 늪으로 밀어 넣은 골동품집 영감은 번호 하나를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단 한 번도 아빠가 떠나고, 엄마가 뒤이어 떠났다는 걸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도희였다.

강아도 도희의 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집을 나갔다는 사실만 알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또 중간에 그 말들은 뭐냐고.’

앞길이 열렸는데 굽은 길이라니, 떠나간 연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니, 적들이 쌓여 간다느니, 영감은 도희의 상황과 묘하게 연결되는 찝찝한 말들만 늘어놓았다.

‘아! 다음엔 처자 집에 쌓인 물건들 가지고 오면 값은 두둑이 쳐줌세.’

문을 나서며 뱉은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도희를 더 답 없는 고민의 늪으로 빠트렸다.

‘하… 도사님도 안 계신데…….’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도희는 도사가 돌아올 때까지 골동품 상점 영감 문제는 묻어 두기로 다짐하며 밤이 깊어질 때까지 게시판 홍보에만 열을 올렸다.

*     *     *

“아빠가 숨긴 거예요?”

아침부터 신경질적으로 묻는 딸에게 손남수는 의문에 찬 눈빛만 보냈다.

“아니면 됐어요.”

“또 뭐가 문제냐.”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손남수의 감정 없는 눈빛에 모아는 결국 입을 열었다.

“…지혁씨가 사라졌어요.”

“아직도 정리가 안 됐던가.”

“어차피 우 의원님 아들이랑 결혼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빠가 결혼해도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면서!”

“언제까지 그놈한테 질질 끌려다니게.”

“내가 뭘 끌려다녀요.”

“의원님네 아들은 여자 문제는 깨끗하던데 네가 남자 문제가 있어서야 되겠니.”

“여자 문제 많은 거 같던데요, 뭘.”

입술을 삐죽이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 딸을 본 손남수의 입에선 한숨만 흘러나왔다.

그가 알아본 바로 우주에게 여자 문제는 없었지만, 직접 만났을 때 행동을 보아하니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일단 결혼해. 결혼부터 하고 너든 우 서방이든 사고치는 건 각자 집안이 알아서 할 일이고.”

우주 쪽에서 사고를 쳐준다면 손남수에겐 오히려 반길 일이다.

자신은 딸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문지혁, 그자는 이제 그만 신경 끄고.”

대꾸 없이 손남수를 흘겨본 모아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     *     *

“이건 또 뭐야.”

눈 뜨자마자 게시판을 확인하던 도희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겨난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글을 도배해 놨어!”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같은 제목의 글만 보인다.

무려 열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 사이사이 작성자가 다른 글들도 간혹 보였지만 대부분 같은 제목의 글이었다.

“뭔데, 도대체!”

신경질적으로 [강도희는 보세요.]라고 도배된 제목 중 하나를 클릭한 도희였다.

“…이게 뭐야. 완전 미친놈 아냐!”

도희의 팬이라는 작성자는 도희를 괴롭힌 사람은 다 죽여 버리겠다며 이 글은 살인 예고 글이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허! 참, 별 도라이를 다 보겠네.”

딸칵, 딸칵!

딸칵!

도희는 누가 볼세라, 급히 모든 글을 지워 버렸다.

*     *     *

“도하씨.”

벅찬 마음으로 병실 문을 연 도희의 눈엔 오직 눈부신 도하의 얼굴만 들어왔다.

“쟤 봐, 우리는 보이지도 않나 봐.”

“그러게요. 서러워서라도 빨리 연애해야겠는데요.”

강아와 우주의 투덜거림도 들리지 않는 도희였다.

“도희씨 보고 싶었…….”

도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품에 안겨든 도희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는 진짜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막, 이상한 영감탱이가 이상한 말만 늘어놓고오! 진짜 걱정했잖아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갑자기 눈물을 보인 도희 때문에 모두가 당황했다.

“미안해요. 평안북도가 생각보다 멀어서…….”

도희 얼굴에 닿은 그의 손길이 도희 눈가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 냈다.

‘키가 이렇게 컸나. 얼굴은 조막만 한데 눈이 이렇게 컸어? 코도 엄청 높았네.’

도하의 품에 안겨 그를 올려다보던 도희는 어딘지도 잊은 채, 새삼 잘생긴 도하 얼굴 감상에 빠져버렸다.

—크흠! 회포는 나중에 푸는 게 어떠냐.

도사의 전음에 정신이 번뜩 든 도희였다.

자신이 도하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도 가슴에 닿는 그의 탄탄한 복근이 일깨워 줬다.

도희는 두 팔로 도하의 허릴 감싸 안고 있었고, 도하의 한 손은 도희의 얼굴에,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허릴 감고 있었다.

“어…….”

놀란 도희가 몸을 뒤로 빼려고 하자,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는 도하였다.

“10초만 봐주세요.”

강아는 급하게 입을 막았고, 우주는 뒤를 돌아섰다.

그렇게 도희는 도하 품에 안겨 모든 불안을 내려놓았다.

*     *     *

“와, 도하씨 진짜 박력 대박. 아까 내가 다 심쿵하던데요?”

“이강아 그만.”

놀리고 싶어 죽겠단 표정의 강아를 도희가 막아섰다.

“벌써 자기 남자 챙기는 것 봐. 으, 기지배.”

그녀의 투정에도 애써 표정 관리하며 받아치는 도희였다.

물론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근데 백 실장은?”

매일 병실에 붙어 있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도하씨 오고 오늘은 쉬라고 보내드렸어. 백 실장 있으면 도사님 편하게 못 움직이시잖아.”

아직 백 실장에게 모든 걸 밝히기엔 꺼림칙했기에 모두 주의하고 있었다.

“도하씨 고생 좀 하셨나 봐요. 살 빠지셨어요.”

우주의 말처럼 도하의 얼굴은 예전보다 더 갸름해 보였다.

“길어야 이틀일 줄 알았는데, 저도 북한을 순회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웃고 있는 도하였지만, 그의 말만 들어도 고생이 훤히 느껴졌다.

—내 보상은 톡톡히 함세.

“아닙니다. 보상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크으, 심성은 용모를 따라간다는 말을 믿지 않았거늘, 누구완 다르게 어찌 이리 고운 심성을 가졌을꼬.

괜히 불편한 마음이 들어 도사를 힐끔 째려본 도희는 자신에게 닿는 도하의 눈길에 급히 시선을 거뒀다.

“도희씨만 할까요.”

도하의 말은 분명 진심이겠지만 왠지 찝찝한 도희였다.

“도사님 물건은 다 찾았어요?”

—저 보거라. 욕심만 그득그득해서는.

욱할 뻔했던 도희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우리 도사님이 북한까지 가셔서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목적은 다 이루셨나 걱정되어 물어본 거죠.”

오랜만에 지어 보는 비즈니스 미소였다.

—요물들은 네 아직 알 것 없고, 이곳에 없던 약초들은 모두 구해 왔음이야.

“약초요? 그럼 이제 영단 만들 수 있어요?!”

눈이 마주친 도희와 강아의 눈빛에는 밝은 이채가 서렸다.

—그렇네. 하여 내 이곳에 좀 더 있어야 함이야.

“도사님 편한 대로 하세요.”

도사가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마다 병실로 찾아오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도사님 저 할 말이 있는데.”

*     *     *

—간혹 그리 타인의 과거나, 미래가 보이는 자들이 있네.

골동품 상점주인 영감에 관한 도희의 말을 들은 도사의 첫 마디였다.

—뭐, 귀문이 열린 자일 수도 있고, 신기가 있는 자일 수도 있지.

“…귀문이요? 아, 그건 알고 싶지 않아요. 그냥 모를래요. 근데 진짜 막 과거나 미래를 보는 그런 사람도 있는 거였구나…….”

—그 자가 가락지를 알아봤다고?

“네. 손에 끼워져 있는 건 또 어떻게 보고 옥반지 자기한테 팔라고 난리였다니깐요.”

—그리고 나서는 일을 부탁한다며 찾아왔다?

“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 가족사라던가 앞길이 어떠니, 적이 어떠니, 이상한 말들도 늘어놓고요.”

—흐음… 우선 급한 것이 정리되는 대로 내가 그자를 봐야겠구나. 아마 며칠은 걸릴 게다.

“영단 하나 만드는데 며칠이나 걸려요?”

—며칠이면 빠른 게지. 자네는 우선 이걸 갖고 있게나.

도희의 손위로 손톱만 한 빛바랜 종이 쪼가리가 날아들었다.

“이게 뭐예요?”

—자네도 위험에 방비는 해야 되지 않겠나. 목숨이 경각에 달리거든 그것을 꺼내 날 부르게.

서책에서 찢어 낸 쪼가리였다.

“그럼 도사님이 오시는 거예요? 오… 근데 보험은 여러 개 드는 게 좋은데… 혹시 쓸 만한 요물은 없…….”

도사는 도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항아리 속으로 사라졌다.

“도사님도 참, 고집하고는.”

곧이어, 자릴 비켜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나서야 도사가 말했다.

—자, 이제 방해하는 이는 없을 터이니, 둘이 아주 긴 밤을 잘 보내고 오거라.

그렇게 도희와 도하는 병실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     *     *

“이번엔 정말 지옥문 앞까지 찍고 온 거 같아요. 그저께는 꿈에서 깼는데 구치소인 꿈을 꿨다니까요.”

도희를 바라보는 도하에게 식사는 이미 뒷전이었다.

“난 지옥에 떨어져도 도희씨 곁이면 좋을 거 같은데.”

“에이, 그래도 지옥은 아니죠.”

“하하, 그럼 같이 지옥엔 안 가도록 노력해 보죠.”

도하의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 냈다.

그의 화사한 미소는 언제 봐도 기분 좋아지는 미소였다.

그의 미소를 지그시 바라보던 도희가 말했다.

“구치소 있으면서 도하씨랑 이런 곳에서 데이트하는 상상은 했는데… 이렇게 빨리 이뤄질 줄은 몰랐네요.”

“또 무슨 상상했어요?”

“네?”

하마터면 집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다 이뤄드리려고요.”

“아… 천천히, 천천히 말할게요.”

아직은 도하에게 조숙한 여자이고 싶은 그녀였다.

“근데 왜 당황하실까.”

“어우, 전혀.”

딴청을 피우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도희는 당황한 게 분명했다.

“우리 밥 먹고는 뭐 할까요?”

“음… 글쎄요. 도하씨 하고 싶은 거?”

“우리 집 갈래요?”

땡그랑—!

도희 손에 있던 숟가락이 떨어지면서 큰 마찰음이 울렸다.

재빨리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을 집어 든 도희에게 도하는 새 숟가락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어우, 몸 좀 숙였다고 머리에 피가 쏠렸나 봐요. 덥네.”

미친 듯 요동치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는 그녀였다.

도하는 그저 웃는 얼굴로 물잔을 들어 보였다.

다시금 도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희가 말했다.

“갈래요. 도하씨 집.”

“갈 때 맥주 사갈까요?”

“완전 좋아. 야식도 시킬래요.”

지이잉—

지이이잉—

그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진 휴대 전화가 진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도하씨 잠깐만요.”

이름을 확인한 도희는 휴대 전활 받아들었다.

“네, 우주씨.”

—도희씨.

“네, 말씀하세요.”

—황이재 부사장이 죽었습니다.

처음 듣는 우주의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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