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말로 할까요, 행동으로 할까요.
“우 경위 사건 복이 터졌네. 복직 첫날부터 대형 사건이야.”
“박 경위님 잘 지내셨습니까.”
“휴가 잘 갔다 왔어?”
“하하, 혼자 쉬다 와서 죄송합니다.”
“됐다. 너라도 쉬다 와서 다행이지. 연달아 사건 터져서 팀 분위기 장난 아니잖냐.”
가까이 다가온 박 경위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서 팀장님 심기 안 거슬리게 조심하고. 요즘 예민 보스니까.”
“넵.”
“여, 우 경위.”
“이 경위님.”
우주가 다가오는 이 경위를 향해 고갤 숙여 보였다.
“복귀 축하하고.”
우주에게 윙크한 이 경위가 말했다.
사실 우주가 정직일 동안 우주의 정보통 역할을 해 준 이 경위였기에 우주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왜 이래, 징그럽게.”
“다들 보고 싶었습니다.”
“너 아직 상황 모르지? 그 마음 십 분이면 변한다에 한 표.”
그때, 이들에게 서 팀장과 지 순경이 다가왔다.
“자, 다들 왔어? 가자.”
팀원들은 앞장선 서 팀장을 따라 묵묵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산을 또 오를 줄을 몰랐습니다.”
중턱쯤 다다르자, 숨을 헐떡이는지 순경이 말했다.
“설마 진짜 또 같은 범인일까요?”
“먼저 도착한 감식반 말로는 이번 현장도 저번이랑 유사하단다.”
“또 그 굵은 밧줄로 묶여 있단 말씀이십니까?”
“어. 그것도 이전 사건 현장 50M 근방에.”
“그 말은… 연쇄 살인…….”
지 순경에 입에서 튀어나온 몹쓸 단어에 신경이 거슬린 서 팀장의 고개가 급히 뒤로 돌았다.
“입방정.”
“…죄송합니다.”
서 팀장의 고개가 다시 앞으로 향하는 걸 확인한 박 경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눈치 없긴. 입조심 해.”
“…예.”
풀죽은 그는 조용히 발길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지 순경은 다시 혼자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뭐가 또.”
“죽여서 옮겼다 해도 이상하고, 살아서 산을 올랐다 해도 이상하고… 대체 왜 CCTV엔 아무것도 안 찍혔을까요?”
이전 사건인 마 부장 사건 이야기였다.
“혹시 이번에도…….”
“또, 또 입방정! 이번 사건 피해자 신분 벌써 나온 거 몰라? 무려 화정기획 부사장이라고. 뉴스 나는 건 시간문제니까 다들 입조심해.”
“이전 사건 피해자도 화정기획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다. 그러니까. 발견 장소도 가까워, 회사도 같아. 그럼 범인은? 당연히 같은 놈일 확률이 높아지겠지?”
“하아…….”
가만히 이야길 듣던 우주의 입에선 깊디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푸른 하늘은 흐리는 검은 새 한 마리가 느리게 날고 있었다.
* * *
“설마, 설마 했는데.”
부사장 황이재가 발견된 현장의 모습은 이전 마 부장 현장 모습과 유사했다.
“같은 놈이 벌인 짓인 게 거의 확실한데요?”
그의 몸과 굵은 나무 기둥을 함께 돌려 묶은 밧줄 하며, 입가에 걸린 섬뜩하리만치 기괴한 미소까지.
“다들 똑바로 정신 차려!”
우주네 팀원들은 현장을 확인한 후 한층 더 예민해진 서 팀장의 성화에 주변 수색에 나섰다.
“막내야, 잠깐 나 좀.”
그리고 지 순경에게 이전 마 부장 사건에 대해 자세히 전해 듣던 우주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이들의 머리 위에는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푸른 눈을 가진 까마귀 한 마리가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우주에게 부사장의 사건 소식을 전해들은 도희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도하의 집을 가기는커녕, 홀로 집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녀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떠오른 해가 아침을 밝히고, 정신을 다잡은 그녀는 바로 우주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우주씨, 저 사실 말할 게 있어요.”
* * *
‘경찰서… 정말 지긋지긋하다…….’
비록 참고인 조사였지만 이곳엔 안 좋은 기억이 많은 도희였다.
흐릿한 그녀의 동공을 본 우주는 도희가 반쯤 넋이 나갔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도희씨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게시판에 살인 예고 글이 올라왔다는 말씀이십니까?”
박 경위는 우주와 이 경위를 번갈아 쳐다보며 황당한 눈빛을 내비췄다.
“…글을 처음 본 건 어제 아침이었어요. 작성 시간은 새벽이었던 거 같고…….”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질 않았다.
“제목은 [강도희는 보세요.]였는데 열 페이지 넘게 같은 글로 도배되어 있었어요. 그냥 미친놈인가 싶어서 하나를 클릭했는데 내용이…….”
심각한 표정의 도희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을 잇지 못하자, 모두 숨죽여 기다려 주었다.
“자기는 내 팬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죽여주겠다, 걱정하지 마라,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사실 대충 읽어서 기억이 잘 나진 않아요…….”
“그 글 볼 수 있을까요?”
“하아… 바로 다 지웠어요.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는 게시판이라… 전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 쓴 글이구나 싶어서…….”
“어… 관련 없는 사람이 쓴 글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그렇게 낙담하진 마세요.”
너무도 창백한 도희가 걱정되어 그녀를 위로한 이 경위였다.
“게시글은 친구가 복구 중이긴 한데…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네요. 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예. 강도희씨 협조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마시고 그냥 푹 쉬세요.”
도희의 안색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희… 씨…….”
홀로 힘겹게 경찰서를 걸어 나가는 도희를 바라보던 우주의 손은 끝내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 * *
“괜찮아?”
“응. 아까보다는 나아.”
“이게 진짜 뭔 일이야…….”
“복구는 되겠어?”
“로그는 찾았는데 내용이 없어. 힘들 거 같은데.”
“하, 난 쓸 때 없이 부지런해서는.”
적어도 하나 정도는 기록 삼아 남겨 둘 걸 그랬다.
작성자 아이디조차 기억나지 않으니 더 미칠 노릇이었다.
“됐어. 웬 자책이야. 너도 사람인데 앞일을 어떻게 다 알아. 그리고 진짜 관련 없을 수도 있잖아. 응?”
“혹시 살면서 겪을 액땜을 지금 다 겪나…….”
—다 괜찮아질 게다. 그러니 홀연히 털어내거라.
“도사님 혹시…….”
—나도 생각 안 해 본 바는 아니나, 아닐 걸세. 향낭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잠시 악의 부르는 향낭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던 도희도 이내 고갤 끄덕였다.
“하긴… 도사님이랑 떨어져 있은 지도 꽤 됐죠.”
도희의 생각대로라면 강아의 병실은 이미 더 큰 고초를 겪었어야 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게나. 때론 덜어 내는 것도 필요허이. 청년이랑 바람이나 쐬고 오는 것도 좋겠네. 저기 어디 먼 계룡산이라던가.
“갑자기 계룡산이요? 도하씨 연차 엄청 써서 몇 개 없을 건데.”
—쯔쯧, 그리 자유롭지 못해서야…….
“도사님이 돈 주고 고용하시던가.”
—오호… 그런 방법이!
“에? 저는요?!”
—자넨 이미 요물들로 돈 벌 길을 만들지 않았나.
“요물이나 쓰게 해주시고 말씀하세요. 이런 옥반지나, 옥팔찌 말고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면서.”
—다 자넬 위해서일세. 자네가 내 마음을 어이 알꼬.
“죽어도 모르겠네요. 죽어도.”
—어려운 이가 찾아와 도움을 청하거든 내가 돕겠네. 그럼 다른 것은 필요 없지 않은가?
“그건 기본 옵션이고, 저도 혼자 뭔가 하려면 요물들이 필요하죠.”
—홀로 뭔가 한다는 생각은 하덜 말게나.
“걱정되세요?”
—그럼. 자네가 또 어떤 사고를 칠까 심히 우려되이.
입술은 삐죽인 도희는 그대로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휴, 나도 모르겠다!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도 내 살길 살란다!”
—허허, 빨리도 깨달았구나.
그때.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병실로 들어오는 백 실장이 보였다.
‘어?! 도사님!!’
도희는 급히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도사를 불렀다.
—믿을 만한 여인일세.
“예?”
병실로 들어선 백 실장은 공중에 떠 있는 서책을 힐끗 흘겨본 뒤, 자신의 자리인 병상 옆 의자로 걸어간다.
“백 실장님도 이제 다 알아. 도사님에 대해서.”
강아도 말을 보탰다.
“허… 허… 좋네요. 도사님 편이 아주 많아졌어. 이러다 나중엔 세상 사람들 다 알겠네!”
이날의 도희는 자신이 내뱉은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 * *
띵동—
덜컥.
벨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쨘.”
문을 연 도하의 눈앞으론 보고 싶던 도희의 얼굴이 아닌 편의점 봉투가 날아들었다.
“도하씨, 맥주 마시고 싶다 했죠!”
봉투가 치워지자 그 뒤로 드디어 도하가 기다리던 얼굴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맥주 살 시간에 빨리 오지 그랬어요.”
다음에 이어질 말을 예상했는지, 도희의 눈은 이미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풉,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말로 할까요, 행동으로 할까요.”
“네?”
얼굴이 빨개진 도희가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자,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던 도하는 먼저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배고프죠?”
“조금?”
거실로 들어선 도희 눈에 보이는 것은 거실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온갖 종류의 술들이었다.
“에… 무슨 술이 이렇게 많아요?”
“도희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오늘 집에 네발로 기어가겠네.”
들뜬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는 도희였다.
그 뒤로 다가온 도하는 뒤에서 도희를 꼬옥 껴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집에 안 보낼 건데.”
얼굴에 화끈한 열기가 오르는 걸 느낀 도희는 도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양팔은 도하의 허릴 감싸며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왜 자꾸 자극해요.”
허리에 닿은 그녀의 손길에 더 큰 자극을 느낀 도하였다.
“후회하기 싫어서요.”
“무슨 후회요.”
“언제 또 이 순간이 올지 모르니까.”
서로만을 가득 담고 있는 둘의 눈동자가 곧게 마주 닿았다.
도하에게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도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요즘 매일, 매 순간 도하씨가 보고 싶어 미치겠어요.”
“저만 할까요.”
도희가 작게 웃어 보이자, 도하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말로 할 건가요, 행동으로 할…….”
도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가에 도하의 뜨거운 숨결이 와 닿았다.
그 순간, 온 세상이 멈추더니, 도희의 입속으로 시원한 박하 향이 스며들어 왔다.
그리고 잠시 뒤, 처음 보는 도희의 농염한 표정을 본 도하는 더 과감히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