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94)화 (94/120)

093화 더 한 것도 할 줄 아는데.

주변을 가라앉히는 불편한 분위기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하아…….”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도하의 비수 같은 한마디가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미안한데, 난 네 이름도 잘 몰라.”

무심하고 비정한 표정에서 흘러나온 그의 한마디는, 홧김에 내뱉은 거짓말을 수습할 자신이 없는 선미를 더 강하게 옭아맸다.

“…….”

도하의 한기 서린 두 눈에 그 자리에 얼어붙은 선미는 결국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죄송합니다.”

선미가 떠나자 도하는 팀원들을 향해 고갤 숙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업무를 이어 나갔다.

*     *     *

백 실장의 손에 의해 보조 침대에 눕혀졌던 도희의 눈이 스르르 뜨였다.

‘…어…….’

아주 오래 꿈을 꾼 듯 정신이 몽롱했다.

처음 보는 낯선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지만, 흐린 기억들은 한 조각 남지 않고 모조리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어… 나 요물 만들고 있었는데…….’

그리고 그 자리는 정신을 잃기 전 현실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채우기 시작했다.

—괜찮느냐.

“저 또 쓰러진 거예요?”

이젠 정신을 잃는 것마저 익숙해진 그녀였다.

—이만하면 다행일세. 단시간 과도한 기운을 몰아 쓰는 바람에 자네 선천지기(先天之氣)까지 건들 뻔했어.

“얼마나 지났어요?”

“두 시간. 너 진짜 괜찮아?”

여전히 토끼 눈을 한 강아 말엔 걱정이 한가득 묻어났다.

“괜찮아. 무리하게 일해서 피곤하면 쓰러지는 거랑 똑같지, 뭐.”

“그게 괜찮은 거냐고 이것아!”

도희는 학생 때도 종종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지쳐 쓰러진 경험이 있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근데 안경은요? 만들긴 만들어졌어요?”

“아휴… 저 독종을 누가 말려.”

결국 혀를 내두른 강아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 소파로 돌아가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받게나.

도희는 손으로 날아든 안경을 잡아들고 곧장 써보았다.

“오! 사람 몸에서 빛이 나네요?”

도희의 시야에 들어온 강아의 몸에선 은은한 흰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 빛은 인간의 기운을 나타내며 감정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기도 허이.

“흰색은 뭐예요?”

—평온하고 선할수록 백색에 가까운 밝은 빛을 띠고, 어지럽고 악할수록 흑빛에 가까운 빛을 띨 걸세. 가장 위험한 자는 검붉은색의 기운일세.

“기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면 기분 나쁘면 검은빛을 띤다는 거잖아요?”

—인간의 감정이 타고난 기운을 이기는 일은 드무네. 선한 자가 아무리 악한 마음을 품는다고 한 듯 회색에 불과할 터. 검은 빛무리를 몰고 다니는 이를 항상 조심해야 함이야.

“약간 연한 보랏빛은 뭐예요?”

도희의 시선은 백 실장을 향해 있었다.

—때론 선이 될 수도, 때론 악이 될 수도 있는 자들이지.

자신에게 꽂힌 도희의 시선을 느낀 백 실장은 작게 헛기침을 해 보이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신기하네.”

—거짓을 고하는 자가 있다면 그 기운은 흔들림과 동시에 서서히 어두운 빛으로 변할 게다.

“이강아 거짓말해 봐.”

“갑자기 뭔 거짓말을 해.”

“빨리해 봐. 아무거나.”

“강도희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다.”

순간 강아를 감싼 옅은 백색 빛이 몹시 흔들리며 번지더니, 물에 먹물이 퍼지듯 연한 회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백색으로 금세 돌아왔다.

“얘가 흰빛인 것도 신기하네.”

“나 밝은 빛이야?!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선할수록 밝은 빛을 띤다는 걸 귀담아들은 강아였다.

“밝진 않아. 연해. 근데 이거 아무나 다 흰 거 아니야?”

“줘봐. 내가 너 봐줄게.”

“됐어. 안 볼래.”

퉁명스레 고갤 돌린 도희에게 갑작스러운 두통이 밀려왔다.

“어… 근데 왜 어지럽지. 으.”

안경을 급히 벗어 던진 도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뭐라? 이리 손 내밀어 보게나.

“잠시만요.”

다시 보조 침대에 드러누운 도희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내 몸도, 자네 기운도 온전치 않아 술법이 틀어진 모양일세.

기껏 신나서 착한 일(?) 좀 해보려고 했더니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그럼 어떡해요? 이거 못 써요?”

—자네의 기운이 소모되는 것이니 짧게 사용할 수밖에 없으이.

“뭐… 어쩔 수 없죠. 그 정도로도 만족해야겠네요.”

안경만 있다면 굳이 도사가 없어도 도희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오래는 못 써도 효과만 확실하면 돼요. 술법이 틀어졌다 해도 효과는 확실한 거죠?”

—두 말하면 입만 아플 일.

“그럼 시험 좀 해볼까요?”

도희는 서책을 가방에 욱여넣고 병원 로비로 걸어 나갔다.

병원 로비는 오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 선 도희는 비장한 표정으로 슬며시 안경을 써 올렸다.

‘와…….’

저마다 형형색색의 다른 빛깔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겹치며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근데 전부 색이…….’

—비슷한 기운은 있을 수 있으나, 같은 기운은 있을 수 없네.

‘아, 그래서 도사님이 사람들을 기운으로 구별하셨구나.’

—게다가 격한 감정에 휩싸이면 각자가 품고 있는 기운이 감정과 섞여 각기 다른 빛을 내는 것이지.

‘밝을수록 선함에 가깝다고 하셨죠?’

—그렇네.

‘그럼 저 사람은요?’

휴게 의자에 앉아 도희처럼 오가는 이들을 구경하는 한 사람에게선 아무런 색도 보이지 않았다.

‘어?’

고개를 빼꼼히 뺀 도희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었다.

자세히 보니 짙은 남색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다.

—내 기운이 허하긴 한가 보구나. 이런 자를 놓치다니.

곧이어 남자의 두 눈이 누군가를 쫓더니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선다.

—저런, 고얀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사람 목숨을 살리는 곳이라며 병원을 유난히 신성시 여기는 도사였다.

—저 놈을 따라가게!

도사에 말에 따라 도희도 조심히 그 남자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     *     *

탁탁탁탁!

“소매치기요?”

도희의 말에 놀란 나머지 칼질하던 도하의 손이 멈춰 선다.

“네. 요즘 검사받거나 산책한다고 잠시 자리 비운 병실에서 지갑이나 물건 사라지는 일이 잦았대요. 글쎄, 그 남자 따라가서 보니까 빈 병실을 뒤지고 있는 거 있죠.”

도희에게 현행범으로 딱 걸린 남자였다.

“도사님 어찌나 노발대발하시던지. 귀 아파 죽는 줄 알았잖아요.”

“도희씨 혼자 따라가기엔 너무 위험했던 거 아니에요? 그 남자가 도희씨한테 해코지할지도 모르는…….”

“도하씨.”

요리하고 있는 도하의 뒤로 다가간 도희는 두 팔로 그를 가득히 끌어안았다.

“아무리 힘센 남자가 덤벼도 지금의 저는 못 이길걸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잠들게 하는 곰방대와 환각을 일으키는 붓을 상시 들고 다니는 도희였다.

최악의 상황엔 은반지로 도망칠 수도 있기에 큰 걱정 없었다.

“그래도 남자가 제압하려고 들면…….”

“도하씨가 그렇게 걱정된다고 하면 도사님한테 힘이 세지는 부적이라도 써달라고 할게요.”

손을 씻은 도하는 뒤로 돌아 도희를 앞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이 가녀린 팔다리로 뭘 하시려고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우리가 24시간 붙어 다닐 순 없잖아요.”

“도희씨만 허락하면 그것도 가능한데.”

“집착도 할 줄 알아요?”

도희가 싱그럽게 웃어 보이자,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얼굴 가까이 다가온 도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더 한 것도 할 줄 아는데.”

피식 웃는 도희의 입가로 도하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진다.

용기를 낸 도희는 멀어져 가는 도하의 얼굴을 움켜쥐어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도희의 손에 이끌린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에 닿아 오랫동안 시원한 박하 향을 남겼다.

*     *     *

다음 날, 느긋하게 사무실로 출근한 도희는 처음 보는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이, 이게 다 뭐야.”

사무실 입구 계단은 낯선 이들로 인산인해였다.

“어?! 오셨네!”

“탐정님 제가 좀 급해서…….”

“거기 아저씨 어딜 올라가요! 여기 다 줄 서 있잖아요.”

“빨리빨리 합시다. 빨리빨리.”

어리둥절한 도희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 문을 열었다.

*     *     *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지…….’

전날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어찌 알았는지, 설 기자는 특종이라며 저녁 늦게 도희 기사를 내보냈다.

신기 있는 탐정이 또 사건을 해결했다며 살해 협박 편지 사건과 병원 사건을 묶어 아주 세세히도 기사를 작성했다.

그들의 마음을 읽어 사건을 해결한 거로 보인다는 추정 기사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실로 대단했다.

‘찾아온 사람들을 내쫓을 수도 없고… 아오.’

의뢰 게시판을 만들고 나서 사무실을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는데, 전날 기사의 영향인지 찾아온 이가 십수 명은 되어 보였다.

먼저 온 순서대로 상담을 시작했는데 역시나 대부분 배우자의 불륜을 밝혀 달라거나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을 잡아달라는 의뢰였다.

‘하아… 사무실 의뢰는 받지 말아야 하나.’

효율을 중시하는 도희에겐 지금의 시간이 너무도 아까웠다.

도희가 불륜과 돈 받아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써 붙여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한 중년의 여인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강도희씨?”

중년의 여인 뒤로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둘이 잇따라 들어선다.

“네. 근데 먼저 오신 분들이 계신데…….”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힐끔힐끔 사무실 안을 쳐다보던 남자를 기억하고 있는 도희였다.

“양보 받았습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열린 문밖으로 하얀 봉투를 안을 들여다보는 남자가 보였다.

“앉아도 될까요?”

시간이 없다는 말과 달리 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느긋하고 온화했다.

“네.”

다소곳이 앉는 중년 여성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고상한 기품이 물씬 흘러나왔다.

“능력이 아주 좋으시다고 들었어요.”

고운 인상의 여성은 도희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차분한 시선을 보내왔다.

“아, 네. 어쩌다 보니 소문이 그렇게 났네요.”

딱히 크게 한 일은 없는데 설 기자 덕분에 명성을 얻은 도희였다.

“그리고 듣자 하니 의뢰를 잘 받지 않으신다고 하던데.”

‘벌써 소문이 그렇게 났나?’

아무래도 여자는 도희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온 듯했다.

“사례는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사례라는 말에 도희의 귀가 쫑긋했지만, 목숨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거절해야겠다며 다짐하고 있는 순간.

“제 죽은 아들 좀 찾아주세요.”

발언과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도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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