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겹겹이 쌓이는 인연 속에.
“죽은 아들이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재차 확인하는 도희였다.
그리고 고갤 끄덕인 여인은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3년 전 아들은 이민 간다며 며느리와 일본으로 떠났어요. 사고는 자주 쳤지만, 하나뿐인 아들이라 그렇게 말렸는데…….”
여인의 표정에서 그때의 고심이 느껴졌다.
“기어코 떠나더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연락을 끊을 순 없었죠. 그렇게 일본으로 간 아들에게 오는 연락은 오직 돈을 보내 달라는 말뿐이었어요.”
또 그놈의 돈.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 횟수가 더 잦아졌어요.”
참 부러운 인생이다.
돈 나와라, 뚝딱 하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거일 테니.
“금액도 생활비라고 하기엔 상식을 넘어선 수준에 이르렀죠. 한국에서도 워낙 자주 사고 치던 애이기에 처음엔 그러려니 했어요. 그런데 점점 금액이 커지고 횟수가 잦아질수록 무슨 일인가 하는 걱정이 들더군요.”
도희는 ‘이런 엄마도 있구나.’ 하며 그 아들에게 부러움을 느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곁에 있으면 더 도와주기 쉬우니까요. 한국에 돌아오지 않으면 더 이상의 지원도 없다고 엄포를 놓았지요.”
“그래서 아드님은 한국에 오셨나요?”
“2주 뒤에 일본어로 적힌 사망신고서 한 장이 날아오더군요.”
“아드님의……?”
“네. 믿을 수가 없었죠. 확인해 보니 서류는 이상 없었어요. 그럼 정말 아들이 죽었다는 건데… 이미 화장되어 저는 확인조차 할 수 없었죠.”
‘설마… 내가 신기 있다는 말 때문에…….’
“사모님 죄송하지만, 제가 귀신을 보거나 그러진 않아요.”
도희의 말에 중년의 여성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어 보였다.
그 동작이 너무도 우아해서 잠시 대화의 주제를 잊을 뻔한 도희였다.
“귀신이 된 아들을 찾아달라고 온 건 아니에요.”
“그럼…….”
“저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닌지라 여러모로 알아봤어요. 그러다 며느리의 수상한 행적들을 발견했죠.”
여성의 곁을 지키는 장정들이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했다.
“며느리는 지금 아들의 보험금을 타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 있어요.”
정말 아들이 죽은 것이라면 며느리가 보험금을 타는 것이 수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죽은 남편의 보험금을 탄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 이상한 건 제 죽은 아들은 일본으로 출국한 기록조차 없다는 거예요.”
“예? 그럼 그 며느리 분은요?”
“두세 달에 한 번씩 해외를 오간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어요.”
“며느리 혼자 일본을 다녔다는 거예요? 아드님은 계속 한국에 있고?”
“일본을 포함한 해외 각국을 다녔더군요. … 탐정님이 생각해도 이상하시죠?”
이상하다마다.
상당히 수상한 행적이었다.
“뭔가 있긴 있어 보이네요.”
“사례는 원하시는 만큼 드릴게요. 도희씨 도움이 필요한데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도희가 사무실을 열며 도사와 약속한 것이 하나 있다.
가능한 생사와 관련된 의뢰만 받을 것.
도희가 고심하듯 이마를 매만지자.
“정말 아들이 죽은 건지, 아들의 넋이라도 달래 주고 싶어요.”
중년 여성은 그전과는 다른 다급한 몸짓으로 도희의 손을 부여잡으며 간청했다.
“…일단 며느리 분을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하는 수 없이 여성을 돕기로 한 도희였다.
절대, 절대 돈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다짐하며.
* * *
온몸에 명품을 휘두른 여인 앞엔 베이지 캐주얼 정장을 차려입은 도희가 안경을 끼고 앉아있다.
“정말 남편분이 일본에서 돌아가신 게 맞나요?”
여인이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여인에게서 풍겨 오는 스산한 검은 기운에 도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희가 건넨 명함을 본 여자는 입꼬리를 뒤틀며 끌어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탐정이라니… 어머님도 참.”
“제 질문에 대답부터 해주시겠어요?”
안경에 기운을 뺏기는 도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사망진단서 보셨잖아요?”
“봤죠. 근데 남편 분 출국 기록이 없던데 어떻게 일본에서 사망하셨다는 걸까요.”
“기록이 잘못된 거겠죠. 어머님이 조작하셨거나.”
“조작이라니요?”
“원래 처음부터 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어요. 그이가 죽고 나니 이젠 남편 잡아먹은 며느리라며 이상한 의심까지.”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도희는 더는 이야기를 이어 나갈 필요를 못 느꼈다.
이미 그녀에게선 세차게 흔들리는 흑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거짓말을 차분히도 잘하네. 무서운 여자야.’
“탐정님 그이는 죽었어요.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어머님께 잘 말씀해 주세요.”
여전히 잘게 흔들거리는 그녀의 짙은 기운에 도희의 입술은 슬며시 한쪽으로 치올랐다.
* * *
며느리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남자들의 집안에서 돈을 갈취하는 일당의 미끼 역할이었다.
최근에 중년 여성이 돈은 보내지 않고 아들의 모습을 보길 원하자, 돈이 필요했던 이들은 아들의 사망을 꾸며냈다.
우선 사망 보험금을 받고, 그 후엔 또 아직 살아 있는 진짜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돈을 더 뜯어내는 것이 이들의 수법이었다.
하여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중년 여성의 아들은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 있었다.
비록 꼴은 엉망이었지만.
“어… 어, 엄마…….”
3년간 창고에 갇혀 생활하면서 남루해진 아들의 모습에 중년의 여성은 울분을 토해 냈다.
도희의 신고로 창고로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아들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그곳에선 중년 여성의 아들 외에도 두 명의 남성이 더 발견되었다.
도희의 활약으로 도망친 일당들까지 모조리 일망타진 할 수 있던 경찰들은 도희에게 감사를 표했다.
몇몇들은 묘한 눈초릴 보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는 도희였다.
이 사건은 일명 꽃뱀 창고 사건이라 하여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뜻하지 않게 도희의 소문과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 * *
“난 봉투 보고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쯔쯧… 악인을 처단했다는 보람보다 재물 얻은 것을 더 기뻐하는 자라니. 내 눈이 삔 게지, 삔 게야.
“도사님 꿩 먹고 알 먹고 몰라요?”
—진정 누군가를 돕기 위해 하는 것인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인지. 쯔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논할 게 뭐 있어요. 둘 다 중요한 건데!”
역시나 말로는 당해 낼 재간이 없는 처자였다.
—내 다시금 생각해야 함이야. 자네를 진정…….
그때였다.
도희 눈앞에 떠 있던 도사의 서책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쏜살같이 병상으로 날아가더니, 밝디밝은 청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도사님?”
“…도사님.”
도희와 강아도 서책을 따라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서책은 여전히 여인의 손에 올려진 채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곧이어 그를 둘러싼 빛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낮게 내리깔린 도사의 전음이 들려왔다.
—의식이 돌아왔네.
미세하게 움직이는 어머니의 손끝을 본 강아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엄마… 내 말 들려?”
정말 도사의 약효가 든 것일까.
강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따뜻한 엄마의 손을 꼭 쥐어 잡았다.
그리고 스르르 떠지는 엄마의 눈을 보고는 더 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아, 엄마.”
눈을 뜬 여인의 시선은 멀뚱히 천장을 향했다.
“엄마 내 말 들려? 엄마, 나야 강아.”
끝내 여인의 입은 열리지 않고, 초점을 잃은 여인의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향해 있었다.
* * *
“강아씨는요?”
“…계속 울다가 이제 막 잠들었어요.”
조급해하지 말라며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도사의 말은 강아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곧 다시 건강하게 일어나실 겁니다.”
“그렇겠죠? 그래도 의식은 돌아오셨으니 다행이에요.”
사실 눈만 떴을 뿐, 정신은 온전치 못한 상태라 의식이 돌아왔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도희씨 오늘 고생 많았어요. 너무 걱정 말고 좀 쉬는 게 어때요?”
도희의 손을 잡는 도하의 손길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오늘 하루는 정말 기네요.”
—둘 다 이리로 들어오게나.
그 순간, 다소 가라앉은 도사의 전음이 두 사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 *
“갑자기요?”
뜬금없이 도희 집으로 자릴 옮기더니 요물을 알려 주겠다는 도사의 말에 얼떨떨한 도희였다.
—당분간 내가 자리를 비우기 힘들 걸세. 이번 사건을 보니 요물들만 적절히 사용한다면 자네 혼자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음이야.
이번 사건은 악을 보는 안경과 도포, 투명 목걸이의 도움이 컸다.
물론 도사가 있었기에 쉽게 풀 수 있었지만.
“그건 도사님이 속마음 듣고 말씀해 주시니까 제가 목걸이 끼고 따라다닌…….”
—얼마간만 버텨 주게나.
어차피 도사가 움직일 수 없는 이유는 강아 어머님을 위해서였다.
입술을 앙다문 도희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진짜 요물 마음대로 사용하게 해주시는 거예요?”
—다만 악한 자를 쫓는 거 외에는 절대 사용을 불허하네. 내 말뜻 알겠는가.
아무리 중저음의 목소릴 더 무겁게 내리깔고 말한다고 한들 도사가 무섭지 않은 도희였다.
물론 도사의 말을 어길 생각도 없었다.
—고얀 놈.
도희의 뜻을 읽은 도사는 하얀 보자기 위에 깔린 요물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두 개는 자네도 알고 있는 게 좋을 듯 허이.
보자기 위에 다른 물건들과 얼기설기 쌓여 있던 물건 두 개가 ‘탁!’ 소릴 내며 공중으로 둥둥 떠올랐다.
하나는 가위, 하나는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탈이었다.
—이 교도(交刀, 가위)는 다른 이의 머리에 닿는 순간 직전의 기억을 지울 걸세.
‘물건 선정이 엄청 단순하셨네. 가위라고 기억을 지우는 거라니.’
—쉬이 기억하기 위함일세. 나라고 저 요물들을 다 어찌 기억하겠나.
‘과거도 준비하셨다는 분이.’
—어허!
‘듣지 마시라니까.’
젊은 날의 치기라고 한들, 과거까지 준비한 도사라니 참 특이한 양반이었다.
도희는 도사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옴에도 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을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근데 직전의 기억이면 얼마큼이에요?”
잔뜩 뿔이 난 표정의 도사는 못이기는 척 대답했다.
—최소 일각은 될 걸세.
15분.
짧지 않은 시간이다.
—허나 절대 그자가 교도(交刀, 가위) 날에 베이거나 다쳐서는 아니 되네.
‘가위 날에 다칠 수가 있나?’
—그자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짐은 물론 이 물건의 걸린 술법도 풀릴 걸세.
한시라도 빨리 설명을 끝내고 돌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시급히 말을 잇는 도사였다.
—그리고 이 처용(處容)탈로는 자네의 외양을 바꿀 수가 있으이.
“얼마나요?”
—자네가 친히 탈을 벗겨 낼 때까지.
“…북한까지 다녀올 만했네요.”
약초 때문에 간 것이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도사였다.
“근데 저 흰 쪼가리는 뭐예요?”
—허허, 자넨 알 것 없네. 청년이 필요하다면 모를까.
도사가 도하에게만 무언가를 말하는 것인지, 도하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뻔하네. 또 이상한 거고만.’
“어? 여기 탈이 하나 더 있는데요?”
무심코 뻗어진 도희의 손이 보자기 위 어떤 물건에 닿는 순간.
“안 돼요! 도희씨!”
—손 떼게!
펑—!
공간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빛에 휩싸인 도희의 몸은 거실 벽으로 날아가 부딪히며 바닥으로 힘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