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그 자식한텐 욕도 아까워.
“죄송합니다.”
—쯔쯧, 그놈의 급한 성질머리를 대체 어찌하면 좋으냐.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내 그리 단단히 일렀거늘!
노한 도사의 음성에 도희는 느슨해졌던 양팔을 더 곧게 세워 올렸다.
그런 도희가 귀여운 도하는 주방 식탁에 앉아 한쪽 턱을 괴고 구경만 할 뿐이다.
“잘못했어요… 아니, 탈이 두 개길래… 당연히 같은 건 줄 알았죠… 닿기만 해도 변하는 줄 누가 알았나요…….”
—내 너 때문에 티끌처럼 모은 정기도 다 썼음이야! 끄응…….
도희의 행동을 막느라 종일 항아리를 넘나들며 애써 모은 정기도 모조리 날린 도사였다.
“그러니까 왜 술법도 잘못 걸려 있는 저런 걸 버리지도 가지고 계셔서는…….”
—파훼할 참이었다 하질 않았느냐. 그건 또 어디 쉬운 줄 아느냐?
모르긴 몰라도, 이토록 노발대발하는 도사를 본 적 없는 도희는 그저 조용히 고갤 숙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끄응… 내 탓일세. 내 탓이야. 내가 안일했던 게지.
얼굴에 쓰는 동안, 일시적으로 외양을 바꿔주는 처용탈과는 달리 도희의 손이 닿을 뻔했던 선비탈은 닿기만 해도 가장 가까운 이와 외양이 바뀌는 요물이었다.
문제는 언제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점.
게다가 뒤틀린 술법이 걸려 있기에 되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탈은 도사님이 보관하시면… 보자기에 넣고 다니다가 제가 또 잘못 손대기라도 하면…….”
못마땅한 눈길로 도희를 슬쩍 흘긴 도사가 덧붙였다.
—어차피 다른 것들 또한 네가 다 들고 다닐 수는 없음이야. 필요할 때 내어줄 테니 전부 내가 가지고 감세.
“아니, 그래도 꼭 필요한 거 몇 개는…….”
—두 개. 그 이상은 불허하네.
말을 끝낸 서책은 보자기를 통째로 집어삼킨 채 홀연히 사라졌다.
도사가 사라지고도 한동안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도희 곁으로 도하가 다가왔다.
“도희씨 괜찮아요?”
벽에 부딪힌 도희가 걱정되어 한 말이었다.
“도사님 고집부리는 게 한두 번인가요, 뭐. 하… 그나저나 고민이네요.”
벽에 부딪힌 자신을 새까맣게 잊은 그녀였다.
아픈 곳도 없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일단 도포랑 목걸이가 겹치니까 둘 중 하나랑 또 뭐가 있었더라.’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눈썹도 덩달아 꿈틀거렸다.
“취하게 하는 술병은 패스, 바람 일으키는 부채도 패스, 그다음 갓은… 으!”
명이 다한 사람을 알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요물이다.
작게 몸을 털어 낸 도희는 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또 다른 상념에 빠져들었다.
‘확! 반달 나무 빗이나 달라고 해서 탈모 환자들 치료하고 돈이나 벌까.’
벌써 귓가로 ‘촤르르’ 돈 세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또 뭐가 있지.’
기억을 조작하고 착시를 일으키는 붓이나, 잠드는 연기를 뿜는 곰방대, 그리고 가위나, 향낭, 탈 같은 요물들이 급하게 쓰일 일은 없었다.
‘그럼 다 도사님한테 맡겨 두고 쓰는 걸로 하고…….’
“두 개라고 하셨으니 답은 정해져 있지 않나요?”
상념에서 벗어난 도희의 두 눈엔 자신의 오른손 새끼를 가리키고 있는 도하가 보였다.
* * *
“도사님 저 정했어요.”
병실 문을 열어젖힌 도희는 대뜸 속에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밀어냈다.
—쯔쯔… 또, 또 저놈의 급한 성질머리.
“언제 위급한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데, 속전속결! 모르세요?”
도사는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여.
빨리 용건만 말하라는 뜻이었다.
“안경이랑 은반지요!”
그렇게 도희의 양손 검지는 옥가락지와 은가락지가 나란히 차지하게 되었다.
* * *
“아 맞다, 너 들었어?”
도희가 이제 막 강아가 예쁘게 깎아 놓은 사과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다댈 때였다.
“뭘?”
“우 형사님 결혼한대.”
“결혼?”
“집에서 억지로 선보게 한 거 같더니,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나 봐. 뭐, 어차피 엎을 거 같지만.”
그동안 봐온 우주라면 절대 원치 않는 결혼은 하지 않을 사람이다.
“근데 그럼 그 여자 문지혁이랑 헤어졌단 소리 아니야?”
강아의 말에 사과를 베어 문 도희의 입에 작은 실소가 걸렸다.
“꼴좋네.”
둘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문지혁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문지혁만 낙동강 오리알 된 거지.”
이내 잘게 사과를 씹던 도희의 안색이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문지혁이 그래서…….’
어쩐지, 언젠가부터 전화가 잦더니 기어코 도희를 만나러 유치장까지 찾아왔던 그였다.
‘돈 많은 여친 만나서 팔자 피는 것 같더니… 결국 버려졌다고 다시 날 찾아? 이거 진짜 쓰레기 새…….’
입술을 앙다문 도희의 입속에선 이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휴… 그 자식한텐 욕도 아까워.”
이내 다시 차갑게 피를 식힌 도희는 그에 관한 생각을 훌훌 털 어버리곤 남아 있던 작은 미련조차 모두 태워 버렸다.
* * *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쨍한 아침 햇살이 도희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밝은 빛에 눈을 찡그린 도희는 건물 뒤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하, 미치겠네! 문에 붙인 글이 떨어졌나?”
건물 입구를 서성이는 사람들을 보니, 아마 2층인 그녀의 사무실부터 이어진 줄인 듯했다.
분명 사무실 문에 큼지막하게 의뢰는 게시판으로만 받는다고 붙여 놨지만, 저들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돌려보내지… 하, 다 상담할 수도 없고…….”
울상이 된 그녀에게서 짜증 섞인 울분이 튀어나왔다.
자신의 사무실이 코앞이지만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마치 소중한 공간을 빼앗긴 느낌마저 들었다.
“힝, 내 티타임!”
그녀의 취향대로 꾸며진 사무실은 도희가 원했던 프리랜서의 삶을 온전히 느낄 수 있던 공간이었다.
게다가 무리해서 넣은 보증금과 매달 나가는 월세는 또 어떤가!
오늘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바닥에 돈을 버리는 거와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종일 저들에게 시달릴 자신도 없는 도희였다.
지이이잉—
지이잉—
도희의 휴대 전화 화면에도 아침부터 끝도 없이 모르는 번호들이 띄워지고 있었다.
“와, 바뀐 번호는 어떻게 아는 거야?”
바로 전날, 밤늦게 번호를 바꾼 도희였다.
“…일을 너무 크게 벌렸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상황들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일명 꽃뱀 창고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후 도희의 명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뜨겁게 달아오른 여론이 그녀를 최고 핫한 인물로 만들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엔 의뢰가 아닌 그저 보고 싶고 궁금해서 도희에게 전화하거나 찾아가 본다는 글들이 상당수 올라오고 있었다.
방금 줄지어 늘어선 이들 중에도 도희의 얼굴을 찍어보겠다며 찾아와 실시간 방송 중인 인터넷 스트리머들도 끼어 있었다.
“후……!”
짧게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한 도희의 발길은 결국 강아의 병실로 옮겨졌다.
* * *
“아니, 의뢰 글만 올리라니까…….”
작게 읊조리는 도희의 음성에선 짜증이 묻어났다.
“그러게. 너무 나선다 했다.”
반쯤 뜬 눈으로 강아를 흘겨 본 도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게시글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누나, 누가 저를 죽이려 해요.”
도희의 이목을 끌려는 어그로성 제목들이 대부분이었다.
“너 그러다 나한테 죽어요. 꼬맹아.”
도희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은 지금도 쉬지 않고 어그로성 글들을 올리고 있었다.
“강아야, 이거 필터링하는 방법 없어?”
“너는 친구니, 웬수니?”
도희 앞에 마주 앉은 강아도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노트북 화면에 얼굴을 박고 일만 하던 상태였다.
“도와주세요, 강아님…….”
“아휴…….”
도희가 지어 낸 불쌍한 표정에, 결국 강아는 못 이기는 척 도희의 노트북을 뺏어 들었다.
“너는 전생에 나랑 원수였을 거야. 그것도 철천지원수.”
“그러니까 이번 생엔 서로 사랑하자. 어때?”
혀까지 내밀며 윙크하는 도희는 귀여웠지만, 강아에게 먹힐 리는 없었다.
“그래. 그리고 다음 생엔 제발 보지 말자.”
무심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강아였다.
똑똑—
그때, 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는 문은 자주 드나드는 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결국 강아의 엉덩이가 자리에서 떨어졌다.
* * *
“연락이 안 되셔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다소곳이 일어난 중년의 여인은 도희에게 허리까지 숙여 보였다.
“아닙니다. 아드님은 괜찮으신가요?”
손사래 치며 다급히 따라 일어난 도희도 여인에게 예의를 다했다.
“도희씨 덕분에 아주 잘 있어요.”
“다행이네요.”
여인이 자리에 앉자, 도희도 그녈 따라 자리에 앉았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정오의 강렬한 빛이 두 여자가 앉은 창가 자리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게요. 볕이 좋네요.”
도희 입가엔 평온한 미소가 나직이 번져 올랐다.
곧 여인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이 트레이에 올린 커피를 가져왔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이런 일 하는 사람입니다.”
여자가 내민 명함을 받아든 도희의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크게 뜨였다.
‘어쩐지, 돈이 많은 거 같더라니.’
여인의 명함에 적힌 해피 캐피탈은 도희도 알고 있는 유명한 대부업체다.
“사실 오늘 도희씨에게 제안 하나 드리려고 이렇게 불쑥 찾아왔어요.”
“제안이요?”
“저랑 일 한번 해보시겠어요? 사례는 섭섭지 않게 드릴게요.”
“아… 어떤?”
“도희씨에겐 크게 어렵지 않을 거예요.”
* * *
“거짓말인지, 아닌지만 말해 주면 된다고?”
“그렇대. 미팅 시간도 전부 나한테 맞춰 주고 10분 이상 안 걸릴 거래.”
안경을 가진 도희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근데 돈도 많이 줘?”
“섭섭지 않게 준다는 게 얼마 줄진 나도 모르지. 일단 한번은 도와주기로 했어.”
사례금의 액수로 봐선 결코 통이 작은 사람은 아니었다.
‘명색에 해피 캐피탈 사장인데.’
도희의 모든 돈은 보증금으로 묶여 있었다.
급하게 생활비가 필요하면 고가구를 내다 팔 생각에 찜찜했던 도희로써는 잘된 일이었다.
“완전 꿀 알바네.”
“도사님… 저도 생활비는 벌어야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죠?”
도사의 눈치를 보며 항아리로 다가간 도희가 작게 속삭였다.
분명 들렸을 텐데도 아무 대답 없는 도사였다.
“조심할게요오…….”
더 작게 속삭인 도희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강아에게 돌아왔다.
“도희야 받아봐. 너희 집 관리사무소래.”
그때, 강아가 자신의 휴대 전활 도희에게 내밀었다.
“우리 집?”
도희는 비상 연락망에 강아 연락처를 적은 것이 떠올랐다.
“네. 여보세요.”
* * *
급하게 집을 찾은 도희 눈에 도희 집 문 앞에 쓰러져 누워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어! 드디어 왔네. 710호 아가씨 아는 사람이지? 어젯밤부터 여기 이러고 있더니 아까 보니까 쓰러져 있더라고! 아가씨는 또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도희를 보고 반색하던 경비원은 구급차는 불러놨다며 황급히 자릴 떠났다.
황망한 표정으로 머릴 쓸어 올린 도희의 시야에 엉망이 된 문지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디서 싸움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피떡이 된 얼굴 때문에 도희마저 처음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아… 미치겠네.”
‘얘는 왜 이 꼴로 우리 집에…….’
그때, 도희 집 복도로 낯익은 사람이 들어선다.
“어…….”
어두운 시선으로 이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