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97)화 (97/120)

096화 지독한 악녀

“도하씨.”

그가 이 시간에 여길 어떻게 온 건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

어둑하니 가라앉은 도하의 시선이 낯선 도희는 그저 그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무거운 침묵 끝에 흘러나온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접이식 들것을 든 구급대원들이 복도로 들어섰다.

문지혁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그 뒤를 따라 도하가 사라질 때까지.

마치 안개 낀 듯 머릿속이 새하얘진 도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도하를 홀로 병원에 보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택시를 타고 구급차를 쫓았다.

응급실 앞에 내린 도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누군가와 통화 중인 도하였다.

“도하씨.”

도하는 전화를 내려놓으며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애써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도희를 맞이했다.

“가서 쉬시라고 보내드린 건데.”

“도하씨도 같이 가요.”

어차피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지혁에게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전 깨어나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도하씨가 왜요.”

문지혁이 도하와 만날 상황을 떠올린 도희에게 기분 나쁜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안 그럼 이 남자가 또 도희씨를 찾아갈 테니까요.”

허망한 표정의 도희는 말을 끝낸 도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도하는 문지혁과 도희의 사이마저 모두 아는 듯했다.

애써 웃고 있지만, 그에게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그의 얼굴과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평소완 다른 도하의 분위기에 도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문지혁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집 앞엔 어떻게 알고 왔는지까지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만 갔다.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할 말들이었지만.

“그럼 같이 있어요.”

찝찝함은 도희가 제일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오늘로써 문지혁과의 모든 걸 깨끗이 정리하리라 다짐한 도희였다.

*     *     *

“뭐?”

“도희야, 여기 있으면 위험해. 나랑 가자.”

이 정신 나간 놈은 깨어나자마자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지혁의 손이 도희의 팔을 잡아 끄려 했다.

“너 혹시 미쳤니?”

재벌 여친에게 차인 실연의 여파로 미친 게 틀림없다.

도희는 그런 그를 다시 응급 베드로 세차게 밀어냈다.

“안 미쳤어. 지극히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로 말하는 거라고. 내 말 들어.”

그래, 문지혁은 가끔 이렇게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던 남자였다.

“내 말이 틀린 적 있어?”

그를 사랑하던 도희가 마지못해 따라줬던 것도 모르고.

“문지혁.”

한 치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도희의 차가운 음성이 둘 사이를 갈랐다.

“드라마 찍니? 나랑 살래, 아니면 뭐, 죽을래 그런 거야?”

“장난 아니라고.”

“내가 어떻게 되든 제발 신경 꺼.”

그리고 그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쏘아붙인 도희는 거침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나도 네가 죽든 살든 관심 없으니까 다신 나 찾아오지 마.”

*     *     *

“나만 무서워? 으… 진짜 소름 돋아!”

“정말 소문처럼 마 부장이랑 부사장 죽인 사람이 우리 회사 사람이면 어떡해?”

“뭘 어떡해.”

“아니, 무서워서 회사 어떻게 다니냐고!”

“둘이 발견 장소도 똑같다면서? 오악산이래.”

“거기면 거기잖아. 강도희도 실종됐던 산.”

오늘도 세 여자는 부지런히 잡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 산에 뭐 있는 거 아냐? 으! 야 더 말하지 마. 이제 난 이 이야기 안 들을래.”

“무슨, 지가 먼저 다 말해 놓고 안 듣는대.”

“무섭잖아! 실종에 살인에! 공포 영화도 아니고 이게 말이 돼?”

“야… 혹시 강도희 아니야?”

도희 이름을 입에 올린 여자는 슬며시 선미의 눈치를 살폈다.

홀로 사색에 잠긴 선미는 세 여자의 대화는 관심 없단 듯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다.

“뭐가?”

“마 부장, 부사장 둘 다 강도희랑 사이 안 좋았잖아!”

“에…? 아무리 그래도 강도희가 무슨 살인이야.”

“왜, 걔가 얼마나 독한 앤데, 사람 일 모른다, 너.”

“야,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강도희가 굳이 왜 사람까지 죽여. 인생 망한 건 그 둘인데.”

“강도희도 회사 그만뒀잖아!”

“걘 자진 퇴사라며.”

“누가 알아? 쫓겨난 걸 수도 있지. 재판 끝나자마자 회사 나간 것도 이상하잖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을 수도 있지.”

“강도희 뭐 탐정 사무실? 그거 차린다고 나간 거라던데. 기사 떴어.”

“맞어! 걔 신기 있다고 기사까지 났잖아! 아니면 막 저주 굿하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다고 사람이 죽냐.”

“증거도 없고 엄청 미스테리하다면서! 거기 입구는 하나밖에 없는데 둘 다 산에 올라간 흔적이 아예 없다잖아.”

“그럼 강도희가 귀신이라도 부려서 죽였다는 거야?”

“하긴, 나도 걔만 보면 소름 돋더라. 원래 좀 분위기가 무서웠잖아.”

부산스럽게 몸을 떠는 여자의 호들갑에 선미의 입에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밖 건너편 빌딩을 보던 선미의 귀는 이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도하는 대체 저런 년을 왜… 나쁜 놈.’

맹렬히도 쏘아졌던 도하의 비정한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강도희 그년이 뭐라고!’

세상 모든 부정적인 수식어를 다 갖다 붙이며 욕을 해도 속에서 들끓는 분노는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얼굴 하나 믿고 이 남자, 저 남자 전부 꼬리치면서 살아가는 주제에!’

외모를 미끼로 편히 살면서 거슬리는 사람은 처참한 지옥으로 몰아넣는 지독한 악녀.

‘…이도하도 분명 속고 있는 거야. 그 악귀 같은 년이 속이고 있는 거라고!’

그럼에도 온갖 불행을 모두 끌고 다니는 여자.

‘우리 도하 어떡해…….’

다른 사람들처럼 곧 도하에게도 처참한 불행이 들이닥칠 것이다.

‘으… 안 돼!’

그렇게 도희를 떠올리던 선미는 끝내 온몸을 잠식한 분노에 잔인하게 먹혀버렸다.

*     *     *

‘같은 현장, 같은 도구, 같은 표정.’

손에 들린 두 장의 사진을 번갈아 보던 우주의 입에선 땅이 꺼질 듯한 큰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체 죽기 전에 뭘 본 거지?’

사진 속 두 남자의 입가에 걸린 기괴한 미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섬찟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왜 하필…….’

마 부장과 부사장의 사건을 조사하는 우주는 남들보다 더 큰 답답함과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희를 만나고 나선 모든 사건이 대수롭지 않았다.

그녀만 있다면 미해결 사건은 없을 거라 여긴 우주였다.

허나 이번 사건은 도희에게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죽은 자의 생각은 읽을 수도 없을뿐더러, 현장에 밧줄을 제외하고는 증거 하나 남지 않은 사건이었다.

더 찝찝한 건 왠지 이 사건이 도희와 연관이 있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었다.

‘증거가 남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건이란 없다.

“하…….”

우주의 입에선 다시 한 번 작게 신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소득 없는 시간이 지속된다면 이 두 개의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도사와 요물을 가진 도희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을 경찰들이 해결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설마 이번 사건도…….’

평범한 사람의 짓이 아닌 것일까.

아님, 모두가 놓친 것일까.

손에 든 작은 USB를 만지작거리던 우주는 무언가 결심한 듯 도희에게 전활 걸었다.

*     *     *

“오늘 모처럼 모인 기념으로 제가 쏩니다!”

반달눈을 한 도희가 작게 손뼉 치며 웃어 보이자, 작은 환호성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꽃뱀 사건 사례금을 받은 후 한 번은 크게 쏠 생각이었다.

“도희씨 잘 먹을게요.”

“강도희가 사는 소고기를 다 먹어 보네.”

강아는 이미 빠르게 메뉴판을 훑으며 주문할 채비를 마쳤다.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며칠 만에 본 우주의 얼굴은 부쩍 핼쑥해져 있었다.

“저 의뢰 해결하고 사례금 두둑이 받았어요. 오늘 소 질릴 때까지 먹으셔도 돼요. 우 형사님은 포장해도 봐 드릴게요.”

마지막 말은 우주에게 다가가 소곤이 속삭인 도희였다.

“큭. 네. 돈 많이 버셨나 봐요. 저도 형사 때려치우고 도희씨처럼 탐정이나 할까 봐요.”

“에이, 부잣집 도련님이 왜 이러실까.”

“부잣집이라니요. 그게 제 돈인가요. 전 아버지랑 일절 관계없습니다.”

“오, 방금 전형적인 부잣집 반항하는 아들 같았어요.”

“하하, 전 평범한 월급쟁이일 뿐입니다.”

“능력 있는 형사님이 평범한 월급쟁이라니요. 겸손도 참.”

“능력… 능력이라…….”

‘엥.’

“우 형사님.”

도하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우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기분도 꿀꿀한데 오늘 좀 마셔 볼까요?”

싱긋 웃는 우주의 잔과 도하의 잔이 맞닿으며 호쾌한 소리를 냈다.

*     *     *

선선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며 지나간다.

이젠 밤엔 제법 쌀쌀한 기온이었지만 산책하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오늘 우 형사님이 도하씨한테 전화한 거라면서요.”

낮에 문지혁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네.”

도하는 괜히 잡고 있던 도희의 손을 더 세게 쥐어 보였다.

“전화 받고 놀랬죠? 그러게 우 형사님은 괜히 사람 걱정하게…….”

“괜찮습니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죠.”

부쩍 가까워진 도하와 우주였다.

“저 이제 정말 그 남자랑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압니다.”

도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도희를 안심시켰다.

“도희씨는 아까 우 형사님이랑 심각해 보이던데.”

우주는 잠깐 할 말이 있다며 도희를 밖으로 불러냈었다.

“아… 저번에 도하씨 오피스텔에서 있었던 사건요… 글쎄, 그 범인한테 제가 그 집에 들어간 영상이 있었나 봐요.”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도희가 향낭을 가져가는 것이 고스란히 찍힌 영상이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그 살인자 놈이 저라고 우겼나 봐요.”

물론 우주가 묻어 버린 덕분에 세상에 나오진 않았다.

“혹시 그 사건 범인도 저처럼 신비한 물건을 가지고 있거나, 도사님처럼 기묘한 능력이 있었냐고… 이번 마 부장, 부사장 사건도 그런 사람의 범행일 수도 있지 않냐고.”

“이번 사건도 많이 이상한 모양입니다.”

“저도 이렇게 답답한데 경찰들이야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우주씨가 묻는 건 아는 만큼 다 대답해 줬어요.”

“도희씨 탓 아닙니다.”

도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질 찰나, 환한 도하의 미소가 날아들었다.

“그렇겠죠? 에휴… 조용할 날이 없네요.”

그가 걱정할까 애써 도희도 멋쩍게 웃어 보였다.

“곧 올 겁니다. 조용한 날.”

“그럼 우리 그땐 멀리 여행이나 다녀올까요?”

“좋죠. 어디 가고 싶으세요?”

“음… 아주 멀리요, 아주. 근데 이 상태면 언제 조용해질지 모르겠어요. 하!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써서 사무실 안 냈죠! 그냥 의뢰 게시판으로만 받을걸.”

“다 도희씨 능력이 좋아서 그런걸요?”

“근데 도하씨.”

도하의 고개가 의문을 담아 갸웃거렸다.

“우리 언제까지 존댓말 해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잘게 반짝이는 도희의 눈동자에 도하의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지금.”

도하의 대답에 예쁘게 올라간 도희의 입매가 그의 뺨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그래.”

전과는 다른 찌릿함이 맞잡은 손을 타고 가슴까지 올라왔다.

둘은 눈만 마주쳐도 이유 모를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설렘 가득 찬 발걸음을 집으로 옮기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거리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선미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엔 더 진득한 어둠이 내려앉더니, 그 주위로 스산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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