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예쁜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하얀 오프숄더 블라우스
스산해진 선미의 그림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 가로등 불빛 한 점 없는 이 어둑한 곳에도 이들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있다.
도하와 도희 그리고 선미까지 이 모두를 지켜보던 설 기자의 두 눈엔 광기 어린 이채가 금세 일다가 사라졌다.
* * *
“도희씨 생각은 어때요?”
아주 온화하고 나긋한 음성이었다.
“저 사람이 그 돈을 갚을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인데 날짜는 못 맞출 거 같아요.”
“오호… 그렇군요. 날짜는 못 맞춘다라…….”
“기간을 늘려서 다시 물어보시면 어떨까요.”
“좋아요. 멀리 가지 않았을 거예요.”
중년의 여인이 손짓하자 수행원은 급히 어딘가로 전활 걸기 시작했다.
곧 다시 나타난 남성과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고 오늘의 임무는 끝이 났다.
“오늘 일해 보니까 어떠세요. 또 하실 만한가요?”
‘아우,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어요. 아주 꿀이죠.’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손해 볼 말은 하지 않은 도희였다.
“음… 네. 뭐, 많이 힘들진 않네요.”
도희는 애써 담담하게 천천히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가끔 큰 건은 이렇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해피 캐피탈의 CEO.
이 고운 중년의 여인은 대부 업계의 큰손이라 불리는 만큼 급한 기업 대출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살면서 이리 쉬운 알바는 해 본 적 없는 도희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토록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니, 그동안 무슨 고생을 한 것인지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문득 도사는 그녀 인생에 나타난 로또가 아닐까 생각하는 도희였다.
“이건 오늘 도와주신 답례예요.”
“답례는 저쪽에서 돈을 다 갚고 난 뒤에 받아야 맞지 않을까요?”
도희를 믿고 빌려주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마땅했다.
도희의 말에 여인은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도희에게 답을 내놓았다.
“사실 이미 다 알아봤어요. 도희씨 말대로 원래의 기일은 맞추기 힘들 테지만, 지금 변경된 날짜라면 가능할 겁니다. 저 기업에 들어올 돈이 있는 걸 확인했거든요.”
오늘 일은 일종의 테스트인 모양이었다.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아니에요. 확실한 게 좋죠.”
온화하게 웃어 보인 여인은 다시 도희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또 뵙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선 후 바로 봉투를 확인한 도희의 입이 귓가에 걸린다.
그리고 도희는 주체하지 못할 흥겨움에 콧노랠 부르며 강아의 병실로 발길을 옮겼다.
* * *
귓가엔 잔잔하고 평화로운 클래식 음악이 흐르지만, 이 사이를 오가는 대화들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허허, 요즘 아들놈이 신장이 안 좋은데 어떡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어떡하긴요. 병원을 가야지요.”
“아유, 그러다 김 회장님처럼 수술 날짜 다 받아놓고 수술 못 받아서 화병이라도 날까 겁납니다.”
순간,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사람들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아, 이런 실수를. 저도 사람인지라 이런 실수를 다 합니다. 하하.”
날카로운 소음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던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둘씩 풀려 간다.
“그럴 수도 있지요. 포크가 불량인 모양입니다.”
손남수는 왼손이 붉어질 만큼 꽉 쥐었던 포크를 슬며시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러게요. 포크가 불량인 모양입니다. 두 번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요.”
손남수의 뒤에 서 있던 웨이터는 재빠르게 그에게 새 포크를 건네주었다.
“그나저나 박 의원님. 전 아드님보다 박 의원님이 걱정입니다. 어떤 비리 장부에 이름 올리셨다고 온 동네에 소문이 다 났던데.”
손남수는 자신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을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이미 종결된 사건입니다. 저랑은 관계도 없고요. 동명이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허허.”
“하하, 동명이인이라. 말년에 고생 꽤나 하실 뻔했는데 조용히 잘 넘어갔나 보군요.”
손남수의 입가에 떠오른 신랄한 미소에 박 의원을 입매를 굳히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 화정기획 부사장 일이라면 당사자가 죽었으니 더는 조사하고 말 것도 없지요.”
“아, 그 장부에 김 사장님도 계셨지요?”
조금 전, 손남수를 긁으려는 박 의원의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그에 맞장구를 쳐준 김 사장이었다.
“크흠! 저는 그 자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왜 김 사장님은 화정그룹 회장님과 친하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그자를 예뻐하긴 했지요. 저랑은 관련 없습니다.”
불편한 공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그리고 손남수와 이들 간의 과열된 열기를 막기 위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희도 조심해야겠습니다. 그 친구 꽤 야망 있는 친구였는데 이리 갈 줄은 몰랐습니다.”
“욕심이 과했던 게지요.”
“그럼 저희 다 조심해야겠습니다. 여기 욕심 과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하.”
찬물을 끼얹는 손남수의 말에 모두 슬쩍 작게 헛기침을 해 보였지만, 감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서로 기 싸움을 마친 이들은 언제 사이가 나빴냐는 듯, 슬슬 서로의 본색을 드러내며 손익을 주고받기에 여념 없었다.
* * *
간식을 잔뜩 사 들고 강아 병실을 찾은 도희는 여느 때와 같이 의뢰 게시판을 보고 있었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보나.’
그렇게 도희의 지루한 손길이 게시판 글을 하나하나 클릭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강도희.”
외출했다가 돌아온 백 실장이 세상 비장한 표정으로 도희를 불러냈다.
* * *
“세상이 썩은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로 썩은 줄은 몰랐네.”
이무혁 부사장의 접대 비리 장부.
한 부장이 가지고 있던 그 장부는 백 실장의 손을 거쳐 지금 도희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검찰에선 수사를 중단했어. 이 장부가 사본이라는 게 그 이유야.”
“아니, 사본이든 진본이든 이렇게 버젓이 기록이 있는데 그냥 조사해 보면 전부 나올 거 아냐?”
“그 이유가 진짜겠니?”
“너무 눈에 보이는 뻔한 핑계 아니야?”
“그래서 그 뻔한 핑계로 지금 어떻게 됐지?”
수사는 중단되고 장부 속 인물들 중 재판받은 사람 하나 없고, 비리의 중심인 부사장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장부도 한 부장님이 따로 하나 더 갖고 있던 거야. 검찰에 넘겼던 장부는 그대로 묻혔으니, 이것마저 없었다면 부사장의 비리 명부는 종적을 감췄겠지.”
“하아… 내 앞에 나쁜 놈들만 나타나는 건지, 세상이 이런 건지…….”
“부사장이 왜 죽었다고 생각해?”
“…설마.”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의 원인만 없애면 해결돼.”
부사장이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문제의 중심을 뜯어내거나, 논점을 흐리는 방법.
“그럼 넌 이들 중에 누군가 부사장을 죽였다는 거야?”
“그거야 모르지. 근데 중요한 건 한 부장님도 살해 위협을 느낀다는 거야.”
“뭐? 한 부장은 감옥에 있잖아.”
“감옥에선 사람이 안 죽는다니? 자세히는 모르겠어. 누군 갈 자신을 죽일 거라니, 제발 살려 달라면서 소리치고 경기 일으키고… 이미 제정신이 아니야.”
백 실장은 지친 표정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낮에 만났던 한 부장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 깊은 곳으로 이유 모를 불안이 엄습해 왔다.
“흐음… 검찰, 경찰에서도 벌을 못 주는 사람들이라… 얼마나 대단하신 양반들이시길래.”
장부를 펼치니, 각각의 칸마다 사람의 이름 옆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둘째 아들 약쟁이. 마약 관련 조사받은 전적 있음]
“이건 뭐야?”
“고상하신 양반들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잘 잡혀가지도 않아. 물론 열심히 잘도 숨어서 행동하기도 하고.”
백 실장의 손가락이 도희가 읽은 포스트잇을 가리켰다.
“이건 네 재판을 맡은 윤상우 판사 약점.”
“내 재판? 그 판사님?”
“원래 기업이나 경제 재판으로 유명한 판사야. 피고인이랑 짜고 집행유예 주는 걸로.”
그들에게 집행유예는 무죄나 마찬가지였다.
“질린다, 진짜. 그놈의 짜고 치는 고스톱.”
“뭐, 부사장이랑도 여러 번 손 맞춘 사람이야. 비리의 온상.”
도희는 장부에 이름마다 붙어 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이게 이 썩을 놈들 약점이라는 거지?”
“내가 알아본 거니까 확실해.”
백 실장이 부사장을 도와 사람들의 뒤를 캐고 다녔다는 걸 잠시 잊은 도희였다.
“이 사람들은 너한테도 감정이 안 좋을 거야. 다음 타겟은 네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
“그렇게 겁 안 줘도 도와줄게.”
“뭘 도와.”
“너도 위험한 상황이란 거잖아.”
백 실장은 정말 도희가 신기가 있어 자신의 마음을 읽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도사의 도움과는 별개로 말이다.
“자, 그럼 누구부터 엿을 줘야 하나.”
도희의 얼굴에 떠오른 악랄한 미소를 본 백 실장은 말없이 입매를 굳힐 뿐이었다.
* * *
예쁜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하얀 오프숄더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쇄골의 파인 부분을 자꾸 매만졌다.
흰 눈같이 하얀 살결 위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으니 여자의 얼굴은 희다 못해 눈부시게 빛날 지경이었다.
유난히 빛나 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녀의 옷차림보다 그녀의 미모를 구경하느라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 옆엔 속옷이 보일 듯 말 듯 매끈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짧은 검정 치마의 여인이 하이힐을 신은 한쪽 발을 내밀곤 자신의 예쁜 몸 선을 뽐내고 있다.
거리의 있는 모든 남녀의 이목을 집중시킨 두 여자 곁으로 그보다 더 강렬한 시선을 끄는 훤칠한 외모의 남자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여인에게 꽂혀 있던 여자들의 시선은 이제 모두 이 두 남자의 차지였다.
도하의 시선이 훤히 드러난 도희의 어깨로 향하자, 우주가 말했다.
“한 사람은 상의, 한 사람은 하의 담당인가요? 둘이 그렇게 한쪽씩만 헐벗기로 약속한 건가.”
“이런 날 아니면 언제 이렇게 입어요. 이 옷 너무 예쁘지 않아요?”
“도희씨가 더 예뻐요.”
우주가 도하를 흘겨보자,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낸 도하였다.
곧 우주의 입매가 뒤틀리며 치솟더니 뜻 모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오늘 둘, 둘 따로 놀 거죠?”
우주가 말했다.
“네?”
이런 곳엔 처음 와본 도희였다.
당황한 도희와 달리 강아는 상관없다는 듯 상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었다.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놀아 보나요.”
“그건 그런데… 뭐, 그래요.”
한쪽 볼이 작게 부푼 도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목을 긁적였다.
“전 싫은데요.”
싫다고 대답한 도하의 귓가에 우주가 무어라 속삭인다.
그러자 도하는 거침없는 걸음을 옮기더니 앞장서서 클럽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벌써 귀가 먹먹할 정도의 신나는 소음이 뿜어져 나오는 클럽 입구로 두 남자가 사라지자, 내내 그들에게 시선이 꽂혀 있던 여자들이 그 뒤를 따른다.
“허.”
그리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희와 강아에게도 낯선 남자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