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호부견자(虎父犬子)
말없이 마주 선 남자들에게선 주변을 얼리는 살벌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뭐야, 진짜 서로 치고받기라도 하려고?’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긴장한 도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불안함을 담은 그녀의 눈동자가 양쪽으로 대치하고 선 남자들을 바삐 오가는데.
짝짝.
갑자기 크게 손뼉을 치는 우주였다.
“장난은 그만하고.”
낯빛을 바꾼 우주는 다시 장난기 머금은 얼굴로 돌아왔다.
“자, 우리 여성분 도난 신고하셨죠?”
난데없는 우주의 발언에 모두의 얼굴에 황당함이 드리고, 우주에 눈짓을 읽은 도희가 눈치껏 말을 이었다.
“아, 네. 제가 지갑이 없어져서요.”
원래 카드 한 장 달랑 가지고 다니는 도희는 지갑은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뭔 개소리야.”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직감한 둘째 아들놈의 입에서 신경질 섞인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의 친구들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 표정으로 코웃음 치며 본인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다.
저 바보들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한 모양이다.
“내가 여기 들어오고 만난 게 너희밖에 없어서 말이야.”
오랜만에 비즈니스 미소를 장착한 도희였다.
방금까지 진득한 눈빛으로 도희를 바라보던 남자의 두 눈엔 분노가 차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지금 어디서 쑈를 해!”
남자의 일갈과 동시에 우주의 뒤로 경찰 두 명이 룸 안으로 들어섰다.
“오케이.”
그러자, 판사 아들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절도죄 인정할게요. 제 스타일이라서 훔쳤어요.”
그의 말을 들은 친구들을 쿡쿡대며 웃기 시작했다.
“보상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다시 도희에게 향했다.
“야, 얼마 받으려고 이 짓 했냐. 얼마 주면 되는데.”
시커먼 눈썹을 건방지게 들썩거리며 말하는 모습에 도희도 코웃음을 흘렸다.
“풉. 네가 원빈이냐? 어따 ‘얼마면 돼’를 남발하고 있어. 그리고 그게 네 돈이냐 쨔샤?”
“입이 거치네. 얼굴은 예쁜 년이.”
그 순간, 이들은 보지 못했지만, 도하의 눈빛에 일순 살기가 솟구쳤다.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문 도하가 나서려는 것을 우주가 고개를 저으며 막아섰다.
“나도 알아. 나 예쁜 거.”
정작 그의 거친 말에도 타격 없는 도희였다.
“그리고 모질아, 지갑 훔쳤다고 하면 소지품 검사 안 할 줄 알았어?”
“뭐?”
남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눈알을 열심히 굴려댔다.
그때.
탁!
테이블을 거세게 내려치며 모두를 주목시킨 우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여러분은 절도 및 마약 투약이 의심되는 바, 긴급 체포 사유에 해당되므로 지금부터 불심 검문을 시작합니다.”
마약이라는 단어에 남자들의 낯빛은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모두 소지품 테이블 위로 올려 주십쇼.”
경찰복을 입은 두 명이 재빠른 동작으로 사내들 곁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약했다는 증거 있어?”
남자의 질문에 도희가 답했다.
“지금 네 정신상태가 약 빨았다는 증거지, 새끼야.”
그제야 심드렁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들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 * *
끝까지 불심 검문을 거부하던 남자들의 소지품에서 결국 태국산 마약이 발견됐다.
바로 긴급 체포된 이들은 가까운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곱게도 자랐다. 곱게도.’
얼마나 대단하신 집안의 자제분들인지, 경찰서에 도착함과 동시에 각자의 변호사들이 나타났다.
변호사들이 나타나자 남자 넷은 짜기라도 한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닫았다.
‘어쭈.’
마치 자신들은 절대 벌을 받지 않는다는 냥, 거들먹대며 건방진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에 도희도 이를 악물었다.
‘그래. 쉽게는 안 잡힌다는 거지?’
“형사님! 쟤가 아까 자기한테 약 있다고 막 같이 하자고 그랬어요!”
도희의 곱고 긴 손가락은 판사 아들놈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
“제가 증인이에요. 이 자식들 상습범 같으니까 꼭 잡아 쳐! 넣어주세요.”
도희의 급발진에 당황한 형사는 우주를 쳐다봤다.
웃음이 터진 우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서류를 마저 적었다.
“허.”
지목 당한 판사 아들놈의 비틀린 입 사이로 외마디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그리고 내 지갑이나 내놔. 합의 안 해. 븅X아.”
도희를 쳐다보던 그의 공허한 두 눈 속 빛을 잃은 자리엔 어둠이 짙게 스며들었다.
* * *
“엄청 억울하겠죠? 쌤통이다!”
경찰서를 걸어 나오는 도희의 얼굴에 통쾌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자기가 괴롭혔던 여자들만 할까요.”
“저 자식 여자들도 괴롭혔어요?!”
“그러니까 도희씨는 다행인 줄 아세요. 거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따라갑니까.”
“아니, 와서 말 거는데 얼굴 보니까 딱 그 판사 아들놈이잖아요. 마냥 사고 치길 기다리는 것보다 현장에 들어가서 헤롱 거릴 때 잡으면 더 좋잖아요.”
“도희씨도 같이 헤롱거리고 있을 때요?”
“네?”
“걔들 여자들한테도 몰래 약 먹여서 희롱하는 걸로 유명해요.”
“그래서 컵 바꿨어요.”
“도희씨가 어떻게 알고요?”
“보통 쓰레기들은 그러지 않나? 뉴스에서 보니까 그렇던데. 하여튼 쟤들도 방법이 너무 진부해. 발전이 없어. 발전이.”
도희가 혀를 쯔쯧 차자, 우주의 놀란 토끼 눈은 금방 능청스러움을 되찾았다.
“역시, 우리 도희씨는 크으, 완벽해.”
“쟤들 잡히겠죠?”
도희는 조사를 받고 서를 나설 때, 자신을 바라보던 그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도희를 가리키며 섬뜩한 표정으로 목 긋는 시늉을 하는 놈부터, 살기 띤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대수롭지 않은 듯 인사하던 놈까지.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판사 아들놈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명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나이는 아니었으니,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단 소리였다.
“이미 마약 관련 혐의 전적이 있어서 소지만으로도 처벌받을 겁니다. 곧 뉴스도 나갈 겁니다. 민기 자식 특종이라고 좋아하던데요.”
우주는 이미 설 기자에게 전화로 정보를 넘긴 상태였다.
“아무리 판사 아버지를 뒀어도 벌 받은 걸 받아야죠!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아들놈이나 그 아버지나!”
“호부 밑에 견자 없다라… 풉. 그렇네요.”
왠지 우주의 미소가 씁쓸해 보인 도희는 급히 말을 돌렸다.
“에휴, 저놈들 생긴 것만 멀쩡하면 뭐 하나. 하는 짓이 쓰레긴데.”
“생긴 것도 안 멀쩡하던데.”
몇 시간 만에 듣는 도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두 분만 가신 건 너무 무모했습니다.”
유독 차가운 음성이었다.
“여자 분들이랑 너무 잘 놀고 계시길래.”
도희의 음성에도 냉기가 흘렀다.
“예? 여자? 아… 제 친구들이에요. 여기 MD 직원들.”
예사롭지 않은 둘의 분위기에 우주가 나섰다.
“우 형사님은 여러모로 예상외네요.”
“칭찬입니까.”
“그럼요. 여기 너무 재밌던데 스트레스 받으면 또 놀러 와야겠어요.”
도하를 슬쩍 흘긴 도희는 해장이나 하자며 도도히 앞서 걸어 나갔다.
“쟨 논 알콜 마셔 놓고 무슨 해장이래.”
클럽에서 병째 마시던 게 논 알콜이라니.
그럼 멀쩡한 정신으로 그 춤을 추고 놀았단 말인가.
강아의 말을 들은 우주의 입에선 소란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흐,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우주야 어떤 수상한 여자가 강도희씨 따라다닌다.’
도희를 따라 걷던 우주는 설 기자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워낙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그녀이기에 누군가 도희를 노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진 않았다.
문제는 지금 우주에게 일행을 따라오는 그 누군가가 포착되었다는 것.
우뚝 걸음을 멈춰 세운 우주는 발길을 돌려 뒤로 뛰기 시작했다.
조용히 이들을 뒤쫓던 선미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뛰어오는 우주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 뭐야?”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의 목소리는 지독히 차가웠다.
지독히도 잘생긴 외모와는 달리.
“뭐, 뭐가요?”
선미의 입술엔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왜 따라오십니까?”
“…그런 적 없어요. 저도 가는 길이에요.”
그때, 우주의 돌발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일행들이 우주를 쫓아왔다.
“아는 얼굴이네요.”
도희의 말에 선미는 슬그머니 고갤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게요.”
그런 선미를 쳐다보는 도하는 더없이 차가웠다.
“아시는 분입니까? 이분이 클럽에서부터 저흴 쫓아오셨는데.”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잊지 않는 우주였다.
“하! 내가 그쪽을 왜 쫓아다녀요.”
빠르게 흘러나오는 선미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아, 나 말고 이쪽.”
우주의 손가락이 도희를 가리킨다.
도희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엥? 나? 선미씨가 절 왜 쫓아다니시는 거죠?”
“그런 적 없어요!”
큰 목소리로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와 움츠려진 어깨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럼 우리 형사님이 오해하신 건가?”
“과대망상증 있어요? 뭐, 같은 길만 걸어도 다 자기 쫓아가는 건가!”
“아닌 거 같은데.”
당혹스러워하는 선미에게 도희의 한마디가 내리꽂혔다.
‘뭐가 아닌데?’ 말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선미였다.
천성이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그녀는 도희 앞에만 서면 괜히 움츠러들었다.
“그래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희의 인사에 눈을 치켜올린 선미는 울분 가득 찬 표정으로 일행을 훑었다.
팔짱 낀 도하는 여전히 서늘한 표정으로 일행의 뒤에서 선미를 무심하게 보고 있었고, 뭐가 웃긴 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잘생긴 남자와 그 옆에 선 여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선미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미소 띤 도희의 표정도 왠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다.
속에서 꿈틀거리기만 하던 깊은 모멸감이 순식간에 선미의 온몸을 잠식했다.
‘이 더러운 년이! 네가 뭔데 날 비웃어!’
도희를 흘겨보는 것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킨 선미는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도하의 두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 * *
“병원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운전하시게요? 미쳤어요?”
“전 누구처럼 술 안 먹었습니다.”
할 말은 잃은 강아는 작게 기침하며 차에 올라탔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강아가 급히 우주의 말을 잘랐다.
“저 오해 안 해요. 우주씨나 오해하지 마세요.”
“무슨 오해요?”
“…네? 그, 우주씨가 하려던 말…….”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데요.”
“그야…….”
갈 길을 잃은 강아의 눈동자가 차 안 여기저기를 헤매자, 불쑥 우주의 얼굴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우주의 얼굴에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은 강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