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따스한 우주의 숨결이 강아의 목을 스치듯 지나치며.
따스한 우주의 숨결이 강아의 목을 스치듯 지나치며 달콤한 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딸깍.
강아가 눈 감은 것을 본 건지, 못 본 건지 강아의 안전벨트를 채우고 몸을 돌린 우주는 태연하게 차 시동을 걸었다.
‘이 자식 진짜 뭐 하자는 거야. 아오.’
민망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얼굴에 오른 뜨거운 열기를 느낀 강아는 괜히 목을 만지며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하려던 말은…….”
숨을 잠시 고른 우주의 입술이 떨어진다.
“강아씨의 도움을 받지 않은 건 이 일에 강아씨를 끼게 하고 싶지 않아섭니다.”
그의 낯빛은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괜히 강아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니까 괜한 오해 마십시오.”
“…….”
“저도 강아씨 오해 안 합니다.”
우주의 말이 끝나자 차가 느리게 출발했다.
‘변명은.’
강아는 별 대꾸 없이 시선을 창밖 멀리 던졌다.
자신이 무슨 피해를 받는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였다.
그리고 무거운 고요를 먼저 깬 것은 우주였다.
“이제 백 실장도 병실에 있으니까 밥도 나가서 좋은 거 먹고 하세요.”
‘갑자기?’
“저 밥 잘 먹고 있어요.”
운전하던 우주의 고개가 격하게 꺾이며 강아를 향했다.
그의 다정한 시선은 강아의 얼굴 곳곳을 살피며 지나쳤다.
“살 빠진 거 같은데.”
‘남이사~ 뭔 상관.’
“이참에 다이어트하고 좋죠, 뭐.”
강아의 새침한 표정을 본 우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살 더 빠질 때도 없는데.”
‘뭐야, 진짜.’
지나치게 다정한 목소리에 강아는 우주를 쳐다보며 뚱하게 되물었다.
“도와준다는데 거절한 게 미안해서 그래요?”
“미안하고… 고맙죠. 저 생각해 주신 건데.”
‘알긴 아네.’
어느덧, 진중하게 가라앉은 그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평소엔 몰랐는데…….’
언제나 미소를 가득 안은 장난기 머금은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기에 몰랐지만, 표정을 지운 그의 얼굴에선 왠지 모를 어둠이 묻어났다.
‘잘생기긴 더럽게 잘 생겼네.’
“확 그냥 질러 버릴까.”
미미하게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뱉어진 강아의 뜻 모를 말에 우주의 머리 위로 풀리지 않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 * *
오늘 도하가 도희를 집으로 이끈 말은 ‘내일 주말인데 같이 영화 보다 잘래요?’ 였다.
어차피 내일 도사와의 약속도 도하와 함께였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는 도희였다.
“좋아요.”
고민 없이 수락한 도희는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너무 바로 좋다고 했나. 쉬운 여자는 별론가.’
겉으론 연애엔 통달했을 듯한 도희지만, 먹고살기 바빴던 그녀는 누구보다 연애 경험이 없었다.
연애 고수인 척하는 강아는 여자는 튕겨야 제 맛이라고 하지만 도희가 보기엔 강아의 연애도 예쁘게 끝난 적이 없으니 그녈 믿을 수도 없었다.
‘에이, 몰라. 좋으면 좋은 거지!’
매일 아침, 도희는 혹시나 모를 밤을 위해 예쁜 속옷을 고른다.
물론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도하는 도희를 꼭 껴안고 잠만 자는 남자였다.
처음 같이 자던 날, 안고만 잘 테니 집에 가지 말라던 약속을 아직까지!
묵묵히 잘도 지켜내는 도하였다.
그런 남자 앞에서 도희도 어쩔 수 없이 조숙한 여자인 척을 하고 있지만 보고 있으면 안고 싶고, 안으면 뽀뽀하고 싶고, 뽀뽀하면 더한 것을 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속마음이었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도하가 애석할 뿐이다.
근데 오늘 도하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사뭇 다르다.
“저 씻고 올게요. 담배 냄새가 배어서.”
그는 뭔가 결연한 표정으로 거실 화장실로 들어갔다.
‘냄새가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자신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은 도희도 희미하게 밴 매캐한 냄새에 침실 화장실로 들어섰다.
금방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온 도희 눈앞에 샤워 가운만 걸친 아슬아슬한 자태의 도하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항상 옷 입고 나오더니…….’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보다 느슨한 샤워 가운 매듭에 자꾸 시선이 가는 도희였다.
도희는 고갤 숙여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봤다.
‘나도 바지를 벗을까…….’
도하 집에 두고 입는 그녀의 애착 바지를 벗어도 도하의 티셔츠가 그녀의 무릎 위까진 거뜬히 내려올 것이다.
잠시 고민에 잠긴 그녀에게 도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화 보면서 와인 한잔할래요?”
불쑥, 방금 씻고 나온 도하의 뽀얀 피부 결에 손을 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네. 좋아요.”
그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도희는 고민도 잊은 채 그를 따라 소파로 걸어갔다.
불을 끈 도하가 거실 곳곳에 있는 향초를 하나둘씩 켜자, 향긋한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거실을 채워 나갔다.
영화를 고르기 위해 리모컨을 집어 든 도희는 분주하게 와인 딸 준비를 하는 도하에게 물었다.
“근데 아까 우 형사님이 귓속말로 뭐라고 한 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이었기에 자신을 버려 두고 우주와 둘이 클럽으로 들어간 것인지 내내 궁금했다.
“여자는 집착하는 남자 싫어한다던데요.”
“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래서 그렇게 쌩하니 들어가서는 여자들이랑 신나게 놀았어요?”
“예? 제가 언제 여자들이랑 놀았습니까.”
도하 손에 의해 오픈된 레드와인이 잔에 따라지며 ‘또르르’ 소리를 냈다.
마시지도 않은 와인이 취기를 빌려준 것인지, 도희는 속에 담아 둔 말들을 입 밖으로 내밀었다.
“친화력이 얼마나 좋은지, 바로 반말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뭘.”
“그럼 아까 다른 여자한테 반말했다고 삐지신 겁니까?”
“삐진 적은 없어요.”
“눈길 한번 안 주시던데.”
“뭐, 조금 섭섭하긴 했죠. 내가 말 놓자고 해도 나랑은 안 놓잖아요. 도하씨가.”
“그거야.”
도하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너무 소중해서.”
말을 끝낸 도하의 입술은 급하게 도희 볼을 훔치고 도망갔다.
“풉.”
‘이 남자가 이런 짓도 할 줄 아네.’
도하는 쑥스러운지 급하게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쿡쿡대며 입을 가린 도희에게서 끊임없는 잔망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우, 솔직히 방금 좀 느끼했다. 그죠?”
“느끼했어요?”
“뭐, 도하씨가 하니까 들을 만했어요.”
그의 민망함을 감춰 주고자, 미소를 머금은 도희의 손이 리모컨을 눌렀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도희는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꼭 연인과 보고 싶던 영화였지만 지혁과 헤어지고 영화관에 갈 일 없던 그녀가 한동안 외면하던 영화였다.
‘이걸 이렇게 보네.’
시작부터 엄청난 몰입감에 도희가 숨죽이고 영화 감상에 젖어 있는데.
불쑥 날아온 도하의 손이 도희의 고갤 슬며시 돌렸다.
“저 좀 봐주시면 안 됩니까.”
“지금 보고 있잖아요.”
도하의 손에 갇힌 도희의 두 눈은 물끄러미 도하에게 꽂혀 있었다.
“그 말 아닌 거 아시잖아요.”
씨익 웃는 도희의 얼굴은 도하 손에 의해 그의 얼굴로 이끌려 갔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밀려들어온 뜨거운 열기에 도희의 몸이 스르르 뉘어졌다.
그리고 촛불에 비친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올라타더니 두 그림자는 뜨겁게 겹쳐 갔다.
* * *
머리를 곱게 땋은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바쁘게 걸음을 옮긴다.
“뭐가 그리 급하시오.”
“도사님 사는 곳이 어떨지 궁금해서요! 매일 오르는 곳인데 이런 곳에 동굴이 있다니 너무 신기해요!”
언제나 티 없이 맑은 여인이었다.
“그리 서둘러 걸어가다간 또 내게 업혀 내려가야 할 것이오.”
여인이 서두르는 이유를 도사가 어찌 모를까.
여인의 사정을 알게 된 도사가 귀한 약초를 나눠 준다는 말에 만사 제쳐 놓고 도사를 따라나선 여인이다.
약초를 가져다줘도 됐지만, 그럼 오늘도 종일 산속을 뛰어다닐 그녀기에, 쉼을 주려 굳이 이곳을 데려온 도사의 마음을 여인이 알 리는 없었다.
“그치만…….”
멈춰선 여인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색을 잃은 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얼기설기 엮은 짚신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다 헤져 있었다.
“재촉하는 건 제가 아니라 이 발길인 걸요.”
매일 산을 타는 여인의 발이 빠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 그녀가 지쳐 쓰러질까 걱정이 지나친 도사의 탓이지.
“그리고 도사님이 업어주신다면 더 서둘러서 가야지요.”
참으로 엉뚱한 여인이다.
피식 입꼬리를 올린 젊은 사내는 총총 뛰는 여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여인과 함께여서인지 익숙한 풍경도 낯설게 다가왔다.
이 길의 나무들이 이토록 컸던가.
지저귀는 새들이 이리도 많았던가,
여인이 지나는 걸음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풍성한 잎새들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짹짹.
“도사님.”
* * *
퍼덕이며 나무를 옮겨 다니는 새에게 가 있던 도사의 시선이 다시 여인에게 향한다.
“도사님.”
그가 알던 여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도사니임!!!”
상념에서 깨어난 도사의 눈앞엔 뾰루퉁한 표정의 도희 얼굴이 나타났다.
—쯔읏. 귀 안 먹었다!
움켜쥔 서책에 대고 소리치던 도희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요즘 귀먹으신 거 같은데.”
대답 없는 일이 부쩍 잦아진 도사였다.
—이 놈이! 천지분간 못하니 못 할 말이 없구나.
도사의 부라린 눈 위에 하얀 눈썹들이 거침없이 들썩이며 분노를 표출했다.
“저건 하늘, 이건 땅! 맞죠?”
도희의 고운 손가락이 차례로 위아래를 가리켰다.
도사를 놀리는 도희의 엉뚱한 행동에 도하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다.
—에휴… 내가 뭔 죄를 지… 짓긴 지었네만, 에휴… 이 꼴을 보자고 그리 살았나 보이, 이 꼴을 보자고…….
“도사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리 고민하셔 봤자 답은 하나예요.”
부쩍 말수가 줄고 가라앉아 보이는 도사가 내심 걱정된 도희였다.
“시간이 약.”
도사도 도희가 품고 있는 상처를 모르진 않았다.
도희가 이토록 밝고 당차게 사는 것도 어쩌면 하늘의 복인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르면 뭐든 별일 아닌 일이 될 거예요.”
도희의 말에 도사는 까마득한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을 가리던 빽빽한 잎새들은 어느덧 힘을 잃어 듬성듬성 하늘을 비추고 있다.
—그리되면 좋겠구나. 그리되면…….
“근데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이미 이들이 인적 없는 숲길로 들어선 지도 한참 지났다.
—이 정도면 되었다.
곧이어 서책은 도하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도희의 검지를 차지했던 은가락지는 어느덧 도하 손에 끼워져 있다.
—너도 손을 얹거라.
도하 손에 놓인 빛바랜 양피지 서책 위로 새하얀 도희의 손이 올려졌다.
그 순간, 터질 듯 영롱한 붉은 빛무리에 쌓인 이들은 눈 깜짝할 세 사라졌다.
그리고 이들이 서 있던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나뭇가지 위, 푸른 눈의 까마귀 한 마리가 때늦은 붉은 잔상을 쫓아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