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곧 만나게 되겠구나.
여인의 작고 해진 짚신이 잿빛 동굴 벽엔 걸린 그림 족자 앞에 멈춰 섰다.
“와아……!”
우뚝 솟은 천왕봉, 굵직한 붓이 그려 낸 계룡산 산새 풍경의 산수화는 여인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 그림 도사님이 그리신 거예요?”
새까맣고 풍성한 여인의 속눈썹이 연신 깜빡거린다.
“크흠… 산 아래 저잣거리에서 산 건이오.”
눈 딱 감고 거짓을 고해 볼까도 싶었지만, 그래도 명색에 도사가 여인에게 잘 보이려 거짓을 고할 순 없었다.
“그림도 좋아하시는구나…….”
사는 것이 고됐던 여인은 그림을 이토록 오래 들여다보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림은 그저 그림일 뿐이오. 그대는 항상 눈으로 보는 풍경이잖소.”
도사의 서툰 위로에 여인의 입가엔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음에 저잣거리 나가면 더 유심히 보아야겠어요! 이리 예쁜 줄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잇던 여인의 얼굴에 불쑥 깊은 수심이 차올랐다.
“…혹시 구경한다고 돈을 달라고 하진 않겠죠……?”
힘없는 여인에게 고약한 횡포를 부리는 상인들이 있다 들었다.
홀로 아픈 어미를 모시는 여인의 대우는 오죽할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왈패들에게 쫓기던 그녀를 구해 낸 도사였다.
“고얀 놈들. 또 그대를 괴롭히는 이들이 있다면 내게 말하시오.”
“하지만 제가 어찌… 도사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하여요.”
아무리 신묘한 도술을 부리는 도사라도 멀리 떨어진 여인을 도와줄 방법은 없다.
그저 말뿐인 도사의 호의에도 허릴 숙여 공손히 답례하는 여인이었다.
만약 그날 도사가 이 여인을 구하지 않았다면 이 여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흐음.’
여인을 바라보던 도사의 쓸쓸한 눈동자에 어느덧 빛이 차오르고, 그렇게 그날부터 여인을 위한 도사의 요물(妖物)들은 하나둘씩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 * *
꿉꿉한 공기와 묵은 먼지가 뒤섞인 쾌쾌한 냄새가 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동굴 속 가득 찬 습기가 온몸을 감싸자 힘을 잃은 도희의 몸은 울퉁불퉁한 바닥으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엄살은.
“영단 먹은 날부터 몸이 영 무거운 게…….”
—그것은 네가 고집 부려 안경인가 뭔가 하는 걸 만든 탓이지, 이놈아!
반박할 수 없던 도희는 반쯤 뜬 눈으로 힐끗 도사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고, 영단 하나 더 먹으면 괜찮아질 거 같…….”
서책은 어림없다는 듯 방향을 획 돌려 동굴 깊숙한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쪼잔하시기는.”
엄살이 아니었던 그녀는 정말 한 발짝 뗄 기운도 없었다.
“업히세요.”
불쑥 널따랗고 곧은 도하의 등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저 무거워요.”
“하나도 안 무겁던데.”
“도하씨도 힘들잖아요. 전 잠깐 쉬면 돼요.”
마주 앉은 둘은 울퉁불퉁한 바닥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실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사랑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찰나의 달콤한 보상인 줄도 모른 채.
* * *
“어? 왜 안 보여?”
화면에 표시된 빨간 점을 뒤따라 산길을 걷던 설민기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선다.
‘산속이라 에러 난 건가.’
도희에게 설 기자라 기억되는 설민기는 휴대 전화 화면에 띄어진 프로그램을 껐다 키길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리 만져도 도희의 위치를 표시하던 빨간 점은 나타나질 않는다.
분명 방금까지도 1km 앞 숲길에 찍혀 있던 빨간 점이었다.
“이상한데…….”
둘에게 들키지 않으려 일정 거리를 두고 뒤쫓았지만, 위치를 놓칠 만큼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
민기는 혹시나 도희의 걸음이 빨라 화면에서 벗어난 건 아닐까 싶어 화면 속 지도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세세히 살폈다.
잠시 후, 화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그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번뜩 뜨였다.
“어? 이게 뭐야.”
그의 다급한 손놀림은 지도를 줄였다, 키우길 반복했다.
“오류야, 뭐야. 이 여자 갑자기 왜 여기 가 있어?”
그에게서 한참 떨어진 계룡산 어느 산자락 위에 떠 있는 빨간 점.
아무리 오류라고 해도 몇 분 만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몇 분이 뭔가, 떨어진 거리를 보니 몇 십 분도 모자랄 시간이다.
워낙 깊은 산속이라 도희 전화에 심어 놓은 위치 추적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걸까.
근데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한 시간 전 일직선 숲길에서 도희와 도하의 뒷모습을 똑똑히 확인한 민기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뛰어갔다 쳐도 지금 이 거리 차는 말이 안 돼.’
“…뭐지.”
홀로 덩그러니 숲길에 남겨진 민기의 얼굴엔 의문 그득한 수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도사가 여인을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이곳 계룡산이었다.
하여 절대 이산만큼은 찾지 않으려 했건만.
—‘피할 수 없는 것인지, 기어코 오게 되었구나.’
멍하니 사색에 잠겨 예전의 흔적을 훑던 도사의 뒤로 도희와 도하가 나타났다.
“와! 뭐예요 여긴? 이 그림들이랑 도자기들 다 도사님 거예요?!”
역시나 도희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원형 동굴 벽을 가득히 채운 그림 족자와 도자기의 행렬이었다.
“허어… 이게 다 뭐래…….”
손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나무 선반들이 아슬아슬한 자태로 도자기들을 힘겹게 버텨 내고 있었다.
벌써 몇몇 나무 선반은 썩어 부서지는 바람에 바닥에 널브러진 도자기 파편들을 본 도희가 미간을 찡그렸다.
“허얼… 이 귀한 유물이…….”
도사의 동굴을 두 곳이나 다녔지만, 이처럼 많은 양의 유물은 처음 보는 도희였다.
“도…….”
—친우(親友)의 동굴일세.
도희가 도사를 부르기도 전에 도사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제 도사는 거짓말도 서슴없었다.
“예? 이분은 도사치곤 물욕 꽤나 있으셨네요.”
—크흠… 아름다운 것들을 아끼던 자였지.
한때, 젊은 그가 여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모은 것들이라는 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도사였다.
여인을 잃은 후로 술병을 제외한 공예품은 곁에 두지 않는 그인 것도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어서 챙길 것만 챙기고 서둘러 가세나.
왠지 가라앉은 음성의 서책은 동굴 구석에 놓인 큰 궤짝으로 날아갔다.
도희는 그런 도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닥에 보자기를 깔더니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눈에 보이는 유물들을 하나씩 보자기 위로 쌓기 시작했다.
“근데 도사님 여기서 요물은 뭐예요?”
서책이 열어젖힌 궤짝 속에 있던 물건들은 둥둥 떠올라 삽시간에 펼쳐진 서책 속으로 삼켜졌다.
—꿈도 꾸지 말게나. 임자는 따로 있으이.
“누가 갖는대요. 얼마나 대단한 거면 도사님이 기억하나 해서 물어본 거죠.”
그 순간, 도희의 조그만 손바닥에 가릴 만큼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도희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웬 나무목각상이었다.
‘눈을 왜 저렇게 부릅뜨고 있어.’
그 순간, 목각상에 닿은 시선을 타고 흘러온 싸늘한 느낌이 도희의 목덜미를 스쳤다.
‘어?’
입을 떼려는데 입술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돌리려 해도 눈동자가 꿈쩍 않고 땅에 붙은 발도 죽어라 용써도 한 발짝도 떼어지지 않았다.
‘어… 몸, 몸이…….’
놀란 심장이 터질 듯 쿵쾅대기 시작했다.
‘어?! 도사님 몸이 이상해요!’
툭!
눈앞으로 날아들었던 나무 조각이 보자기 위로 ‘툭’하고 떨어지자, 온몸을 조이던 섬뜩한 기운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목각상과 눈이 마주친 자는 그 자리에 굳어 버리네.
그제야 입술이 떨어진 도희가 입을 열었다.
“으! 소름 돋아. 느낌 너무 이상해요.”
—다른 이에게 쓰더라도 자네도 절대 목각의 얼굴을 봐선 아니 되네.
“실수로 보면요?”
—그 자리에 자네만 멈춰 버리는 게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상황이다.
도희는 상상을 떨쳐내려 몸을 잘게 털었다.
“또 다른 것들은요?”
—말했잖나. 임자가 있다고. 자넨 알 필요 없으이.
‘임자? 도하씨인가.’
항상 정갈한 기운이 넘친다며 유독 도하를 아끼는 도사였다.
“그럼 도사님 이 도자…….”
스스슷—!
일순, 서책이 쏜살같은 속도로 동굴 바깥쪽으로 쏘아졌다.
“도, 도사님……?”
눈 깜짝할 새 사라진 도사에 어안이 벙벙해진 도희와 도하는 멀뚱히 눈만 깜빡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유난히 까만 까마귀가 구름 가득한 새하얀 하늘을 빠르게 가르며 한 줄 선을 긋는다.
그 뒤로 검은 선보다 느릿한 누런 무언가가 바지런히 검은 선을 쫓고 있다.
아무리 전력을 다해 쫓아도 삽시간에 기를 몽땅 소진해 버린 도사가 정체불명의 기운을 따라잡기엔 무리였다.
기어코 끝까지 검은 기운을 쫓던 도사는 그것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순간, 까마득한 아래로 꺼지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 * *
“도사님 정말 제가 골라도 될까요?”
불쑥 눈앞으로 다가온 고운 여인의 얼굴에 가슴을 쓸어내린 도사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크흠… 내 안목보다 그대 안목이 뛰어난 듯하여…….”
매일 갖은 핑계로 여인을 불러내 그 삯으로 약초를 주던 도사는 이젠 하다하다 저잣거리 그림까지 골라달라는 핑계를 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와, 저 저자에서 그림 구경 처음 해봐요! 저기 골목 끝으로 가면 도화원 화원이 그린 그림도 판대요!”
도화원 화원이 저자에서 그림을 판다니.
분명 정신 나간 자의 허풍이거나 사기일 테지만 여인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은 도사였다.
“그런 건 어찌 아오?”
“오는 길에 박씨 주막 아주머니가 그러던 걸요!”
탁주에 물 탄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그놈의 여편네 아는 척 허언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하하, 많이 알아보고 온 모양이오?”
“도사님의 그림 심부름인데 허투루 할 수야 없죠!”
도사보다 앞장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인 여인은 총총거리는 설렌 걸음으로 저잣거리 이곳저곳을 누빈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이 닿는 물건 족족 뒤따르던 도사의 손이 닿아 값을 치렀지만, 여인은 절대 모를 일이었다.
* * *
“도사니이임!”
아득히 꺼져 갔던 도사의 정신을 일깨운 건 불안함을 담아 떨고 있는 도희의 목소리였다.
—…곧 만나게 되겠구나.
그리고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은 도사의 입에서 뜻 모를 말이 흘러나오자 도희의 얼굴 위로 불길한 검은 그늘이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