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03)화 (103/120)

102화 늘 그랬듯이.

“도사님 무슨 일이에요? 우리가 얼마나 놀랬는지…….”

—어찌 찾아왔느냐.

어느덧 온전한 정신이 돌아온 도사는 의문에 휩싸였다.

“이거요…….”

지독하게 차가운 도사의 음성에 저도 모르게 위축된 도희였다.

움츠린 그녀가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있는 것은 도사가 찢어서 준 서책 쪼가리였다.

“해는 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도하씨가 이거 손에 들고 도사님 떠올렸어요.”

서늘하게 굳은 도사의 시선이 도하 손에 껴진 은가락지로 향한다.

“도하씨 손잡고 있었는데 눈 떠보니까 여기 이 숲이었어요. 도사님은 바닥에 떨어져서 그 상태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진정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도사는 도희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홀로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고된 산행이었다.

어렵사리 병실로 돌아온 이들은 지쳐 쓰러지듯 허물어지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와… 도하씨 없었으면 아직도 산 중턱이었겠네. 으, 끔찍해.’

하지만 도하의 기운도 무한은 아니어서 산 아래 등산로부턴 두 발로 걸어 내려와야 했다.

‘그래도 체력이 엄청 좋네…….’

금방 지쳐 떨어진 도희에 비하면 도희 두 배 몫은 거뜬히 해낸 도하였다.

‘도사님은 괜찮으시려나.’

험한 산길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도사를 발견한 후로 도사는 날기는커녕 서책 위로 표정도 띄우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어 보였다.

사실 기운이 없어 못 하는 건지, 무슨 다른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병실로 돌아온 서책은 곧바로 깊은 항아리로 들어가 나오질 않고 있었으니.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것이 예삿일은 아닌 모양이다.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잠잠하니 낮게 깔린 도희의 눈동자가 항아리에 닿은 순간, 심상치 않은 질 나쁜 기운이 등골을 타고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처음 느끼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었다.

*     *     *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같은 시각, 우주에게 불려 나온 백 실장은 불편한 듯 입매를 뒤틀었다.

“형사님이라 죄지은 사람이 감옥에 가지 않아 불편하다는 건가?”

“제가 드린 말씀은 그 뜻이 아닐 텐데요.”

“한 부장, 박 비서 전부 교도소에 있고 마 부장은 죽었고, 부사장도 죽었는데… 너는 왜 여기 있나. 그 말 아니었나?”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잔뜩 비꼬아진 음성에 우주도 옅게 입술을 짓이겼다.

“그들에게 원한 살 만한 사람이나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나 물어보려던 겁니다. 그들과 가장 가깝던 사람이 백 실장님이시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그걸 알면서도 말을 안 했을 거란 생각에서 나온 말이란 거네.”

날이 선 그녀와의 대화는 벽보고 대화하듯, 숨이 막혀 답답함이 몰려왔다.

“매사 그렇게 꼬아서 보십니까?”

“인생이 꼬여 있어서 말이야.”

“자신이 꼰다는 생각은 안 하나.”

“뭐?”

악 다물린 그녀의 잇새로 금방이라도 욕설이 튀어나올 듯했다.

“당신 지금 상황 덕분에 용의선상에 안 오른 줄 알라고.”

백 실장은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서책과 이상하게 귀신같은 도희 때문에 허튼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꺼림칙하고 불편하지만 도희에게 붙어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은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내가 그럴 능력이 있을 거 같아? 강도희면 몰라도.”

그녀도 마 부장과 부사장의 사건에 대해 파봤지만, 이토록 미스터리한 사건은 처음이었다.

“그 도산지 뭔지랑 강도희는 남 속까지 다 읽어도 우리는 걔들 생각 읽을 수 없잖아? 어떻게 알아. 그 이상한 기술들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우주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켜냈다.

“그 둘이 악인 처단인지 뭔지, 나쁜 새끼들 잡으러 다닌다는데, 그쪽이 더 의심스러운 상황 아니야? 죽은 두 놈 조건은 충분하네.”

“하하하.”

결국 크게 웃음이 터져 버린 우주였다.

물론 백 실장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희씨는 아니야.”

“네가 어떻게 알지?”

강도희가 뭐라고.

대체 그 여잔 무슨 복을 타고나서 모두에게 사랑받는지.

“각자에겐 스스로 정한 넘지 않을 선들이 있잖아? 도희씨는 절대 그 선을 넘을 사람이 아니거든. 너는 몰라도.”

툭하고 뱉어진 백 실장의 옅은 코웃음은 신랄한 비웃음으로 바뀌어 갔다.

“단언하지 마. 사람 일은 아무도 몰라. 나도 내가 이렇게 살 줄은 몰랐던 사람이거든.”

그녀는 인생이 망가진 시작점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애초의 기억이 부모에게 버려진 후부터였으니.

“어쨌든 당신은 잘못을 뉘우쳤잖아?”

“내가?”

그녀는 의심이 아주 많은 성격이었다.

“속고만 살았나본데. 너도 너 자신을 좀 믿어 봐. 남들이 널 믿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의 의심에 새로운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정말 누군가 자신을 믿는가, 하는.

*     *     *

“아오, 이 말이 진짠지 가짠지 다 만나 볼 수도 없고.”

늦은 시간, 게시판을 확인하는 도희의 손길엔 미미한 신경질이 묻어났다.

옆 소파에서 곤히 자는 도하가 깰까 나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니, 얘들은 무슨 이득을 본다고 여기에 이딴 글을 쓰는 거야?”

온통 살해 협박에 살인 의뢰에, 도희가 의뢰를 가려 받는다는 소문이 퍼져서인지, 그녀가 해결했다는 사건과 비슷한 글들만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디 차단시켜. 다신 글 못 쓰게.”

“그러다 진짜 그 사람한테 글 쓸 일이 생기면?”

“도희야, 넌 그게 문제야. 애매하게 착한 거. 너 그거 착한 거 아니다? 남 눈치 보는 거지. 내키는 대로 해. 네가 뒷사정을 왜 봐줘.”

“흥. 그럼 나는 아주 못 됐으니까 다 차단해야지.”

“우리 도희 조만간 굶어 죽겠네.”

도희의 애석한 눈망울이 강아를 스친다.

“…네 생각도 그렇지? 사무실 월세는 나가는데 열지도 못하고… 전화는 무음으로 해놓고 받지도 못해… 이거 맞아?”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들로 몸살을 앓던 도희는 결국 전화를 무음으로 돌려놓고 부재중 확인용으로만 사용 중이다.

“스불재. 다 네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니라.”

“그래. 내 죄지, 내 죄야.”

“그 자식들 기사는 봤어?”

종일 산속에 박혀 있던 도희가 기사를 봤을 리가.

“무슨 기사?”

“그 판사 기사도 나고 아들놈이랑 약쟁이들도 났어.”

“뭐라고 떴는데.”

“그 판사 아저씨는 평소 행실도 엉망이더만. 설 기자님이 소문으로만 돌던 비리까지 실었던데? 추문에 휩싸인 판사, 어쩌고 하면서.”

“설 기자도 참 영악한 사람이긴 해. 같은 편이니까 다행이지.”

“근데 그 약쟁이 아들놈들 풀려날 수도 있다는데?”

“엥? 마약 소지해서 현행범으로 잡힌 놈들이 어떻게 풀려나.”

“다 풀려나는 건 아니고 누가 몰아서 뒤집어썼나 봐. 다 자기 거라고. 그 판사가 자기 아들은 관련 없다고 기사까지 냈어. 그 와중에 자기 추문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 하더라.”

도희의 고개가 절로 좌우로 흔들렸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강도희.”

그때, 잠자코 두 여자의 이야길 듣던 백 실장이 끼어들었다.

도희의 시선이 백 실장에게 닿자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조심해. 걔들 악질이니까.”

그들이 풀려났다면 도희부터 찾을지도 몰랐다.

“내가 아니라 걔들이 조심해야지. 내가 더 악질이라.”

자신에게 윙크하는 도희를 보며 백 실장은 진심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싫어해. 이제 적응할 때도 됐으면서.”

다시 도희를 무시한 백 실장의 시선은 창가 너머로 멀리 뻗는다.

그리고 그때, 항아리 속에서 튀어 오른 무언가가 도희에게로 날아들었다.

도희는 둥실둥실 날아온 물건들을 조심히 잡아챘다.

“도사님 설마…….”

—이른 시일에 돌려받을 것이니 헛물켜진 말 거라.

“허얼… 너무 예쁜데요?”

곱게 꼬아진 분홍 꽃 매듭 아래로 작은 꽃 모양의 연분홍 옥 장신구가 매달려 있는 노리개였다.

“이거 보니까 한복 입고 싶어지는데.”

도사가 던져 준 것을 보니 이것도 요물이 분명했다.

‘근데 웬 여자 장신구?’

—위험한 일이 생기거든, 노리개 끝에 달린 술을 잡아당기게.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점점 진한 다홍빛을 띠는 노리개 술은 고운 선의 한복 치마처럼 아주 풍성했다.

“잡아당기면요?”

—내가 가겠네.

도사가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도희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기운 감지 장신구였다.

문제는 도사가 날아서 온다는 것이었지만.

‘어느 세월에… 그것도 이 빌딩 숲 하늘 위를?’

다음 날 뉴스에나 안 나면 다행이었다.

—비상용일세. 비상용. 생명이 위급할 때만 쓰게나.

쓸 일이 많이는 없겠다 싶은 도희는 씁쓸한 듯 입맛만 다셨다.

“이거는요?”

그녀가 잡아챈 또 다른 하나는 노리개와 같은 예쁜 꽃 모양의 연분홍 옥이 장식된 비녀였다.

—자네 무기일세. 그것을 손에 쥐고 찌르게나. 알아서 급소를 찾을 터이니.

그 무엇보다 비녀가 마음에 든 도희 얼굴엔 어느 때보다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손 사장이 서두르자는구나.”

이거였다.

자신을 억지로 집까지 오게 한 이유가.

“말씀 못 들으셨어요? 그 집 따님도…….”

“결혼 날짜 잡혔다.”

우주의 말허리를 자른 우정모는 협상은 없다고 선포하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깰 생각 말아라.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서로 힘 빼지 말자고.”

“그냥 호적에서 파세요.”

못난 아들이 지겹도록 내뱉던 말이라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정모였다.

“그냥 호적에서 파시라고요!”

악을 쓰며 달려드는 우주의 곁으로 그의 어머니가 다가왔다.

그녀는 더는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우주의 두 눈 가득 희게 질린 중년 여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화장기 없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우정모의 새 여자를 결국 알게 된 모양이다.

“하아……”

주먹을 불끈 쥔 우주의 손이 잘게 떨린다.

우주의 핏발 세운 시선이 우정모에게 쏘아졌다.

절대 아비를 보는 아들의 눈빛이라 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네 생각대로 되는 일은 없다. 늘 그랬듯이.”

그렇다.

언제나 그랬다.

이 지옥은 도저히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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