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04)화 (104/120)

103화 나도 고쳐 쓰는 건 취향에 없거든.

“난 이 결혼 거절할 생각 없어요. 자유롭게 살자구요. 어차피 형식적인 거잖아?”

조소 섞인 모아의 말에 우주는 실소를 머금었다.

자유분방하다더니, 여자 망나니가 따로 없다.

오랜 시간 공들여 관리 받은 손톱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미간을 구기며 손톱을 내려다보는 그녀였다.

약속 전, 네일숍에 다녀오느라 늦는다던 모아는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았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결국 우주가 그녀가 있다는 백화점 뷰티 숍까지 찾아오고 나서야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모아는 커피잔을 집다가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과의 결혼이 싫다는 남자보다 네일 아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그녀의 심기를 더 긁는 모양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군.’

우정모도, 손남수도 설득하지 못한다면 우주에게 남은 방법은 몇 개 없었다.

입술을 질근 깨물며 작은 숨을 내뱉은 우주는 결국 마지막까지 몰아 뒀던 말들을 입 밖으로 밀어냈다.

“어떤 자유로움을 말씀하신 건지… 혹시 결혼하고도 이 남자, 저 남자와 구르면서 살겠다는 겁니까?”

모아의 눈 밑에 미세한 경련이 일며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백화점 VIP라운지인 이곳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를 악문 것인지 입꼬리를 씰룩거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표현이 저급하시네요.”

“모아씨 행동만 할까요.”

모아는 평생 들어본 적 없을 법한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눈살만 찌푸릴 뿐 예상보단 담담했다.

“우주씨는 왜 사세요?”

뜬금없는 질문이다.

우주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모아는 말을 이었다.

“다들 태어난 김에 사는 거 아닌가. 보다시피 난 이렇게 태어나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살 뿐이에요.”

한마디로 문란하게 살고 싶고, 살 수 있어서 그렇게 산다니.

자신에 대한 합리화가 아주 잘 된 여자다.

“재밌고 행복하게 살면 그만 아닌가요? 다들 그렇게 살고 싶은데 못 사는 거잖아.”

모든 걸 단정 지어 말하는 것도 우주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하하하.”

모아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던 우주의 입에서 허무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여자와의 실랑이는 시간 낭비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상황 판단이 빠른 그는 포기도 빠른 편이다.

“그럼 혼자 행복하게 잘 사세요.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난 이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아시고.”

오늘 만남은 우주가 그녀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최후의 방법을 쓰고 싶지 않은 그가 마지막 그녀를 설득하기 위한, 그리고 크게 상처받지 않도록 미리 통보하는 배려.

하지만 모든 것은 우주의 기우였다.

손모아는 화를 내면 냈지, 상처받을 타입은 아니다.

‘차라리 잘됐네.’

상처받은 사람보단 화내는 사람 상대가 훨씬 편하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생각을 정리한 우주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여전히 조소 머금은 모아의 비틀린 입술이 느릿하게 열린다.

“강도희… 때문인가?”

문으로 걸어가던 우주의 고개가 모아를 향해 격하게 꺾였다.

삐뚜름하게 고쳐 앉아 다릴 꼰 그녀는 방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커피잔이 입가에서 떨어질 동안 자신을 직시하던 우주의 시선과 눈을 맞춘 모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나, 우주씨 아버지나 이 결혼 포기하실 분들이 아닌 거 아실 텐데. 우주씨 그 정도로 머리 나쁜 사람 아니잖아?”

지그시 뻗어 오는 모아의 농염한 눈빛에 우주의 눈동자엔 황당함이 들어찼다.

이 여잔 자존심이 없는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영악한 건지.

모호한 경계선의 여자.

“나 회사에 욕심 없어요. 관심도 없고… 그리고 내 동생 아픈 거 알죠?”

‘그래서?’라는 뜻을 담아 우주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럼 우리 그룹이 다 누구한테 가겠어요.”

풍성한 모아의 속눈썹이 예쁘게 휘었다.

“우주씨, 지금부터 경영 공부해도 빠듯하겠다. 그죠?”

자신이 이 정도로 봐줬으면 그만 두 손 들고 넘어오라는 웃음이었다.

“동생은 어디가 아픈 겁니까?”

정작 우주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렸지만.

“머리가 아파요. 뇌가 아니라 머리. 정신과 다녀요. 거의 불치병과 같으니까 안심해요.”

동생의 머리가 아픈 것이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웃어 보일 일인가.

게다가 안심하라니, 우주가 경영에 욕심이라도 난 거라 착각한 그녀였다.

모아의 동생이라면 우주도 아는 아이다.

자신 때문에 크게 다칠 뻔했던 모세라는 아이.

버려진 자식이니 어쩌니 하는, 그 어린아이가 직접 입에 담아 올린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손남수는 아들이 아직 어리기에 후계에 대한 논의는 이르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그가 아파 후계를 받지 못할 거란 소문이 잠정 사실이라니.

‘글쎄… 당신보단 그 동생이 더 멀쩡해 보이던데.’

천성이 여자에게 약한 우주는 차마 머릿속에 떠도는 말을 내뱉진 않았다.

“이걸 어쩌죠. 저도 회사 경영엔 관심이 없어서.”

코끝을 찡그리며 해맑게 웃어 보인 우주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모아였다.

“그럼 서로 시간 낭비 그만하고 갈 길 갑시다. 나는 나대로 이 결혼 깰 테니, 모쪼록 모아씨는 지금처럼만 하시고.”

할 말을 끝낸 우주가 차가운 등을 보이며 두 발짝 뗐을 때.

“강도희 그년이 대단하긴 한가 보네. 이 남자, 저 남자 다들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분명 모아의 혼잣말이었다.

우주에게 들리도록 한 말이었지만.

“손모아씨.”

“당신 강도희랑 가망 없잖아?”

서늘한 우주의 말을 되받아친 모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여자한테 홀려서 정직까지 먹었다는 말로는 모자랐나. 흐음… 아무리 내 스타일이라도 남자 고쳐 쓰는 건 내 취향 아닌데.”

지그시 내리깔린 모아의 두 눈은 자신의 손톱을 향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하하하.”

신랄한 비웃음을 흘리던 우주는 그녀에게 조소 깔린 한마디를 남긴 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넌 내 스타일도 아냐. 나도 고쳐 쓰는 건 취향에 없거든.”

우주의 말은 오래도록 모아의 귓가를 맴돌았다.

손톱을 내려다보며 흥얼거리는 모아의 입꼬리가 치솟았다 내려앉길 반복한다.

그녀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상상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리고 우주가 몰랐던 게 있다.

우주의 말보다 더 치욕적인 말들을 숱하게 들어온 모아라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뱉은 자들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하다는 것도.

*     *     *

“지혁씨 많이 아파? 그러게, 반지는 빼라고 말하지 그랬어.”

지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걱정 담긴 모아의 눈빛이 몸서리치게 역겨웠다.

하지만 그 한 톨의 감정 담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아 표정을 잃어버린 지혁이 할 수 있는 건 입을 꾹 다무는 일뿐이었다.

“뭐야,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그녀에게 무차별 손찌검을 당한 건 자신인데 누가 누구한테 화풀이를 한다는 건지.

“나 이제 기분 풀렸는데 자기 정말 대답 안 할 거야?”

더 버티는 건 무모한 짓이다.

“입 안에 피가 터져서 삼키느라 그랬어.”

못마땅한 눈으로 지혁을 흘겨 본 모아는 투정 가득한 말투로 지혁의 품에 몸을 안겼다.

“그러게, 왜 전화 안 받았어. 난 또 자기가 어디 멀리 간 줄 알았잖아.”

“내가 어딜 가. 안 간다고 했잖아.”

어차피 호텔 복도에 깔린 경호원을 뚫고 나갈 방법도 없다.

“자긴 똑똑해서 좋아.”

주제를 알아서 좋다는 말이겠지.

‘자기 또 사라지면 데이트 폭력으로 처넣을 거야. 그리고 나오면 그다음엔 약으로 넣어 줄까? 나야 뭐, 자기가 감옥 가든, 해외로 도망치든 눈에 안 보이는 건 똑같으니까. 근데 내 마음이 편한 건 전자가 아니겠어?’

모아가 한 말을 곱씹으며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뭐, 자기가 영 멀리 도망가 버려서 못 찾겠으면 강도희한테라도 갚아야지. 자기에 대한 내 마음을.’

그렇게 지혁은 모아의 감정 없는 인형이 되어 버렸다.

언제까지 이 삶을 버텨 낼 수 있을지.

눈을 지그시 감은 지혁의 앞으로 미소 띤 도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     *     *

두 손으로 커피잔을 꽉 말아 쥔 얼떨떨한 표정의 선미는 자신 앞에 마주 앉은 남자를 힐끔, 힐끔 쳐다봤다.

짙은 눈썹 아래 길게 뻗은 시원한 눈매와 반듯하니 높은 콧대, 도도하게 닫혀 있는 단정한 입매까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외모에 떡 벌어진 어깨까지 가진 남자는 성격이 어떻든 얼굴만 보는 선미에겐 현실 속 최고의 남자였다.

‘이도하…….’

매일 닳도록 훔쳐보던 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그가 아무리 자신을 냉정히 내쳤어도 저 품에 한 번 안긴다면 모두 털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남자의 곧고 짙은 눈썹 아래를 가득 채운 눈동자에 빛 도는 서늘한 기운이 어서 희끗한 환상에서 깨라는 듯 지독한 현실을 일깨워 준다.

나직이 내리깔린 도하의 시선은 익숙하다.

그에게 풍겨 나오는 도도한 분위기 또한 더없이 익숙했다.

오히려 낯선 건 자신에게 향한 도하의 시선이었다.

그가 선미에게 이토록 곧은 시선을 준 건 처음이었으니.

시리도록 차가운 잿빛 눈동자가 선미에게 꽂혀 왔다.

“휴직계 내셨던데.”

처음이었다.

도하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것도.

‘뭐야, 이 관심은?’

무어라 답할까 달싹거리던 그녀의 입술이 결국 굳게 닫혔다.

강도희를 쫓아다니느라 휴직계를 냈단 말은 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에 휩싸여 시간만 죽이다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를 대려고 입을 떼려는데.

“먼저, 쉬고 계셨을 텐데 불쑥 뵙자고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그래, 이도하는 이런 남자였다.

지나치게 예의 바른 남자.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에게도 절대 선을 넘지 않는 남자.

“괜찮아요.”

너무 새침하게 대답했나?

예상보다 딱딱하게 튀어나온 대답에 선미가 말을 이으려는데.

“그리고 저 그쪽 이름 압니다. 강선미씨.”

“네?”

도하의 입꼬리가 곱게 휘어 올랐다.

그가 같은 부서였던 선미의 이름을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멀뚱히 눈만 깜빡이던 선미는 곧 개선부를 찾아가 소리쳤던 일을 떠올렸다.

분노에 삼켜져 찾았던 그곳에서 자신과 도하가 만나고 있었다며 소리쳤던 일.

그때 분명 도하는 선미의 이름조차 모른다며 되받아쳤다.

당시엔 그의 말보다 비웃음 서린 표정과 질색하던 태도에 더 충격을 받았던 선미였다.

물론 그 분노를 도희에게 쏟아내고 있는 선미는 도하와의 일은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알아요. 거짓말하신 거.”

그가 선미의 이름조차 모를 리 없었다.

같이 프로젝트 진행한 게 몇 갠데.

“거짓말은 아닌데.”

무슨 말이야.

방금 내 이름 안다면서.

“선미씨 이름은 알지만, 잘 모르는 건 사실입니다.”

“그게 무슨…….”

“언제까지 그렇게 사실 건가요?”

“……네?”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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