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딱히 기대하고 나온 자리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머리로는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애써 외면했는지도.
“…갑자기 무슨…….”
선미는 잘게 떨리는 손을 숨기느라 커피잔을 감싸고 있던 손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트렸다.
“원래 말귀를 잘 못 알아들으시나 봅니다.”
선미의 시선이 커피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당당하게 고갤 들고 무슨 말이냐며 따지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들려오는 음성마저 이리 차가울 진데 도하의 표정이 어떨지 볼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 정도 거절했으면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세차게 흔들리는 선미의 두 눈동자는 커피잔을 벗어나 무릎 위에 올려진 자신의 두 주먹으로 향했다.
“헛소문에 대해 말하기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만들기까지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무뚝뚝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거친 말을 쏟아내는 남자는 아니었다.
개선부 남자들도 전부 강도희 편을 든다더니, 도하도 강도희의 여우짓에 넘어간 게 분명하다.
“헛소문 아니에요! 형사부터 사장까지 강도희한테 홀린 남자가 한둘이 아닌 거 다들 아는데! 왜 도하씨만 몰라요?”
도희에게 홀려 함정 수사하다 정직까지 먹은 형사며, 강도희 회사 빽이 사장인 것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그렇게 떠드는데 왜 이 남자만 귀를 닫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걔한테 전부 이용당하고 있는 거 몰라요? 사장 덕에 팀장까지 낙하산 타더니 유명해지니까 탐정인가 뭔가 해서 돈 벌겠다고 사장 버리고 퇴사한 거잖아요. 걔가 도하씨한테는 뭐 해달래요?”
한번 입이 트인 선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떠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강도희 도와줘서 정직 먹은 형사도 예전 실종 때 인터뷰한 형사래요! 그 형사 꼬셔서 단물 다 빨아먹다 버리고 이제 도하씨 만나는 건 알아요?”
언제나 그랬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아, 아니다. 그때 보니까 같이 있던데 설마 셋이 같이 만나요? 강도희가 그러재요? 하긴 걔 잘생긴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애니까.”
소문으론 예전에 퇴사한 문지혁도 강도희랑 만났다던데, 강도희도 자신과 같은 얼빠인 게 분명했다.
“퇴사한 남자랑도 사내 비밀 연애했다던데 보나 마나 뒤에서 다른 남자 만나려고…….”
잔뜩 흥분한 채 말을 잇던 선미의 눈이 자신에게 몸을 당겨 앉은 도하에게 향한다.
테이블에 바짝 몸을 당겨 앉은 도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어서 말을 더 이어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이건 제가 지어 낸 헛소문이 아니라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그 사실은 누가 정하죠.”
“사실을 누가 정해요. 사실은 사실인데.”
“그 머리로 우리 회사는 어떻게 들어오셨나.”
“예?”
선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도하였다.
조소 섞인 비웃음이었지만.
“그럼 저도 내일 사내에 떠돌 사실 하나 말씀드릴까요.”
뇌리에 박힐 만큼 매혹적인 표정이다.
“이도하는 지독한 스토커 짓을 일삼는 강선미의 행동에 질려 부서를 이동했다.”
자신을 욕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보일 일인가.
“아니면 이건 어떤가요. 짝사랑하던 남자를 빼앗겨 눈이 먼 강선미 대리가 남자 애인의 헛소문을 퍼트리다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다.”
차라리 무관심이 나았다.
지금처럼 적개심 담긴 눈빛보다는.
“그러니까 봐주는 건 여기까지고.”
도하의 마지막 말은 이미 너덜해진 선미의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내 앞이든, 도희 앞이든, 당신이 보이는 그날은 우리가 보는 마지막 날이 될 거야. 부디 우연히라도 보지 말자고.”
* * *
“아오, 요 꼬맹이 머리라도 콩 쥐어박고 나올 걸 그랬어요. 글이 너무 현실적이라 지어 낸 건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발을 멈춘 도희가 아쉬움을 담아 허공을 내리친다.
통화중만 아니었어도 양손으로 힘껏 허공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꼬맹이는 아니었다. 도희보다 덩치가 큰, 다 큰 고등학생이었으니.
—도희씨를 거기까지 불러낼 정도의 글이면 크게 될 친구 같은데요?
“제 말이요. 아빠가 자길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만 없었어도… 으! 나도 어쩌다 도사님 닮아가서는 죽인다는 글만 보면 괜히 심장이 덜컹거린다니까요.”
—하하하, 그건 당연한 겁니다. 죽인다는 글 앞에 누가 초연해질 수 있겠어요.
“아니, 다른 글들은 딱 가짜 스멜이 나요. 무작정 누가 나 죽인대요! 저 죽을 거 같아요! 살려주세요! 하는데 이 글은 그게 아니야. 언제부터 가정폭력을 당했으며, 어떻게 당했는지까지 아주 장문의 소설을 쓰셨다니까?”
—글쓰기 소질이 있나 보네요. 후원이라도 해야 하나?
장난스런 도하의 말에 도희의 눈이 가늘어진다.
물론 애석하게도 그 시선은 갈길 잃고 거리를 맴돌았다.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죠. 친구까지 데리고 나와서 내가 빙수까지 사 주고 나왔다니까? 나 삥 뜯겼어요!”
발을 동동 굴리며 심술 난 표정의 도희가 안 봐도 그려지는 도하였다.
—하하하, 그 빙수 제가 갚을게요. 저녁에 두 배로.
“뭐, 굳이 갚으신다면 도하씨한테는 다른 걸로 받을게요.”
—아니면 몸으로 때울까요?
‘이 남자 진짜 누구랑 붙어 다니더니, 하는 짓도 닮아가네.’
“어떻게 때우실 건데요.”
도희도 능글맞아진 도하가 또 싫지만은 않았다.
—예고편은 없어요. 대신 기대하셔도 좋을 거 같은데.
“그럼 기대해 볼게요. 전 하이라이트 돌려보기를 좋아해요.”
도하보다 한술 더 뜬 도희였다.
—하하하, 명심할게요. 그럼 이제 병원으로 가시나요.
“아니요. 나온 김에 한 분 더 뵈려고요. 비산병원에 대해 제보할 게 있다네요.”
비산병원 제보라면 강아가 당했던 일과 비슷한 피해자일 수도 있었다.
혹은 또 다른 피해자거나.
—제보요?
“걔들이 나쁜 짓을 하루 이틀 했을까요. 일단 말 꺼내기 조심스럽다고 꼭 만나서만 이야기하고 싶다길래 약속 잡았어요.”
—같이 가요. 제가 지금 도희씨한테 갈게요.
“매일 조퇴에, 반차에. 도하씨 이제 연차도 없지 않아요? 땡땡이 그만 치시고 일하셔야죠!”
이미 선미를 만나느라 반일 연차를 쓴 도하가 다른 핑계를 대려는데.
“더는 도하씨나 다른 사람들 일상 흔들리는 꼴 못 봐요, 난. 차라리 혼자 죽으면 죽었지!”
—죽는다니. 그런 말을 왜 그렇게 쉽게 하십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여튼 괜히 또 비산이랑 엮어서 다 같이 감옥 가고 고초 겪는 그 꼴 난 못 봐요.”
—전 도희씨 혼자 엮이는 건 더 못 볼 거 같은데.
“걱정 마요. 저도 막 덤비진 않을 거니까.”
* * *
10평 남짓한 공간, 깔끔하고 단조로운 구조의 1인 병실 안은 오늘따라 고요했다.
언제나처럼 병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중년 여인의 표정은 잠시 달콤한 낮잠에라도 든 듯 평온하다.
느릿하지만 여인의 얼굴엔 하루하루 조금씩 생기가 들어차고 있었다.
그 일등 공로는 마른 가지처럼 바싹 마른 여인의 손바닥 위에 놓인 손때 묻은 누런 양피지 서책이었다.
여인의 얼굴에서 누런 책으로 시선을 옮긴 백 실장은 굳힌 입매에 재차 힘을 주었다.
강아가 프로젝트를 마무리한다며 오랜만에 출근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병실에 요상한 서책과 둘만 남은 상황이다.
일에서 빠지거나, 휴직하거나, 방법은 많을 텐데.
인생을 뭐 저리 열심히 사는지 책임감 하나는 대단한 여자였다.
‘미련한 거지.’
혼잣말하며 일하는 강아가 없어서인지, 그녀가 일하면서 듣는 작게 흘러나오는 음악이 없어서인지, 지나친 적막이 흐르는 병실은 온갖 상념을 불러왔다.
우주 형사와의 대화 후로 내내 제멋대로 엉킨 실타래들은 풀리지 않고 그녀를 괴롭혔다.
‘누굴까.’
마 부장과 부사장을 해친 범인은 누구인지.
한 부장을 위협한다는 사람은 누구인지.
박 비서도 만나 봐야 하는 건지.
자신도 위험한 상황인 것은 아닌지.
강도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지.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다라…….’
답을 알 수 없는 고민과 걱정들이 머리와 가슴을 오가며 소용돌이치더니 숨통을 조여 왔다.
“후…….”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답답한 기운은 사라지질 않는다.
상념에 빠져 흐릿해진 시야를 덮친 건 병실을 둘러싼 시리도록 새하얀 순백색이었다.
사방을 뒤덮은 하얀색에 질린 백 실장은 시선을 병실 창밖 멀리 던져 버렸다.
그녀는 흰색을 싫어한다.
특히 텅 빈 하얀색만 보면 색을 잃도록 더럽히거나 검게 덧칠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그래서인가.
온통 흰색에 둘러싸인 요즘,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강도희를 도와 부사장을 끌어내린 것이 진정 옳은 선택이었나 싶은 의구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만약 그때…….’
부사장을 찾아가서 강도희에게 속아 장부를 뺏긴 거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 놓고 빌었으면 지금 어떤 상황이었을까.
여전히 부사장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하면 만지기도 힘들었던 큰돈이 저절로 그녀의 손에 떨어지고 있었을까.
마 부장과 부사장도 살지 않았을까.
적어도 자신이 지금처럼 불안에 떨고 살고 있진 않았을 텐데.
문득 일상을 살고 있을 제 모습이 그려진다.
아무리 비난받을 짓이라 해도 백 실장에겐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이었다.
남이 어찌 보건 그건 제 알 바 아닌.
“쯥.”
멀리 뻗어 있던 백 실장 눈동자는 한층 더 흐릿하게,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밤에는 청춘으로 가득 찬다는 대학로 거리의 낮은 유독 한산했다.
“날 좋네.”
가벼운 걸음으로 햇살 쏟아지는 벌건 대낮의 거리를 걷던 도희는 일순 발을 멈추더니 입술을 야무지게 모으며 눈썹을 씰룩였다.
‘대체 이 주소가 어디야.’
비산 관련 제보인 만큼 조용한 곳에서 만나자는 제보자의 의견은 도희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곳이 대학로인 것은 의문이지만.
‘뭔 건물이 이렇게 많아.’
제보자가 말해 준 주소를 보며 길을 걷던 도희는 빽빽하게 줄지어 늘어선 상가 건물들의 끝자락, 유일하게 아무 간판도 없는 건물을 발견했다.
번지수가 순서대로라면 저 건물일 것이다.
건물 입구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이 그려진 철제 입간판이 덜렁 서 있었다.
사람 키만 한 입간판을 무심히 지나친 도희의 발이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B1이니까 지하겠네.’
입구의 왼쪽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켜져 있는 다홍빛 조명이 끝도 없이 아래로 뻗은 계단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계단을 향해 첫발을 내딛자, 일순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왔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반사적으로 움직인 발은 도희를 계단 끝 검은 철제문 앞까지 데려왔다.
끼익—
그 순간, 철제문이 열리면서 들려오는 쇳소리에 도희의 눈썹이 구겨지며 바짝 모였다.
“안녕, 강도희.”
어둑한 조명을 뚫고 나온 음침한 음성은 낯익었다.
“하.”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