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은밀한 비밀.
너무 안일해진 걸까.
조용한 곳을 원한다던 말과 달리 대학로 거리에 들어섰을 때, 옅게 스친 그 작은 찝찝함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너 보고 싶었는데.”
불쑥 들이미는 남자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불쾌한 공기에 도희는 저도 모르게 고갤 격하게 돌렸다.
‘하, 방심했네.’
같은 실수는 두 번 하지 말자는 게 그녀의 철칙이건만.
“들어와.”
안으로 들어오라는 남자의 고갯짓에 도희는 팔짱을 끼며 몸을 더 단단히 곧게 세웠다.
“우리나라는 정말 살기 좋은 나라야”
남자의 눈동자에 의문이 스친다.
“권력만 있으면 법도 피해 가네. 판사가 능력이 좋긴 좋아. 그치?”
도희의 비꼼에도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옅은 실소만 흘려댔다.
“이 짓 꾸민 게 우리 아빠 때문이구나.”
윤상원 판사의 둘째 아들, 윤지석.
역시, 생각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뭐래. 뿌린 대로 거두는 거지. 네가 약쟁이지, 너희 아빠가 약쟁이는 아니잖아?”
하하, 허탈하게 흘러나오던 웃음소리가 그친 뒤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도희에게 쏘아진다.
“안 무서워?”
찰나의 정적이 공간을 메우다 사라졌다.
“왜 무서워?”
여전히 도도한 도희의 표정은 그가 기대하던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여자들 표정을 즐기는 그에겐 싱겁게 흐르는 상황이 영 아쉽다.
‘장난 좀 쳐볼까.’
장난스럽게 휘던 그의 눈매가 삽시간에 굳어진다.
“똑똑한 척 다하더니,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됐을 리는 없고.”
열린 철제문틈에 비뚜름히 기댄 지석의 싸늘한 두 눈이 도희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딱!
손가락을 튕긴 그는 어린 애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알았다. 시간이 아직 이르구나. 낮에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인가? 그거 착각인데.”
“풉.”
도희의 실소에 삽시간에 웃음기를 지운 그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치솟는다.
“드라마 좀 그만 봐. 진부해 대사가.”
도희는 몸을 지석에게 가까이 움직였다.
“넌 안 무서워? 내 소문 못 들었나 봐.”
“뭐? 너 무당이라는 거?”
“머리는 좋은 줄 알았는데 독해는 딸리나.”
대체 무당이란 단어는 어디서 나온 건지.
“그래 봤자 사기꾼이 말이 많네.”
“사기꾼? 나?”
도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지석 또한 어이없다는 실소를 머금었다.
“사기 쳐서 사람들 돈 뜯고 다니는 게 네 직업 아닌가?”
도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그러했다.
“원래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믿은 것만 믿어. 너도 그렇고.”
도희의 말을 들은 지석의 입에선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고마워. 내가 한 똑똑해.”
“누난 이해력이 딸리나 봐. 지금 상황 이해가 안 된 거 같은데.”
“그럴 리가.”
여유로운 대화가 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희의 온 신경은 방금 걸어 내려온 계단을 향해있었다.
그녀가 이곳을 빠져나갈 유일한 통로.
곧이어 위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인기척들이 도희의 희망을 앗아갔다.
서성이는 발길들이 내려오질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같은 편은 아닌 듯싶다.
‘하여튼 진부한 자식들.’
하는 수 없다.
자칫하면 요물이라도 쓰는 수밖에.
“나도 연약한 여자야. 봐, 내가 힘으로 널 어떻게 이기겠어. 지금 너무 무서워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걸?”
도희가 가느다란 팔목을 과장되게 떨어 보이자, 지석도 과장된 탄식을 내뱉었다.
“넌 그 입만 다물면 완벽한데.”
도희의 발끝에서 시작된 농밀한 지석의 시선이 도희의 얼굴까지 올라왔다.
“외모나 몸매는 딱 내 타입이거든.”
“오우, 눈도 높으셔. 넌 내 타입 아닌데.”
“역시, 그 입이 문제야.”
어느새 차갑게 내려앉은 지석의 눈빛이 도희의 얼굴을 꿰뚫듯 쏘아졌다.
도희는 두 눈에 힘을 주며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늘어난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미 가방에 들어간 도희의 오른손엔 비녀가 들려 있었다.
‘이 비녀… 알아서 급소 찌른다던데 얘 진짜 죽는 거 아냐?’
오히려 지석을 걱정하는 도희였다.
‘에이… 명색에 도사님이 만든 건데 죽기야 하겠어? 끽해야 기절이겠지.’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싶다.
“당하기만 하는 건 내 스타일 아니야. 지금 날 죽일 게 아니라면 덤비지 말란 소리야.”
도희는 악문 잇새로 서늘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내가 정말 죽이면 어쩌려고?”
“그럼 넌 뭐, 살인자 되는 거지. 내가 모르는 사람 만나러 오면서 그냥 왔겠어? 나 여기 있는 거 내 동업자들은 다 알아.”
“…….”
말 한마디로 동업자를 만들어 낸 도희였다.
“아무리 네 능력이 좋아도 이 거리에 있는 CCTV를 다 처리할 순 없을걸?”
“풉.”
‘웃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닌가. 내가 그 정도 나쁜 새끼는 아닌데. 무당이라면서 사람 볼 줄 몰라?”
이게 지금 장난치나.
어느새 도희를 감싸고 있던 지석의 스산한 위압감은 사라진 상태였다.
적어도 대낮에 자신을 골탕 먹인 여자에게 해코지할 멍청한 위인은 아닌 걸로 보인다.
“그럼 나랑 말장난하자고 부른 거니?”
“난 누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부른 건데?”
“내가 너랑 왜 친해져.”
“왜 나랑 친해지면 안 돼?”
얘가 왜 이래.
“난 범법자엔 관심 없어.”
두 눈에 불을 켜고 악인을 쫓는 도사가 있는데 무슨 배짱으로 이런 놈을 곁에 둘까.
“누난 너랑 이렇게 장난칠 시간 없다. 간다.”
아무리 긴장감이 사라졌대도 지석과 단둘이 지하공간에 있는 것은 위험했다.
“비산.”
차갑게 등을 보이며 뒤를 돈 도희는 뜻밖에 두 글자에 계단에 올려진 발을 멈춰 세웠다.
“당하기만 하는 건 누나 스타일 아니라면서?”
고개를 꺾은 도희 시야에 지석의 비틀린 입가에 걸린 신랄한 미소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나도 거기에 갚을 게 좀 있어서.”
* * *
쾅쾅쾅!
쾅쾅!
철제문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흔들렸다.
“문 열어!!”
쾅쾅쾅!
“주야, 혹시 지하가 아니라 위층인 거 아니냐?”
설민기의 말에 우주가 눈을 부릅뜨며 아직 계단에 서 있는 젊은 청년을 쏘아봤다.
“야 약쟁이. 네 친구랑 도희씨 어디 있어? 똑바로 말해. 여기 들어온 거 다 알고 왔으니까.”
찢어진 눈의 젊은 청년 미간에 불편한 세로줄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막 입을 떼려는데.
끼익—
굳게 닫혀 있던 육중한 철제문이 열리며 우주가 애타게 찾던 도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연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적어도 우주가 우려하던 위험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우 형사님?”
우주의 손이 도희를 잡아끌며 제 품으로 당기자, 휘청인 도희의 몸이 우주에게 부딪혔다.
보호심이 앞선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
“도희씨 괜찮아요? 어디 다쳤어요? 무슨 일…….”
“우주씨 손, 손 좀…….”
고갤 숙인 도희의 시선이 우주 손에 꽉 붙들린 제 손목을 향한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주가 손에 힘을 풀자, 도희가 한걸음 물러섰다.
“우주 형사님이 여긴 어쩐 일로.”
도희 뒤를 이어 철제문 입구에 서 있던 지석의 날카로운 음성이 우주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인데. 지금 이 상황은 뭡니까?”
지석이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건 뒤로한 채 우주도 제 말만 뱉어 냈다.
“상황? 누나랑 할 말이 있어서 만난 건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누나란 단어에 반응한 우주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얄미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지석을 보니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윤지석씨는 할 말을 가둬 놓고 하나 보죠? 도희씨 휴대폰도 꺼져 있…….”
“우 형사님.”
지석에게 다가가는 우주를 도희가 막아선다.
“별일 아니에요. 일 때문에 대화할 게 있어서 만난 거예요.”
일이라니.
표면적으론 클럽에서 만난 약쟁이와 증인 사이인 둘이었다.
물론 더 깊이 들어가자면 화정 비리 장부와 관련된 윤상원 판사의 아들 윤지석이지만, 비리 장부에 대해 도희가 말했을 리도, 윤지석이 알고 있을 리도 없는데.
우주가 생각에 잠긴 사이 길어지는 침묵을 깨트린 건 도희였다.
“근데 우 형사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도희 스마트 시계에 긴급 위치 전송을 설정해 놓았지만, 오늘은, 아니 아직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기능이었다.
“아, 그게…….”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설민기는 도희의 위험을 어떻게 알고 자신을 부른 걸까.
도희의 미심쩍은 눈초리는 우주를 향하고, 우주의 번뜩이는 눈빛은 민기를 스쳐 지났다.
“익명의 제보를 받았습니다.”
“예?”
“제가 더 알아볼 테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 주시죠.”
우주에게 뻗었던 시선을 거둔 도희가 고갤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넘어갈게요. 근데 다음에 또 그 제보자가 제보하면 제게도 누군지 말씀해 주세요.”
“예?”
“벌을 줄지, 상을 줄지 고민 좀 해봐야 해서.”
* * *
설민기의 독특한 취향으로 가득 찬 호화로운 인테리어의 개인 사무실.
온통 보라색으로 도배된 이곳은 민기가 닭장처럼 나눠 쓰는 좁아터진 기자 사무실을 못 쓰겠다며 뛰쳐나와 만든 그만의 공간이었다.
우주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곳이지만 여기처럼 보안이 뛰어난 곳도 없기에 둘은 이곳에서 자주 만났다.
“너 도희씨 따라다니냐? 미쳤어? 정신 안 차릴래?”
우주의 꽉 쥔 주먹이 민기의 어깨를 강타했다.
“아야! 우주 이 자식 감 다 잃었네.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폭력을 써?”
민기는 촐싹맞은 신음을 내뱉으며 우주의 주먹이 스친 어깨를 연신 문질렀다.
“아, 그래. 내가 감을 잃었네. 그 입부터 때렸어야 하는 건데. 이리 와.”
인상을 찡그린 우주가 몸을 끌어당기자 민기는 그를 피해 벨벳 소파에서 달아났다.
“너 자꾸 그러면 사람 불러서 내쫓는다?”
“허. 그래. 그렇게 우린 영영 안녕 하는 거지. 아주 아름다운 이별이네. 그치?”
“하아… 주야 난 진짜 도와주는 거라니까? 우리 강도희씨 지금 상황이 어때?”
“뭐?”
“언론 주목받지, 사람들한테 주목받지, 경찰한테까지 주목받고 있잖아?”
흥분한 민기는 열변을 토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뿐이야? 화정 비리 장부 때문에 심기 거슬린 어르신들이 한둘이겠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주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지만.
“그러니까 너라도 관심 꺼라. 너 그거 민간인 사찰이야. 스토킹이거나.”
“무슨 민간인 사찰 식이나.”
“그럼 도희씨가 공인이냐? 이 정신 나간 놈이 여전히 할 짓 못 할 짓 구분 못 하네.”
“오호, 우리 주야가 이렇게 정색한다는 건.”
“닥쳐.”
“뭐가 있긴 있구나.”
“있긴 뭐가 있냐. 뭐가!”
우주의 으르렁대는 눈빛에도 민기의 입가엔 활기 띤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 뭐 아는구나?”
“알긴 뭘 알아. 너 사고치는 게 한두 번이냐? 제발 그냥 가만히 있어.”
“야 너 이렇게 나오면 나도 너한테 말 안 한다?”
“뭘?”
“강도희씨의 은밀한 비밀.”
“뭐?”
“물론 너도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