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08)화 (108/120)

107화 검붉은 기운

우주의 결혼 기사로 인해 강력팀 형사들의 모든 관심은 우주에게로 몰렸다.

우주의 아버지가 국회의원인 것도, 어머니가 굵직한 재벌가의 딸인 사실도 놀랄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이목을 끈 건 우주의 결혼 상대가 비산 그룹의 장녀라는 점이었다.

맨날 살 부딪혀가며 땀 냄새 폴폴 나는 현장에서 함께 뒹구는 동료 형사가 재벌가 장녀와 결혼이라니.

저마다 놀란 기색을 여지없이 표현하며 한마디씩 건네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우주의 표정을 보곤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침묵이 내려앉은 테이블엔 고기 타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귓가를 울렸다.

*     *     *

아침부터 부지런히 해피캐피탈 알바를 마친 도희의 손엔 두둑한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캐피탈 사모님은 은혜 갚는 까치가 분명했다.

아무리 제 아들을 구해 줬다 해도 수고비를 받고 한 일인데 매번 이리 알바비까지 두둑하게 챙겨 주니 도희로써는 감사할 따름이다.

‘딱히 의뢰랄 것도 없는 판국에 이 일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캐피탈 알바비 덕분에 사용도 못 하지만 매달 나갈 사무실 비용들을 생각해도 그나마 속이 덜 쓰렸다.

‘그나저나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글로만 판단하자니 진짜와 가짜를 선별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틈틈이 읽고 있지만, 자극적인 제목 위주로 읽다 보니 보지 못한 글들도 수두룩했다.

‘아무리 차단해도 끝이 없네. 에휴, 오늘은 날 잡고 다 읽어야지.’

양손 가득히 먹을 걸 들고 있는 도희는 비스듬히 기운 어깨에 힘을 주어 병실 문을 열 젖혔다.

“강아야 간식 먹자!”

열린 문틈으로 병실의 고요하고 싸한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들어와.”

도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강아는 하얀 물수건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팔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분위기 왜 이래.’

곁눈질로 강아의 눈칠 보며 병실로 들어선 도희가 속으로 작게 도사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병실 창가에 놓인 항아리로 다가가 힐끔 들여다보니 바닥엔 누런 서책이 고이 놓여 있다.

‘뭐야, 도사님은 왜 대답도 안 하셔.’

여전히 대꾸 없는 도사였다.

‘백 실장은 또 어디 갔어.’

의문을 해결해 줄 다른 이를 찾았지만, 오늘따라 백 실장도 외출한 모양이다.

이럴 땐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란 걸 아는 도희는 소릴 내지 않으려 고양이 걸음으로 천천히 소파로 다가갔다.

“도희야.”

“으,응?”

슬며시 발을 옮기던 도희가 걸음을 멈췄다.

“우리 엄마 식물인간 판정받았어.”

“…어?”

덤덤히 입을 연 강아의 눈망울엔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다.

“자가 호흡도 하고… 뇌 손상도 말도 안 되게 많이 회복됐는데…….”

“…….”

“의식이 돌아오질 않아.”

도희의 눈이 병상에 누워 있는 강아 어머니의 얼굴로 향한다.

볼엔 옅은 붉은 열기가 맴도는 것이 금방이라도 눈 뜰 듯 생기 있는 얼굴인데.

“의사 말로는 이런 게 식물인간 상태래.”

이미 강아 눈에 맺힌 물은 그녀의 볼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도희야, 우리 엄마 어떡해.”

또다시 두 눈에 맺힌 눈물이 흘러넘침과 동시에 강아가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아…….”

콧등이 시큰하다싶더니 목에서부터 화끈한 열기가 솟아오른다.

복받쳐 오른 열기는 더 뜨겁게 달아올라 온몸을 휘감았다.

“…곧 깨어나실 거야. 회복되고 계시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응?”

강아 곁으로 다가간 도희는 떨리는 목소리와 달리 세상 부드러운 손길로 강아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정말 다 괜찮아질 거야.”

그녀들의 눈가에서 시작된 뜨거운 물줄기는 심장까지 가득 적시고도 오랜 시간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     *

오전 내내 모습이 보이지 않던 백 실장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도하와 함께 병실에 나타났다.

분명 오전에 회사라며 통화까지 한 도하였다.

도희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한발 앞서 병실로 들어서던 백 실장이 붕어눈이 된 두 여자의 몰골을 보고 잠시 흠칫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곧 알 만하다는 듯 표정을 지운 그녀는 도희를 무심히 지나친다.

그리고 도하도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도희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며 작은 고갯짓을 보냈다.

지그시 응시하는 그의 다정한 눈빛에서 포근한 위로가 느껴지는 바람에 담아 뒀던 물음도 금세 잊혀졌다.

탁!

곧이어 서책이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도하에게로 날아들었다.

쏜살같이 날아온 서책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든 도하는 익숙한 동작으로 서책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언젠가부터 부쩍 가까워진 도사와 도하였다.

“잠시 도사님과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의문이 담긴 도희 눈빛에 대한 도하의 답이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한 도희는 별말 없이 둘을 배웅했다.

서책과 도하가 병실을 나서고, 잠시 후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백 실장마저 다시 자릴 비웠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키가 도희 반만 한 귀여운 바가지 머리의 왜소한 남자아이.

지나치게 창백한 피부가 눈에 띄는 아이였다.

“어? 모세야.”

아이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강아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도희가 먼저 모세를 맞이했다.

“반갑네, 꼬맹이.”

어린아이를 귀찮아하는 강아가 내치지 않고 상대하는 유일한 아이.

“이리 들어와.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도희는 병실 문틈에 서서 주뼛대고 있는 모세를 소파로 데려왔다.

“사람들한테 물어봤어요.”

“응?”

“…누나가 힘들 거 같아서요.”

우물쭈물하지만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 하는 아이.

사람들에게 물어 이곳에 왔다는 건 이 작은 아이도 무언가를 아는 걸까.

설마 우리와 비산병원에 관한 기사라도 읽은 걸까.

재벌가 아이들은 크는 환경도 남다르다던데 이 아이도 그런 걸까.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과 얽힌 수많은 비리와 의혹들.

이 작은 아이가 상황을 이해했다고 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현실들이라 도희는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물론 다른 말로는 이 아이가 이곳을 찾아온 게 설명이 되지 않았지만.

“모세 누나들 걱정도 하고 너무 착하네. 주스 먹을래? 밥은 먹었어?”

애써 무덤덤한 척 냉장고 문을 여는 도희와 달리 강아는 뚫어지게 모세를 응시했다.

“네. 먹었어요.”

차분한 대답이 흘러나온 아이의 발은 소파를 떠나 강아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병상에 다다른 모세가 내민 고사리 같은 손이 강아 어머니의 손위로 얹어진다.

저 아이가 정말 이 상황을 이해한 걸까.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찾아온 걸까.

‘설마…….’

부디 아니길.

저 맑은 눈동자가 알기엔 너무 가혹한 현실이지 않나.

도희가 모세를 바라보며 사념에 잠긴 사이 강아마저 병원 주차장에 세워 둔 차가 접촉사고가 났단 전화를 받고 잠시 자릴 떠났다.

*     *     *

“……희!”

정신이 몽롱하다.

“…도희!”

몸을 흔드는 거침없는 손길에도 무거운 눈꺼풀은 쉬이 떠지질 않는다.

“강도희!”

앙칼진 백 실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도희는 아득하게 꺼져가는 정신을 바짝 붙들어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았다.

‘…잠들었나 보네.’

눈물이 마르도록 울어 재꼈으니 진이 빠질 만도 하지.

‘으.’

정신이 듦과 동시에 지독한 두통이 밀려든다.

“전화 받아.”

흐릿한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자 눈앞에 들이 밀어진 휴대폰이 들어왔다.

어느새 돌아온 건지, 강아도 맞은편 소파에 누워 새근대며 자고 있다.

‘모세는…….’

“전화 받으라고.”

막 잠에서 깬 도희가 기억을 더듬을 틈도 없이 백 실장의 목소리가 그녀를 재촉했다.

“누군데?”

“받아보면 알 거 아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애써 들어올린 도희는 백 실장의 휴대폰을 겨우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도희씨 급해서 백 실장한테까지 전화했습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자느라 진동 소릴 못 들은 모양이다.

“우 형사님 무슨 일…….”

—지금 여기로 좀 와주실 수 있을까요?

급박한 목소리에 덩달아 도희도 조급해졌다.

“거기가 어딘가요?”

*     *     *

살인 사건이란 말에 도사와 함께 오려 했지만, 급박한 우주의 목소리에 재촉당한 도희는 돌아오지 않은 도사를 기다릴 새도 없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도희씨!”

도희가 이제 막 새하얀 2층 주택 건물 앞을 가로막은 폴리스라인에 도착했을 때였다.

우주의 손짓 한 번에 폴리스라인을 지키던 경찰들은 도희를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주택 대문으로 들어서자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살인 사건 현장이라니.’

온갖 센 척은 다 한 상태지만, 평범했던 그녀가 언제 죽은 사람을 본 적 있었겠나.

‘심호흡해. 괜찮아. 여기 봐. 나 말고 사람도 많잖아.’

지금껏 자신이 귀신만 무서워 한다 믿어 왔던 사실을 모조리 뒤집어야 할 판이다.

‘으, 어떡해! 너무 무섭잖아!’

영화에서나 보던 흰 방진복을 입은 과학수사대 요원들이 양손 가득 장비를 들고 집 밖으로 나오고 있다.

“도희씨 들어오셔도 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대강 증거 수집은 끝난 모양이다.

“준비됐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혼자가 아니라는 점.

“후…! 이 정도면 된 거 같아요.”

짧게 심호흡을 뱉은 도희는 미리 쓰고 있던 안경을 바짝 끌어 올렸다.

“바로 2층으로 올라갈 겁니다. 1층은 보지 마세요.”

도희가 살해 현장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한 우주의 작은 배려였다.

역시 작은 거 하나도 놓치지 않는 세심한 남자다.

“네.”

“2층으로 올라가면 피해자 가족들 전부 모여 있으니까 수상한 사람은 얼굴이나 입은 옷이라도 따로 기억해 두세요.”

주변 신경은 쓰지 않고 걱정 가득 담긴 시선으로 자신만 살피는 우주를 보니 없던 용기도 솟아났다.

“네. 너무 걱정 말아요. 보기만 하는 건데요 뭘.”

미소 지은 도희가 쓰고 있는 안경다리를 톡톡 치고 나서야 우주는 먼저 2층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1층 내부를 보지 않기 위해 계단에 시선을 고정한 도희가 중간쯤 올랐을 때.

누군가 목이 터져라 오열하는 소리가 아래층까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도희의 발이 2층에 다다르자 안경 낀 도희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도희는 안경을 고쳐 썼다.

“허.”

그러자 그녀 앞엔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지독한 검붉은 색 덩어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 채 폭발하기 직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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