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09)화 (109/120)

108화 살의

“허!”

눈앞을 뒤덮은 넘실대는 검붉은 기운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 이게 무슨.’

소파에 앉아 통곡하는 중년의 여인과 옆에서 여인을 달래는 젊은 여자.

모녀 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초연한 표정으로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남자와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청년.

‘둘 다 아들인가?’

아마도 한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저마다 표출하는 중이었다.

‘근데…….’

이들의 온몸을 둘러싸다 못해 2층 전체 공간을 메워 버린 이 검붉은 기운은 뭐란 말인가.

짧게 숨을 뱉으며 긴머리를 쓸어올린 도희의 어둑한 눈길이 우주에게 닿자, 그의 표정도 덩달아 낮게 가라앉았다.

도희의 표정만 봐도 그녀가 뭔가 알아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증거가 있을까?’

섣불리 말을 했다간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

“우 형사님.”

눈치가 빠른 우주는 도희를 거실 옆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어떻게 된 상황이죠?”

“피해자는 62세 남성. 후두부 둔기 피습으로 인한 사망인데 피해자 가족들 말로는 도둑으로 추정된답니다.”

피해자는 가족들의 아버지였다.

“도둑이요?”

“예. 사건 당시 피해자 아내분과 따님이 2층에 있었답니다. 우당탕하는 소음을 듣고 내려왔더니 피해자는 이미 사망한 상태고 도둑은 도망친 거 같다고요.”

“도둑인 건 어떻게 알아요? 물건이 없어졌나요?”

“예. 귀중품 몇 개가 보이지 않는다는데 추후 상세 물품 다시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근데 이상한 게 도둑이 너무 어설프단 말이죠.”

“어설프다니요?”

“1층 침실과 서재, 화장실까지 다 엎어 놓고 드레스룸 명품 빽들까지 전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더군요.”

“그게 어설픈 건가요?”

“대낮에 잠입한 도둑이 조용히 귀중품만 훔쳐서 나가도 모자를 시간에 뭐하러 물건을 바닥에 떨어트릴까요? 굳이 소음이 새어 나가는 위험성을 감수하고.”

“너무 인위적이다?”

“예. 그리고 대문에 설치된 보안 카메라 업체에서 영상 받았는데 이것 좀 보십시오.”

베이지색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회색 추리닝 차림의 남성이 큰 가방을 메고 문을 나서는 장면이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잔데 이 옷들 죄다 명품입니다.”

“도둑 주제에 돈도 많네요.”

“이 집 큰 아드님 말로는 도둑이 본인 옷을 훔쳐 입고 나갔답니다.”

“예?”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씀하시더군요. 마치 선수 치듯이.”

그러고 보니 영상 속 도둑이 입은 옷은 도둑에겐 다소 커 보였다.

“더 이상한 건 뭔지 아십니까.”

옅게 실소를 흘린 우주는 어이없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큰 아드님 방은 2층입니다. 도둑이 털지도 않은.”

“도둑이 1층만 턴 건 확실한가요?”

“예. 따님이 내내 2층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니 못 볼 수가 없죠. 2층에선 없어진 물건들도 없다고 했고요.”

“그럼 도둑은 그 옷가지들을 어디서…….”

“본인들도 모르겠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흐음… 굳이 먼저 그런 말을 했다라…….”

도희는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사건 당시 어머님과 따님은 2층에 있었다면 나머지 두 분은요?”

“아드님 두 분은 사건 당시 외출 중이셨고 소식 듣고 뒤늦게 오셨습니다.”

“얼마나요?”

“저희가 도착하고 나서 왔으니까… 집에 있던 어머니와 따님 증언대로라면 사건 발생 후 두 시간쯤 지났겠네요.”

“흐음…….”

도희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도희씨가 본 상황은 어떤 건지.”

이미 안경에 대해 알고 있던 우주가 도희를 재촉했다.

“용의자는 전부 다예요. 저 가족 싹 다.”

“예?”

“분명 도사님이 검붉은 기운은 살의라고 하셨어요. 근데 지금 저들 모두 검붉은 기운이 온몸을 둘러싸고 있어요. 특히 저 젊은 여자.”

“막내 따님요?”

“소름 끼치는 진득한 기운이 막 흘러넘치는데. 으.”

느릿하게 흐물거리는 검붉은 덩어리에 삼켜진 여자의 모습이 잔상처럼 눈앞을 스친다.

상상만 해도 속에서 올라오는 역한 기분에 도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가족이 전부 살인을 공모했단 말씀이신가요?”

“그건 모르죠. 누군가 살인을 주도하고 나머지가 덮어 주는 건지, 아니면 다 같이 살인을 공모한 건지는.”

“뒤늦게 온 아드님 두 분도 관련 있단 말씀이시죠?”

“거실에 있는 넷 다 관련 있어요. 그건 확실해요.”

검붉은 기운의 농도는 달랐지만 넷 다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혹시 아버지를 죽인 범인에 대한 살의는 아닐까요?”

“정말 모두 관련 없다면 저 사람들 입장에선 범인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건데 슬픔보다 살의를 먼저 느낄까요? 넷 다?”

많은 피해자를 만난 본 우주가 봐도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피해자 가족들에게 우선적으로 찾아오는 감정은 가족을 잃었다는 막연한 슬픔.

“하… 이런 경우 증거가 있어도 까다로운데. 정말 가족이 모두 가담한 경우라면 더더욱.”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에 우주는 아랫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짓이겼다.

묘하게 이상한 사건이라 도희를 부르자는 서 팀장의 말에 동의한 우주였다.

“별 수 없죠. 현장에 다른 증거나 주변 CCTV 증거들을 더 확인해 봐야겠네요.”

도희의 말대로라면 가족의 증언은 모두 엉터리란 말이었다.

그렇다면 믿을 건 현장 증거나 꾸미지 못하는 외부 증거들뿐.

“확인해 보죠.”

“예? 방법이 있습니까?”

가뜩이나 커다란 우주의 갈색 눈동자가 더욱 커다래졌다.

“우 형사님은 맞장구만 잘 쳐주세요.”

이제 사람 낚는 데에는 도가 튼 도희였다.

*     *     *

도희가 거든 건 단 몇 마디에 불과했다.

“당신이 죽였지.”

막내딸을 향해 내뱉은 한마디.

“당신들도 다 알잖아. 도왔으니까.”

나머지 가족들을 향해 쏘아붙인 한마디.

“기사 못 봤나 본데. 내가 사람들 속마음을 좀 읽거든.”

그리고 무슨 헛소리냐며 고함지르는 큰아들을 향해 뱉은 한마디.

기사에 마치 도희가 특별한 무당인 양 타인의 생각을 모조리 읽는 것처럼 쓰인 것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무슨 개소리야!!!”

뒤이은 막내딸의 발작.

“난 아니야!!”

악에 받친 그녀의 비명과 함께 모두가 날뛰기 시작했다.

“조용!! 그 입 닥쳐”

도희를 쏘아보던 첫째 아들은 막내딸의 입을 막으려 소파로 달려들었다.

“준우야, 너도 그만해! 그만!!”

그리고 중년의 여인이 그 앞을 막아선다.

“아으! 엄마도 저 정신 나간 년 좀 그만 감싸!”

“뭐?! 누가 누구보고 정신이 나갔대! 오빠나 잘해 오빠나! 왜 이제 와서 내 탓이야?”

“어. 다 너 때문인 거 몰랐냐? 우리 집엔 너만 없으면 된다고. 너만!”

“둘 다 그만!!”

모두의 시선이 중년의 여인에게로 모였다.

“손님들 보시는데 이게 무슨 추태들이니!”

‘손님?’

“저희 애들이 오늘 워낙 큰일을 겪어서 경황이 없네요…….”

“엄마……..”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선 여인이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우주와 사람들을 향해 허릴 숙여 보였다.

여인의 옆에서 그녈 부축하는 막내딸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다.

“저희는 이제 가도 됩니까? 조사는 다 끝난 거 아닙니까?”

첫째 아들의 물음에 답한 건 도희였다.

“한시라도 급히 자리를 피하고 싶으신가 보죠?”

남자의 미간에 진한 세로 주름이 생겨났다.

“하. 형사님 저 사기꾼은 경찰도 아닌데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남자도 도희의 기사를 보긴 본 모양이다.

그것도 부정적 기사만 골라서.

그의 손가락질에도 도희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잠시 몇 가지 질문에 협조 좀 해주시죠.”

우주의 입에서 나긋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경찰도 아닌 사기꾼의 질문에 우리가 왜 대답해야 하냔 말입니다.”

아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뾰족했다.

“불리하시면 대답 안 하셔도 되는데.”

남자는 도희에겐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상종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요. 오늘은 어머니 몸도 안 좋으신 거 같으니 이만하시죠.”

‘뭘 이만해. 이제 시작인데.’

“불리하시다는 말씀이시죠? 아무 관련 없다면 왜 입을 다무시는 걸까요. 이해가 안 되네.”

“야 너 같은 사기꾼한테 내가 왜 대답해야 하냐고.”

남자는 다혈질 기질이 다분했다.

도희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를 막아서려던 우주에게 도희는 그냥 두라는 눈짓을 보냈다.

“당신이 죽였어?”

“미쳤냐?”

“당신은 알잖아. 누가 죽인지.”

“모른다고!”

대답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스산한 검은 물결이 출렁이며 뿜어져 나왔다.

“알잖아. 왜 모르는 척해.”

남자에게 다가간 도희는 그와 닿을 듯한 단 한 뼘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래서 네가 죽였냐고.”

“난 아니라고!”

그 순간, 남자를 둘러싼 검붉은 기운은 한층 더 어두운 흑빛에 삼켜지더니 미친 듯이 잘게 출렁였다.

도희는 도사의 말을 떠올렸다.

‘거짓을 고하는 자가 있다면 그 기운은 흔들림과 동시에 서서히 어두운 빛으로 변할 게다.’

“너 맞네.”

“아가씨 우린 아니에요.”

중년 여인의 무거운 기운도 진한 먹색으로 물들더니 아주 잘게 흔들렸다.

“아주머니, 경찰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여인을 둘러싼 먹색 기운만큼 여인의 눈동자도 떨리고 있다.

“증거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나 본데.”

도희의 서늘한 시선이 가족 모두를 훑고 지난다.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아요.”

그리고 도희의 발길은 소파로 움직였다.

“뭐, 계획적 살인이든 우발적 살인이라 우기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누구보다 크고 역한 덩어리에 삼켜져 있는 막내딸에게로.

“자수하면 형량은 줄어들 거예요. 자수하실 거면 오늘 안에 하세요.”

그리고 막내딸에게 쏘아지는 도희의 날카로운 시선.

“되도록 빨리.”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막내딸은 고갤 피한 뒤 애꿎은 가죽 소파만 쥐어 잡았다.

“제가 이미 증거는 찾은 거 같으니까.”

도희가 마지막 쐐기를 박는 한마디를 내뱉자.

“사고였어요!

거실에 주저앉아 흐느끼던 작은아들이 꺼낸 한마디로 사건의 전말은 한 겹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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