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피해자
증거를 찾았다는 도희의 말은 거짓이었다.
한데 그 거짓이 도화선이 된 걸까.
“전부 사고였다고요!!”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선 작은 아들은 결백을 주장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뒤늦게 온 가족이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말문이 트인 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들 그냥 말해! 사고라고! 우리도 어쩔 수 없었잖아!”
큰아들과 언성을 높이며 모든 걸 실토한 작은 아들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바닥으로 늘어졌다.
조용히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형사들은 서 팀장의 손짓에 따라 가족 모두를 경찰서로 연행해야 했다.
서로 연행된 그들은 조사가 진행될수록 모두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저 남자가 가만히 있었다면 이 사건 해결됐을까요?”
지 순경이 말한 남자는 작은 아들이었다.
“보안 카메라 사각지대 허점까지 이용해서 꾸며낸 짓인데 안 걸렸겠지.”
시작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막내딸의 반항.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사고.
아니, 막내딸은 밀쳐낸 아버지가 혼자 넘어지면서 트로피에 머리를 박아 일어난 사고라고 하지만, 그녀를 감싼 검붉은 기운들은 본 도희는 고의적인 살인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일은 가족 모두가 바랐던 일이었던 걸까.
“에휴.”
끝내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가족 모두 도둑으로 꾸며내자는 큰아들의 의견에 따라 움직였다.
큰아들의 옷을 입고 도둑 행세로 집을 나선 작은 아들은 보안 카메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담을 통해 다시 집으로 돌아와 큰아들과 함께 외출했고.
어머니와 막내딸은 그들의 알리바이와 도둑을 만들어 내기 위해 거짓 증언으로 말을 맞췄다.
‘진짜 사고였으면 바로 경찰이나 구급차를 불렀겠지.’
사람들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아들이 모든 걸 자백했다고 생각할 테지만 도희 눈엔 작은아들이 제일 영악했다.
끝까지 사고라고 우기던 그 모습.
‘가족이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자책하듯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변명에 급급한 모습.
경찰들은 가족의 말처럼 사고라 여기는 듯했다.
아니, 경찰에게 그들의 세세한 속마음의 진실까지 구분해 낼 능력은 없다.
결국 이 사건은 사고로 결론 날 가능성이 컸지만 더는 도희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하긴 뭐, 나설 방법도 없고.’
도희가 보는 기운이나 도사가 듣는 속마음들은 증거가 될 수 없을 테니까.
경찰서까지 동행한 도희가 허탈한 마음을 안고 돌아서려는데 복도를 메운 형사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허, 거참 희한한 일이네.”
“저도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난 지금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어.”
“우 경위는 무섭지도 않나?”
“우 형사님은 저희랑 간 크기도 다른가 봅니다.”
한마디씩 거들던 강력팀원들은 가까워진 인기척이 도희인 걸 보고 흠칫 놀라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물론 한 사람, 지 순경만은 예외였다.
“아니. 막 속마음 듣고 그런 건 아니라면서 어떻게 아신 겁니까?”
덕분에 분위기가 어색함에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그냥 감으로 찔러본 건데 알아서 불던데요?”
“하, 하하…….”
얼빠진 이 경위의 턱이 절로 쩍 벌어졌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흥분감을 감출 길이 없던 박 경위가 목청을 높이자, 복도 끝에서 다가오던 서 팀장에게서 주의의 눈짓이 쏘아졌다.
“오늘 여러모로 신세를 졌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곁으로 다가온 서 팀장의 인사에 도희도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니에요. 형사님들이 고생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
엄청난 사건을 해결하고도 참으로 침착한 아가씨다.
“밤이 늦었으니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서 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주가 나섰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서 팀장 말중 ‘다음’이란 단어에 살짝 고개를 기울인 도희는 별생각 없이 우주와 서를 나섰다.
창가에 선 서 팀장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우주의 차를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가족 공모 살인이라니. 또 한참 시끄러워지겠구만.”
기자들한테 시달릴 생각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마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찡그린 그의 얼굴엔 왠지 모를 화색이 돌았다.
* * *
퇴근 중이던 의사는 환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환자분 제 목소리 들리세요? 들리시면 눈 두 번 깜빡여 주세요.”
병상에 누운 여인의 눈이 천천히 감았다 뜨인다.
병색이 짙은 뼈만 남은 팔다리와 달리 여인의 얼굴엔 옅게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어… 손가락이나 발가락 움직여 보시겠어요?”
“움, 움직였어요! 의사 선생님 여기요!”
흥분된 목소리의 강아가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의사는 병상에 누워 있는 여인에게 재차 물었다.
“환자분 옆에 있는 이분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강아의 얼굴을 확인한 여인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여인의 입술이 작게 달싹이지만 힘겨운 듯 끝내 떨어지진 않았다.
“흐음…….”
“선생님…….”
의사의 얼굴에 떠오른 난감한 기색에 그를 지켜보던 강아와 도희의 얼굴에도 근심이 드리웠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의식도 멀쩡히 돌아오신 거 같은데…….”
평소라면 식물인간이라 진단 내린 환자가 회복해 깨어난 것을 기뻐해야 마땅하겠지만 복잡한 상황에 의사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우선…….”
얼마 전까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환자.
이전 병원에서도 오진이다 뭐다 한바탕 떠들썩했던 환자다.
그런 환자에게 식물인간 판정 내린 것이 오늘 아침인데 저녁에 바로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다니, 의사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잘난 비산 병원에서도 난리를 친 보호자들인데 자신에게 어떤 불똥이 튈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어… 음… 환자의 의식이 잠시 돌아온 건 맞지만… 일시적인 걸지도 모르고… 다른 문제는 없는지 검진도 해보고… 또 추후 경과를 지켜본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소 확신에 찬 말투로 설명해 주던 의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퍼억—
툭!
그 순간, 의사의 뒤통수로 날아든 물건 하나가 소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눈이 황당함으로 물든 의사는 뒷머리를 문지르며 물건이 날아온 방향을 쏘아봤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백 실장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갈색 항아리 옆에 서 있던 그녀는 옅게 실소를 흘리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양피지 책에 시선을 줬다가 금방 거두었다.
“쏘리. 파리가 날아다니길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근데 나도 피해자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그녀의 영문 모를 변명에 의사의 얼굴은 더 험악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봐요.”
의사의 쏘아붙임에도 어깰 으쓱인 백 실장은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다.
—의사 양반이 오진했다 생각하지 않으니 검진인가 뭔가나 행하라고 전하게.
책이 스스로 날아들어 부딪힌 거라 말한들 누가 믿을까.
‘웬일로 과격한 방법을 쓰셨대.’
의사의 속마음을 듣기 위한 도사의 방법이었을 테지만 평소의 도사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남자는 백 실장에게 보낸 시선을 거두지 않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의사 선생님 화 많이 나셨네.’
일단 그부터 진정시켜야 한다.
“선생님 저흰 선생님이 오진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 뭐 그러시겠죠.”
비꼼이 가득한 음성.
그는 흥분했는지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지금 정말 기적 같은 상황인 거죠? 필요한 검사가 있다면 검사부터 받고 싶은데…….”
백 실장을 향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희에게로 옮겨진다.
“제가 어련히 안 해드릴까 봐요?”
뿔이 단단히 나셨네.
“방금 친구의 행동은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공손히 허릴 숙인 도희가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저희가 병원에서 겪은 일들이 워낙 많아서요. 친구가 다소 예민하게 굴었던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팔짱을 끼고 창가에 도도히 기댄 백 실장은 그런 도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특히 ‘친구’라는 단어에 그녀의 눈썹이 격하게 꿈틀거렸다.
물론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저흰 의사 선생님 믿어요. 믿지 못한다면 또 병원을 옮겼겠죠. 어머님이 회복하신 것도 전부 선생님이 잘 돌봐 주셨기 때문 아닌가요?”
“크흠……”
작게 헛기침은 한 의사는 어색하게 입매를 굳혔다.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회복되신 거 저희도 알아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어찌나 입 발린 소리를 잘하는지.
도희를 삐죽 흘겨본 강아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도희의 화사한 미소에 반응하지 않을 남자는 없었다.
마지못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의사는 의사로서의 소견을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기운의 파동이 심상치 않으이. 난 당분간 이곳에서 경과를 더 지켜봐야겠네.
어찌 된 영문인지 다시 잠든 강아 어머님은 억지로 깨어 봐도 일어나질 않으셨다.
의사 말론 다시 의식을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단다.
잠시 의식을 되찾은 일도 자신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도사님이 신경 써 주시면 저야 고맙죠. 대신 악인은 제가 열심히 쫓아 다녀볼게요.”
—말은 잘하는구나.
“오늘도 사건 해결하고 왔다구요.”
—얻어걸린 것이겠지.
칭찬엔 왜 이리 인색하실까.
“근데 그냥 이렇게 나쁜 놈 잡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세상에 나쁜 놈이 어디 한 둘인가.
—때가 될 때까진 그리 행하거라.
‘맨날 그놈의 때, 대체 그때가 언젠지.’
—쯔읏, 망아지 같은 것이 네가 가진 능력이 어떤 것인 줄도 모르고.
“예예. 거리에 나가서 안경이라도 끼고 있어야겠네요. 또 쓰러지든, 말든!”
—여태 가지 않았느냐?
“아오.”
도희가 발길을 옮기자 나직한 저음이 그녀의 발길을 잡아 세운다.
—밤이 깊었으니 금일은 이만 쉬거라
“쉴 시간이 어디 있나요. 한 놈이라도 더 잡아야지.”
—그럼 그리하거라.
아침보다 더 기운 없는 목소리의 도사였다.
“근데 도하씨랑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자넨 몰라도 되이.
“이참에 저 말고 도하씨로 갈아타시려고요? 그건 아니지 않나.”
—마음에도 없는 소린 말 거라. 그 자에게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을 터이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서로 비밀은 만들지 말자고요.”
도하를 만나 단단히 추궁해야겠다고 다짐한 도희는 무거운 발길을 옮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