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11)화 (111/120)

110화 불청객

“오늘은 침대에서 편히 주무세요.”

이젠 앞치마를 두른 도하의 모습도 익숙했다.

“그럼 침대 말고 어디서 자요, 나?”

식탁에 놓을 앞 접시와 젓가락을 정리하던 도희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병원에서 자느라 피곤했잖아요. 오늘은 편하게 주무세요. 안 괴롭힌단 말이었습니다.”

“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괴롭혀 달라고 찾아온 건데.”

눈을 가늘게 뜨며 뚱해진 그녀의 표정에 도하의 입꼬리가 예쁘게 치솟았다.

“그거 위험한 발언인데.”

“원래 스릴을 즐기는 타입이라.”

탁!

“그건 제 타입이네요.”

“도하씨도 제 타입이에요.”

쏟아지는 도하의 농밀한 시선에도 도희의 눈은 그가 식탁에 내려놓은 감바스와 스테이크 올려진 샐러드에서 꼼짝하질 않았다.

“급할 거 없으니 밥부터 먹을까요?”

도하 손에 의해 예쁜 접시에 담겨진 크림 리조또가 도희 앞에 살며시 내려놓아진다.

“뭐가 급하다는 건지 난 전혀 모르겠네.”

도희도 질세라 감바스에 푹 적신 바게트 위에 새우를 하나 건져 올린 후 도하에게 내밀었다.

잠시 주춤한 도하는 어색하게 입을 벌리더니 한입에 바게트를 받아먹는다.

“그리고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예요? 둘이 있을 땐 반말하기로 했으면서.”

바게트가 컸던 탓인지 빨리 대답하려 열심히 오물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워 보였다.

“천천히 먹고 대답해요. 천천히.”

곧이어 다 먹었는지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삼킨 도하가 입을 열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게 아닐 텐데.”

단단하고 울림이 낮은 목소리.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중저음의 음성이었다.

“나도 손해 볼 건 없는데? 도하씨가 나보다 한 살 많지 않나?”

“컥!”

고상한 자태로 우아하게 와인잔을 기울이던 그의 입에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몰랐어요?”

유독 크게 뜨인 그의 눈을 보니 전혀 몰랐던 눈치다.

“죽어도 오빠라곤 안 부를 거니까 기대는 하지 말아요.”

지겹도록 들어왔던 오빠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니.

도하는 온몸을 타고 흐르는 묘한 간지러움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너무 야박한 동생이네.”

“나랑 오빠 동생 할 건 아니잖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요즘 그거와 다를 바 없긴 했지.”

“요즘같이 못 있었다고 투정 부리는 거예요?”

“그럴 리가.”

“갑자기 말도 잘 놓네?”

“바라던 바 아닌가?”

“음, 나쁘진 않네.”

존댓말과 반말의 갭이 얼마나 큰지.

평소 다정함이 넘치는 도하와는 사뭇 달랐다.

치명적인 도도함이 느껴진달까.

뭐, 이 또한 나름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도하의 분위기라는 것을 도희만 몰랐다.

“근데 오늘 도사님이랑은 어디 다녀온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도사는 회사에 있던 도하를 불러 길을 나선 걸까.

“오빠라고 불러주면 대답해 줄지 고민해 보고.”

“헐.”

“근데 우리 도희는 왜 계속 존댓말일까.”

“허얼.”

처음 보는 능청스러운 표정과 말투.

거기에 ‘우리 도희’까지.

어느 포인트가 가장 당황스럽다고 말해야 할지 순위를 매기기도 어려웠다.

“미안해요, 도하씨. 내가 손해였네.”

낯선 모습이 좋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간질거림은 도희 몫이었다.

“무르기는 없는데.”

한쪽으로 치솟은 도하의 입꼬리가 얄미워 보여야 맞는데.

“도하씨는 생일날 낳아 준 어머님한테 감사 인사 백 번은 해야 해요.”

도희는 별생각 없이 뱉어 낸 말이었다.

“얼굴만 잘생기게 낳아주면 다가 아니라서.”

순식간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그의 분위기에 도희는 놀라지 않은 척 더 과한 호응을 해 보였다.

“잘생긴 건 안다는 말이네? 풉, 남이 들으면 재수 없는 말인 거 알죠?”

도하의 눈이 호선을 그리더니 흐렸던 안색이 금세 풀어진다.

방금 자신의 얼굴이 굳었다는 사실은 그도 모르는 모양이다.

‘강 부장.’

회사 막바지, 그렇게 기 싸움을 하던 강 부장이 도하의 어머님이란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도희였다.

‘흐음…….’

어머니나, 가족이란 단어에 도하가 보이는 예민한 반응을 보면 강 부장과의 모자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필시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 짐작되지만 함부로 묻기도 껄끄러운 게 바로 집안 사정이다.

두 사람 모두 생각에 잠겨 정적이 흐르려는 찰나, 먼저 입을 연 건 도하였다.

“오늘 강아씨 어머님 의식 차리셨다면서요.”

“네. 금방 정신을 잃으시긴 했는데… 도사님이 저렇게 고생하시니까 곧 다시 깨어나시겠죠. 강아가 실망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걱정되시면 지금이라도 병원으로 갈까요?”

말투 하나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다시 다정다감함이 넘쳐흐르는 도하였다.

“오늘 우주씨도 있어요. 또 셋이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자자고요?”

“오늘 밤엔 우 형사님과 발 맞대고 자고 싶진 않네요.”

두 남자가 위아래로 누우면 그 긴 소파도 작아 보였다.

“뭐, 오늘 밤은 집에서도 잠은 소파에서 자야겠네.”

“예?”

“오늘 나 혼자 편히 자라면서?”

새침한 표정으로 어깰 으쓱이는 도희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는 도하였다.

*     *     *

타타다닥.

“아이스크림 사다 줘요?”

“괜찮아요.”

“도넛은요? 저번에 잘 먹던데.”

“괜찮아요.”

타다닥.

무심한 강아의 손은 여전히 키보드 위에서 놀고 있다.

“그럼 빵? 빵 좋아하죠? 딱 관상이 빵순이인데.”

타닥, 탁!

“우 형사님 나 진짜 괜찮아요.”

그제야 손을 멈춘 강아는 모니터에 있던 시선을 맞은편에 앉아있는 우주에게 옮겼다.

“내가 먹고 싶어서 말한 건데.”

“그럼 다녀오세요. 난 또 어린 애 달래 주듯이 간식 사 준다는 건 줄 알았네.”

“여기 애가 어디 있어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강아씨는 본인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탁!

순간, 우주의 재빠른 오른손은 자신에게 날아든 무언가를 잡아챘다.

“나이스 캐치.”

강아 품에 안겨 있던 네모 쿠션이었다.

분한 듯 자신을 노려보는 강아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작게 웃음을 흘린 우주가 말했다.

“아, 맞아야 했는데, 제가 또 운동 신경은 쓸데없이 좋아서 말이죠.”

“잘 때 조심해요. 또 모르죠. 천장에서 형광등이라도 떨어질지.”

“강아씨 그건 살인미수입니다.”

“천장에 등밖에 없어서 한 소리예요. 지금이라도 뭘 달아야 하나 싶네.”

“제가 살인 자백을 듣고 있는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녹음을 해야 할까요.”

타다다닥!

타닥!

타타탁!

“힘도 좋아. 키보드 다 부서지겠네.”

“저 일 하지 말아요?”

오늘따라 사람을 가만두질 않는 우주였다.

가만히 좀 둬 달라 꺼낸 말인데 우주는 긍정의 고갯짓을 보였다.

“일 못 하게 하려고 이러는 건데 몰랐어요?”

장난스럽게 휘는 우주의 눈꼬리를 보니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예?”

“오늘 같은 날은 쉬어도 돼요.”

“오늘 같은 날이 어떤 날인데요.”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댄 우주는 긴 다리를 도도히 꼬아 올렸다.

“음… 내가 있는 날?”

강아는 이맛살이 찌푸렸다.

“뭐야, 그게.”

“오늘은 놀아요, 나랑.”

우주 말에 모니터를 맴돌던 강아의 시선은 갈피를 못 잡고 흩어진다.

끝내 강아의 긴 속눈썹이 나직이 내려앉자 우주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심야 영화는 어떻습니까.”

“지금 영화 보러 가자구요?”

“강아씨 노트북은 일할 때만 쓰는 겁니까?”

“아…….”

하여튼 이 남자랑 대화하면 항상 말리는 기분이다.

“영화는 제가 고를 거예요.”

불퉁스러운 말투지만 그녀의 입꼬리엔 은은한 미소가 달려 있다.

“팝콘은 제가 사 오죠.”

편의점 팝콘을 좋아하지 않는 우주였지만 오늘은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다.

병실을 나서는 우주의 걸음은 여느 때보다 가벼웠다.

*     *     *

스산함이 내려앉은 어둑한 복도.

어디선가 스멀스멀 흘러나온 뽀얀 연기가 공간을 자욱하게 메우더니, 야간 근무를 서던 교도관들의 몸을 하나둘 바닥으로 무너트렸다.

철컥.

끼이익—

곧이어 절대 열릴 일 없는 독방의 철제문 하나가 날카로운 쇳소릴 내며 느리게 열린다.

끼이이익—

그리고 독방의 구석.

흐트러진 자세로 벽에 기대어 있던 남자의 눈이 슬며시 뜨인다.

소란스러움에 눈 뜬 남자는 바로 도희에게 잡힌 오피스텔 살인범이었다.

그는 활짝 열린 철제 문틈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여기 강도희가 왔을 리는 없고.”

그것도 이 야밤에.

그녀라면 이런 불청객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

“날 찾아온 게 누구실까.”

여전히 불청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마.’

혹시 기대했던 일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강도희에게 뺏긴 투명 목걸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에게도 있는 걸까.

어쨌든, 무언가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이 지겨운 독방 생활이 끝나리란 예감이 머릿속을 강하게 스쳤다.

“흐… 흐으흐…….”

예기치 못한 상황에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 남자의 비틀린 잇새로 기분 나쁜 웃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리 눈빛만 봤을 진데, 그대의 사특함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구나.”

불청객의 목소리는 특이했다.

목소리만 들릴 뿐 여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이 자도 영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어린놈이 건방지게.”

남자는 불청객이 자신보다 젊다 확신했다.

“쯔쯧, 그놈 입버릇도 고약한지고.”

근데 어째 말투가 이상하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분명 호의는 아니었다.

“너 이 새끼 뭐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남자는 우악한 비명과 함께 철제문 입구로 달려들었다.

물론 불청객을 잡지 못한 이상 허공을 휘젓는 행위에 불과했다.

“어허. 그리 날뛰지 않아도 내 자네가 사특한 자인 것은 익히 안다 해도!”

분명 목소리는 들리는데 정확히 어디서 흘러나오는 건지 가늠이 힘들었다.

“나도 그 목걸이만 믿고 있다 잡혔지.”

투명하다고 해서 형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헛소리나 지껄일 거면 목걸이나 주고 꺼지던가.”

형형한 눈빛을 띤 남자의 살벌한 두 눈이 허공 곳곳을 배회하며 헤집는다.

“내 자네 같은 이 덕분에 청소 일을 멈출 수가 없으이.”

“뭐?”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니 청소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겠나.”

나른한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자 왠지 모를 기괴함이 온몸을 싸고돌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막연한 불안감.

그리고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한 기운.

잘게 떨리는 손끝이 감추고자 주먹 쥔 남자의 손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누구야 너.”

“어째 또 같은 물음이구나. 너희에겐 누구에게 죽는지가 그리 중한 것이냐?”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건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서늘한 음성이 남자의 귓가를 파고든다.

“백 원(白元).”

불청객이 오랜만에 내뱉은 자신의 이름.

도사와 도희가 그토록 찾던 악의 도사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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