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그녀는 결국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 인사이동은 예견된 일이었다.
“여기는 오늘부터 개선부에서 근무하게 된 강선미씨.”
하필 개선부 이동자가 강선미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뿐.
강 부장의 눈짓에 한발 앞으로 나선 선미는 당차게 입을 열었다.
“초면은 아니니까 인사 길게는 안 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짧게 인사를 마친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곁눈질하기 바쁜 개선부원들을 무심히 지나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럼 업무들 보세요.”
볼일을 끝낸 강 부장은 슬쩍 도하를 바라본 뒤 개선부 사무실을 나섰다.
이곳에서 둘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도하는 강 부장이 말 걸기 전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매정한 아들이었다.
강 부장이 사라지자 발길을 멈춘 선미는 빈 책상에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았다.
“제 자리는 여기겠죠?”
오늘 팀장으로 승진한 도하가 자릴 옮기며 방금 막 빈자리가 된 책상이었다.
그것도 팀장인 도하의 코 앞자리.
소하가 쩍 벌렸던 입을 굳히며 쏘아붙일 태세를 취하자, 진명이 먼저 선수 쳤다.
“강선미씨. 저희도 인사 명단을 오늘 통보를 받아서 자리 배치를 새로 해야 합니다. 선미씨 자리는 곧 다시 알려 드리죠.”
당연히 오늘 개선부로 부임할 사람은 새로운 팀장일 거라 예상했다.
도하가 팀장으로 승진하고 새 팀원이 들어올 거라 누가 알았으랴.
“이 자리 비었잖아요? 아무 자리나 앉으면 뭐 어때요.”
쏟아지는 팀원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듯한 선미는 하나둘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자리는 이제 업무를 배워야 할 선미씨가 앉기에 벅차실 겁니다. 자리 배치 새로 해서 금방 말씀드릴게요.”
“업무는 도하 팀장님이 가르쳐 주시면 되겠네요. 업무를 제일 잘 아는 팀장님이시니까.”
진명이 난감한 듯 도하를 쳐다봤다.
선미를 없는 사람 취급하듯, 도하의 시선은 선미의 등장 후로 줄곧 모니터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결국 갈 곳 잃은 진명의 두 눈이 팀원들에게 닿자, 그들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찰 뿐이다.
결국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소하가 말했다.
“저기요. 우리 부서는 팀장님 일이 워낙 많으셔서 팀장님을 도울 수 있는 손 빠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구요.”
차분히 꾸며 냈지만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바꿀 순 없었다.
“저도 손 빨라요.”
선미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들어 올린 양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말이 아니잖아요. 일이 익숙해야 도울 수 있지 않겠어요?”
소하의 뾰족한 말에 선미의 까만 눈썹이 격하게 꿈틀거린다.
“일은 배우면 금방 느는 건데 뭐가 문제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일 배워서 늘면 그때 앉으시라구요. 괜히 지금 팀장님 고생시키지 마시고.”
더 모진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두산의 만류하는 고갯짓에 가까스로 참아낸 소하였다.
그리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서 대리는 선미의 얼굴을 직시하며 굳은 입매를 애써 끌어올렸다.
* * *
“그만 열 내고 진정해요.”
두산은 유리컵 가득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소하에게 건넸다.
“으! 그 속셈이 너무 뻔하잖아요. 지가 팀장님 좋아하는 거 누가 몰라.”
시원하고 고소한 커피 향을 맡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누구보다 소하의 취향을 잘 아는 두산이었다.
“잘했어. 소하씨가 안 그랬으면 내가 말했을걸. 그럼 분위기는 더 아작 났을 테고.”
진명도 불쑥 올라온 험한 말들을 몇 번이나 삼켜냈었다.
“아까도 뭐, 분위기가 좋진 않았잖아요. 저 여자 표정 봤어요? 진짜 살벌하던데.”
소하는 표정 관리를 하지 않던 선미를 떠올리며 혀를 쯔쯧 찼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다.
“근데 자리 하나 가지고 이렇게 싸울 일인가요.”
“에?”
“…….”
“예?”
서 대리가 흘려 말한 애매모호한 말에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아, 강선미씨 말입니다. 그냥 비키면 될 걸 이렇게까지 우기는 게 이상해서…….”
시선을 받은 서 대리는 변명하듯 작게 주절거렸다.
“저 여자 도하 대, 아니 도하 팀장님 좋아하잖아요.”
얼마 전 개선부를 찾아와 난리 친 후로 그녀가 도하를 좋아하는 걸 모르는 팀원은 없다.
“알죠. 근데 아무리 좋아해도 회사는 회사잖습니까. 저 행동은 어릴 적 학교에서나 하는 행동 같아서요.”
“언제 적 학교요? 요즘 학교에서 저러면 매장당하지 않나.”
진명은 여자들의 기 싸움 세계만큼은 무지했다.
“저런 애들 있긴 있어요. 공과 사 구분 못 하고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애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오늘 행동은 몰상식, 그 자체지. 막말로 부서 이동해서 일 하나도 모르는데 팀장 앞에 앉아서 뭘 어쩌겠다고 우기는지. 참.”
여우 짓이라면 빠지지 않는 소하였지만 선미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놈의 사랑이 뭔지.”
소하는 혀를 끌차며 가볍게 말하는 진명에게 일침을 가했다.
“에이, 저걸 사랑으로 포장하면 안 되죠! 도하 팀장님 싫어하는 거 못 보셨어요?”
“하긴 강선미씨 행동이 별로긴 해. 저번엔 얼마나 좋아하면 저럴까 싶었는데 오늘 보니까 좀 과해. 미저리 같잖아.”
“전 저번에 왔을 때 강도희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강 팀장님 내려치기 할 때부터 싸했습니다.”
“저 여자 기획팀에서도 편 가르기 좋아한 걸로 유명해요. 회사의 헛소문 반은 저 여자 무리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던데요.”
소하가 주로 사내에 떠도는 소문들을 옮기는 편이라면 선미는 그 소문들을 만들어 내는 근원지였다.
“아휴… 개선부가 이제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개선부는 막 도희 빈자릴 채워 내며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그 공로엔 도하의 역할이 가장 컸지만, 모두가 애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요! 전 이 팀장님 축하 파티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씨, 분해!”
“그래도 이왕 새 팀원으로 들어왔으니까 너무 날 세우지 말자고.”
“허! 저 여자가 저렇게 행동하는데 어떻게 날을 안 세워요?”
“우리까지 그러면 이 팀장만 곤란해지잖아. 우린 그냥 우리 일만 하자는 말이지.”
어찌나 칼 같은지, 진명은 도하의 호칭을 도하 대리에서 이 팀장으로 반나절 만에 잘도 바꿨다.
“진명 대리님은 그렇게 하세요. 전 저 여자랑 말도 안 섞을 거니까!”
“업무 인계는 제가 하겠습니다.”
“허얼. 싫어!”
갑작스러운 소하의 비명에 놀란 것은 두산만이 아니었다.
“두산씨가 한다는데 소하씨가 왜 싫대?”
누군가는 맡아야 할 일이다.
“차라리 제가 할게요.”
“소하씨 업무도 벅차잖아. 두산씨가 하게 둬.”
“싫어요.”
“아니, 금세 똥고집 옮았어? 왜 그래?”
연한 볼터치로 발그레했던 소하의 볼이 더 붉게 달아오른다.
뾰로통하게 굳힌 입매엔 불만이 가득 맺혔다.
“강선미씨 인수인계 제가 하겠습니다.”
“서 대리가?”
“예. 이제 저도 업무 파악은 끝났으니 제가 하던 일들 선미씨에게 넘기고 제가 대리님들 업무 분담 받으면 어떨까요.”
애초에 개선부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서 대리에게 할당된 업무는 대부분 보조 업무였다.
“그럼 개인 업무 교육은 내가 할게. 서 대리는 하던 일 인계하고 우리가 분담해서 하던 팀장님 업무는 다시 팀장님이랑 이야기해서 나눠 보자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외로 개선부에 잘 녹아든 서 대리였다.
“근데 소하씨 왜 이번엔 싫다고 안 나서? 서 대리가 하는 건 괜찮아?”
“듣고 보니 서 대리님 말이 맞아서요. 서 대리님이 하면 좋겠네요.”
“내가 하는 건?”
“몰라요. 아무나 하면 어때요.”
“아까는 싫다면서.”
“몰라요, 몰라!”
진명의 눈이 급히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소하의 뒷모습을 따른다.
그리고 다시 옮겨진 그의 시선 끝엔 뜻 모를 표정으로 소하를 바라보는 두산이 있었다.
* * *
노크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활짝 열리며 도하가 나타났다.
‘이런.’
결국 직접 찾아온 걸 보니 도하는 선미라는 여자가 지독히도 싫은 모양이다.
강 부장은 도하를 보고도 입을 열지 않고 업무를 이어 나갔다.
“강 부장님.”
그제야 강 부장의 고개가 느릿하게 들린다.
“말해요, 이 팀장.”
빳빳이 고갤 들고 시선을 내리깐 강 부장이 낮게 읊조렸다.
“개선부엔 추가 인원이 필요 없습니다. 인력 낭비니 인사 재이동 고려해 주시죠.”
나직하게 울리는 도하의 말을 들은 강 부장은 입매를 끌어올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도하가 화를 억누르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감사부에 아직 결원이 있는 걸로 압니다.”
“그것도 제가 판단합니다.”
강 부장은 손에 들린 펜을 내려놓으며 허릴 꼿꼿이 세웠다.
다부지게 껴진 팔짱이 그녀의 만만치 않은 고집을 대변했다.
“할 말이 더 남았나요?”
“혹시 인사 개입이 있었습니까.”
오늘 인사이동이 있다는 사실은 미리 공지된 사안이었다.
다만 상세 사항은 본인들만 알았을 뿐.
도하는 자신의 승진에 대해 그 어떤 언질로 듣지 못했다.
오늘 공고를 보고서야 자신의 팀장 진급을 알게 되었으니 급하게 바뀐 거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내 연락을 받지 그랬니.”
분명 둘의 사이는 차츰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도하는 요즘 들어 어머니인 강 부장을 멀리했다.
“받았어도 말씀 안 하셨을 거 같은데.”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강선미씨 개선부로 누가 넣었습니까.”
“그것보다 누가 널 팀장으로 올린지가 궁금하지 않니?”
“갑작스러운 인사 개입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알겠습니다.”
도하는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렸다.
“넌 어째 아직도 그리 욕심이 없어. 그것도 사내자식이.”
“변하신 줄 알았는데 여전하시네요.”
“너도 그 고집 여전하구나.”
“나가 보겠습니다. 제가 괜한 기대를 했나 봅니다.”
그리고 문 앞으로 다가선 도하의 등 뒤로 날 선 음성이 들려왔다.
“강도희씨랑 잘 지내니?”
도하는 못 들은 척 사무실을 나서려 문을 열어젖혔다.
“못 지내는 거 같던데.”
“무슨 말씀이세요.”
결국 발길을 멈춘 도하에게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심하란 얘기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알지?”
우려하던 일이다.
예상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결국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하아…….”
이마에서 느껴지는 지끈거림에 도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의 어두워진 낯빛은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