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14)화 (114/120)

113화 다 죽을 거라고!

“이미 짐 정리 다 했어요. 그냥 이 자리 쓸게요.”

이토록 막무가내인 사람은 처음이다.

진명의 일자 눈썹이 티 나게 들썩이며 휘었다.

“서 대리가 선미씨 업무 인계 도와줄 겁니다. 자리부터 옮기시고 인계받으세요.”

진명도 지지 않으려 했던 말을 반복했다.

“서 대리도 개선부 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전 제대로 배우고 싶은데.”

초장에 기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허!”

선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소하의 눈빛에 진명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첫날부터 이 난리인데 앞으로 회사 생활이 얼마나 더 피곤해질지.

“후… 강선미씨 일 안 하실 겁니까? 왜 자꾸 자리 옮기는 걸로 우기십니까.”

참으려 해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젠 표정 관리마저 안 될 지경이다.

“회사 사번 보니까 여기서 내가 제일 선배던데.”

“예?”

이 여자가 진짜 미쳤나.

참다못한 진명의 입에서 쓴소리가 흘러나오기 직전, 그의 뒤에서 더 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봐요. 지금 뭐, 오자마자 여기서 회사 경력 따지세요? 그래 봤자 여기 업무 하나도 모르시잖아요! 일하시려고 오신 거 아니죠? 딴 맘먹고 왔나 보네!”

“이봐요? 너는 딱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어따 선배한테 이봐요니? 개선부는 위아래 없어? 이러니까 다 같이 싸잡아 욕먹지.”

“뭐라고요? 지금 뭐라…….”

선미의 혀 차는 소리를 듣고 흥분한 소하가 씩씩거리며 선미에게 다가가는 순간.

“소하씨.”

내내 잠자코 있던 도하가 나선다.

“두세요.”

잘못 들었나.

“네?”

어안이 벙벙해진 소하는 큰 눈을 연신 꿈뻑거렸다.

“그냥 두세요.”

그냥 두라니?

첫날부터 제멋대로인 이 꼴을 보고도 그냥 두라고?

“강선미씨가 제가 앉던 자리 쓰세요. 사무실 자리는 이대로 변동 없이 가겠습니다. 다들 그만 업무 보시죠.”

비합리적이지만 제일 깔끔한 정리였다.

하지만 평소 비합리적인 걸 가장 싫어하는 도하가 나서서 그편에 서다니.

누구보다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도하가 침착하게 선미를 감싸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아니, 사실 매사에 침착한 도하였기에 침착한 그의 대응은 놀랍지 않다.

하지만 억지스러운 선미의 편을 들다니, 도저히 무슨 생각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팀장님…….”

소하의 억울한 눈빛에 도하는 의연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소하보다 더 당황한 기색에 선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닿은 도하의 미소에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     *     *

“어? 뭐 좀 찾으신 겁니까?!”

지 순경은 현장을 떠났던 도희가 다시 교도소에 나타나자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그의 큰 덩치 때문인지 흡사 앞발을 든 애완 곰이 주인을 반기는 듯한 모습이다.

“아… 혹시 놓친 게 없나 다시 한번 둘러보려구요.”

도사와 다시 찾은 현장은 이전의 소란스러움은 사라지고 꽤 정리된 상태였다.

“도희씨 사람들 있으면 불편하시겠죠?”

우주가 도희에게 묻자, 도희는 예쁜 눈을 내리깔며 가방을 들여다봤다.

—없는 것이 나을 게다. 또 쓰러질 수도 있는 노릇이고.

우주의 말은 도희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다.

“그럼 혼자 살펴봐도 될까요?”

도희도 우주에게 말하는 듯해도 실상은 아니었다.

“예. 막내야, 교도관 분들 모시고 잠깐만 자리 좀 비켜주라.”

“예? 저도요?”

“나도 갈 거야. 가자.”

우주가 지 순경과 현장을 지키던 교도관들을 데리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진짜 또 쓰러지는 건 아니겠죠.’

—하여 내 청년을 데려와야 한다고 그리 말했거늘.

물건을 통해 과거 장면을 들여다보는 지물(知物)술은 상당한 기력이 필요했다.

도사는 도희의 기운을 탓하며 도하를 애타게 찾았지만, 꿈쩍도 안 하는 도희였다.

‘저로 만족하세요.’

더는 이런 끔찍한 사건에 그를 끼게 하고 싶지 않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거라. 네 뜻대로 될 줄 아느냐? 미련한 것.

‘그래도 안 돼요. 절대 안 돼.’

—내키는 대로 해 보거라. 네 손해지 내 손해는 아닐 것이니.

“후우…….”

도사의 말을 가뿐히 삼킨 도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 준비됐어요.’

그녀의 눈에 들어찬 비장함에 주변 공기도 가라앉았다.

—손을 뻗거라.

나직이 들려오는 도사의 말대로 도희의 가녀린 손가락이 독방 철제문에 닿았다.

“흐웁.”

숨까지 멈춘 도희는 감은 눈앞을 스치는 장면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몇 초 뒤 곱게 휜 그녀의 속눈썹이 뜨이고 그 눈가엔 서늘한 두려움이 서려 있다.

쿵, 쿵, 쿵.

도희는 미칠 듯 귓가를 울리는 심장 소릴 들으며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도희씨… 김현철이…….”

곧이어 돌아온 우주에게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식에 애써 버티던 도희의 다리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     *     *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오늘은 쉬셔야 할 거 같은데.”

우주는 새파랗게 질린 도희의 안색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괜찮아요. 이 상황에선 쉬어도 쉬는 게 아닐걸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운 잃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리해서 버티는 도희를 말릴 수도 없다.

“그럼 조금만 쉬었다 가죠. 막내 먼저 현장에 보냈습니다.”

같이 가야 했지만, 우주는 도희가 걱정되어 막내만 먼저 보냈다.

“혹시 또 밧줄로 인한 교살이라던가요?”

“…예.”

우주의 고개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도희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김현철.

도희가 몰카범으로 잡아넣었던 남자.

그의 의지는 아니지만, 감사부와 부사장에게 타격을 준 것에 나름 공헌을 한 사람이다.

도희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불구속 수사 도중 도희를 찾아와 협박하던 때였다.

그런 그가 오늘 교도소에서 생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것도 밧줄에 의한 교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 지난다.

“도희씨… 도희씨가 본대로라면… 일반인인 우리가, 아니 경찰이 그 사건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도희가 지물(知物)술로 확인한 사건은 아주 기괴했다.

이제는 피해자인 오피스텔 살인범.

놈이 뭐라고 소리치는지는 들리진 않았지만, 빛바랜 청색 죄수복을 입은 그는 홀로 복도로 뛰쳐나와 허공을 미친 듯 휘젓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어디론가 달아나는 그의 목으로 굵은 밧줄 하나가 날아들었다.

이해가 되질 않지만 돌연 공중에서 생겨난 밧줄이었다.

이어 누군가 뒤에서 밧줄로 그의 목을 끌어당기듯, 뒤로 끌려가던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얼마 후 축 늘어져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놈을 제외한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절로 움직이는 밧줄이 사람을 죽인다니.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절대 못 잡죠.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라니… 범인이 투명해지는 요물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도희의 눈길이 힐끔 허리춤에 있는 가방을 향한다.

모습을 감추는 투명 요물이 더는 있지 않다며 우기던 도사는 돌연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다물더니 말을 아끼고 있다.

도사 외에 요물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 대답에도 답을 하지 않은 도사였다.

도사의 마지막 말은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라는 혼잣말이었다.

어쨌든 도사의 반응을 보니 도사가 모르는 요물들이 존재할 수도 있고, 지금 그 요물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있단 말인데.

‘누가?’

아니, 것보다.

‘왜?’

대체 왜 그녀 가까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마 부장과 부사장 사건 때는 그들의 입을 막으려는 누군가의 짓이 아닐까 생각했다.

비리 장부를 포함해 워낙 적이 많은 인물들이니까.

하지만 오피스텔 범인 놈에 이어 김현철까지 살해를 당한 이 시점에선 도희는 이 사건들이 자신과 연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범인은 왜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될 증거인 밧줄을 남겨 가며 사건들을 엮으려고 할까.

‘증거를 남겨서 득 될 게 뭐가 있다고……’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서?

밧줄로 남길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범인이 같다고 광고하고 싶어서?

왜?

유명세를 원하나?

‘근데 왜 하필 나랑 연관된 사람들만…….’

분명한 건 도희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다.

시작과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킨 의문들.

도저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요물을 가지고 있고, 내 상황을 잘 아는 사람…….’

미간을 좁힌 채 깊은 사색에 잠긴 도희를 우주가 일깨웠다.

“일단 김현철 사건 현장부터 가 봐야겠네요. 거긴 혹시 증거가 남아 있을…….”

그 순간, 눈을 빛내는 도희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먼저 들릴 데가 있어요.”

그리고 그녀의 목적지를 들은 우주의 안색이 급격히 굳기 시작했다.

*     *     *

지독히도 마른 몸에 초췌한 행색의 남자가 면접실로 들어선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도희의 입이 서서히 벌어진다.

‘어떻게…….’

원래도 마른 몸을 가진 한 부장이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아사 직전의 난민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강… 도희……!”

마른기침을 뱉던 그의 입에서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 살려 줘…….”

곧이어 퀭한 얼굴로 힘겹게 자리로 걸어오던 그는 눈빛이 험악하게 돌변하더니 그대로 도희에게 달려들었다.

“강도희 나 좀 꺼내줘! 넌 할 수 있잖아!!”

자신의 옷을 늘어지게 붙잡고 소리치는 한 부장을 향해 도희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이거부터 놓고 말해요.”

우주와 교도관이 나서고 나서야 진정된 그를 겨우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철제 의자에 올라앉아 양팔로 자신의 접힌 다릴 감싼 그는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한 부장님?”

도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한 부장의 가라앉은 눈빛이 도희에게 쏘아졌다.

“날 죽일 거야. 그놈이 나도 죽일 거라고!!”

또다시 발작하듯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를 교도관이 제지했다.

테이블을 밀치고, 의자를 던지고, 침 튀기며 비명을 지르는 한 부장은 도저히 대화 불가능한 상태였다.

“오늘 접견은 힘들 거 같습니다.”

그리고 교도관에 의해 끌려 나가는 그가 외친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강도희!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을 거라고! 싹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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