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연애는 안 하신다더니.
설 기자의 기사를 읽은 우주는 굵고 강렬한 외마디 욕설을 남긴 후 병실을 나가 버렸다.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그가 흘리고 간 살벌한 분위기로 봐선 당장 설 기자의 멱살이라도 잡으러 갈 기세였다.
종종걸음으로 복도까지 따라갔다 돌아온 강아의 시선이 문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두시죠. 뭐라도 알아서 올 겁니다.”
도희의 표정을 걱정스레 살피는 도하의 말 뒤로 병실에도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사를 읽은 도희는 그대로 입을 굳게 닫고 긴 침묵에 잠긴 상태였다.
그간 설 기자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항상 도희 편이었다.
덕분에 누렸던 여론이라는 든든한 버팀목.
하지만 그 칼이 자신에게 겨눠질 줄은 상상도 못 한 도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희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하, 나 진짜 괘씸하네.”
“신경 쓰지 마. 너 원래 남이 네 욕하는 거 신경 안 쓰잖아.”
강아는 별일 아닌 척 애써 담담하게 도희를 위로했다.
“전 국민한테 살인자 취급받는 건 다르지.”
물론, 먹히진 않았지만.
“아오, 진짜 그 미친놈 그냥 지금 같이 가서 잡아올까? 잡아서 귓구멍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 분이 풀릴 거 같아? 그럼 내가 갔다 올게!”
태도를 돌변해 씩씩거리는 강아를 외면한 채 나름 차분함을 유지 중인 도희였다.
하지만 아무리 딴생각을 덮어 털어내려 해도 기사의 헤드라인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영험한 그녀, 그녀와 얽힌 살인들의 진실]
“참 미묘하게 자극적이란 말이야.”
설 기자는 앞서 일어난 마 부장, 부사장 사건들과 오늘 교도소에서 각각 일어난 오피스텔 범인과 김현철의 사건을 엮어 도희와 연관 있다는 기사를 냈다.
“근데 설 기자도 진짜 미친놈이야. 기자가 추측성도 아니고 확실하다면서 기사를 내도 돼? 사실 확인도 안 된 사건에 대해서?”
“경찰에서도 나랑 연관 있을 거라 보고 날 이번 사건에 부른 건 사실이니까. 설 기자도 내가 범인이라고 쓴 건 아니잖아. 그저 관련 있다고만 적었지.”
그렇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간 상황 흐름에 대해 적나라하게 적힌 기사는 도희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돌아왔다.
“범인이 아니라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이미 도희씨가 관련 있단 확정 기사만으로도 도희씨 책임을 묻는 이들이 생길 겁니다.”
“도희가 죽인 게 아니잖아요?”
“범인이 잡히기 전까진, 아니 잡힌다 해도 도희씨를 탓하는 이들은 분명 있을 겁니다. 기사를 봤다면 일련의 원인 제공을 했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요.”
“아니, 얘가 무슨 원인 제공을 했다고…….”
“진짜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죠.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었고, 또 그걸 받아들이는 건 각자의 마음이니까요.”
안색이 굳은 강아는 입술을 악다물었다.
자신의 마음도 이리 진창일진데 당사자인 도희는 오죽할까.
“괜찮아요. 이런 분위기도 얼마 안 가겠죠. 원래 금방 잊히잖아요.”
진심이다.
사실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떠든다는 것보다 믿었던 지인이 만든 상황이라는 배신감이 더 크다.
작게라도 마음 줬던 사람이 자신을 외면했을 때 느껴지는 지독한 상실감.
도희가 가장 싫어하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곁에 사람을 많이 두지 않는 그녀지만, 도사를 만난 뒤로 너무 쉽게 곁을 내준 것도 사실이다.
“…근데 설 기자는 왜 이런 기사를 냈을까?”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 하나.
왜 설 기자는 사람들이 도희에게 반감 가질 악의적인 기사를 실었을까.
“대체 왜?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생겼나?”
지금까지 열심히 도와주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 일을 벌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 이유를 도희씨에게서 찾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그 자식이 이상한 놈인 거니까.”
냉소 섞인 도하에 말에 도희는 그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래! 도희야 너무 마음 쓰지 마. 진짜 범인 잡으면 되잖아! 그럼 남들이 뭐라고 떠들던 무슨 상관이야.”
“…그래. 범인이 잡히면 다 해결되겠지. 만약 잡힌다면 말이야.”
그렇게 풀리지 않는 고민에 잠긴 그들의 깊은 밤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가을의 늦더위는 여름보다 뜨겁다.
게다가 도심 빌딩 속 열섬 효과는 가을의 열기를 더 뜨겁게 만들었다.
도심 광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은 도희는 지나다니는 수많은 인파의 열기에 쉼 없이 손 부채질을 해야 했다.
“아우, 다들 바쁘게 사네요.”
도희의 시선이 바쁜 걸음을 옮기는 인파 속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다.
앞만 보고 걷는 사람들은 그녀가 혼잣말을 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이만하면 되었다. 돌아가자꾸나.
“벌써요?”
이곳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한 지 1시간도 훌쩍 지났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자릴 오래 비울 셈인 게냐.
고되다.
기운이 바닥나 한계에 부딪힌 도사의 핑계였지만 도희는 별다른 말없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며칠 더 와볼까요.”
—되었다.
이 상태라면 소용없었다.
기운을 잃고 있는 걸까.
얼마 전부터 타인의 기운을 느끼는 감각도 무뎌졌다.
도희의 의견대로 도가의 기운을 찾아보려 나선 길이었지만, 옅게 느껴지는 기운을 분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도사였다.
여인을 보살피다 무리한 걸까.
계룡산에서 검은 형체를 쫓다 정신을 잃은 후론 가끔 도희나 다른 이의 생각도 들리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이 쇠약해지고 있단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저 고되다.
도사는 느껴본 적 없던 묵직한 피로에 아득히 가라앉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 * *
“도희도 왔구나.”
“어, 어머니!”
문을 닫는 것도 잊은 도희는 헐레벌떡 병상으로 달려갔다.
“정신이 드세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도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인의 깡마른 손을 꼭 부여잡았다.
격양된 목소리의 도희에게 여인은 차분한 미소로 답했다.
“그럼, 딸 하나뿐인 친구를 잊으면 쓰나.”
도희의 놀란 눈이 강아를 향한다.
“30분 전에 깨셨어. 의사도 다녀갔고.”
얼굴에 열기가 가시지 않은 강아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강아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의사가 뭐래?”
“뭐, 뇌간 손상 후 의식이 돌아오는 건 기적이다 뭐다 잔뜩 흥분해서 혼자 이야기하다가 정밀 검사 준비한다고 갔어.”
이미 한바탕 쏟아낸 듯한 그녀의 붉은 눈시울에 또 눈물이 고인다.
“어머니, 강아 쟤 몸만 컸지 아직도 울보다. 그죠?”
그런 강아를 보며 도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엄마 닮아서 눈물 많은 거거든.”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도희와 강아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이 고운 곡선을 만들며 부드럽게 휘었다.
곧이어 들이닥친 의료진은 예정된 검사 목록들을 읊은 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희는 의료진 손에 의해 옮겨지는 어머니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강아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서로 위로의 온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도사의 전음이 들려온다.
—혹, 누가 다녀갔더냐.
지독히 낮은 음성이었다.
“…아니요?”
오전 내내 병실에서 작업한 강아였다.
흐린 기억을 되짚어 봐도 종종 흡연을 위해 들락날락한 백 실장 외에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왜요?”
도희가 되물었다.
무슨 일인지 대꾸 없이 쌩하니 날아간 도사는 그대로 항아리 속으로 사라졌다.
도희의 머릿속을 떠도는 수많은 물음을 들었을 테지만 침묵을 지키는 도사를 보며 도희의 눈빛도 어둑히 가라앉았다.
* * *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란 도희는 다급히 현관으로 다가서던 발을 멈춰 세웠다.
‘누구지.’
집주인도 없는데 차라리 없는 척을 할까.
띠, 띠, 띠, 띠, 띠.
현관에서 발길을 돌리는 도희에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
도하였다면 집주인인 그가 애초에 초인종을 누를 이유가 없다.
불안감에 잡힌 도희의 발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띠링.
문이 열리고 도하의 얼굴을 발견한 도희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예요. 초인종 눌러서 놀랬…….”
그리도 그 뒤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강도희씨 만나게 해준다더니.”
묵직하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
“집으로 데려올 줄을 몰랐네요.”
여전히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말끔한 차림의 무혁이었다.
“사장님?”
도희가 힐끗 도하를 바라보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볼을 샐쭉댄 도하가 어깰 끌어올렸다.
“풉.”
처음 보는 그의 표정에 도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하의 등 뒤로 서 있던 무혁은 영문 모를 도희의 웃음에 한쪽 눈썹을 들썩거렸다.
“아, 들어오세요. 제집은 아니지만 커피는 드릴게요.”
도하를 보며 짓던 도희의 눈웃음이 무혁에게로 이어졌다.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사장님 성격이 급하셔서.”
도하와 무혁이 손님용 실내화를 신고 들어서자 두 사람에게 가려졌던 전 상무가 나타났다.
“어머, 전 상무님!”
“잘 지내셨나 봅니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반면 핼쑥해진 전 상무의 볼을 본 도희는 입매를 어색하게 끌어올렸다.
“상무님은 여전히 고생이 많으시네요. 휴가라도 신청하세요.”
작게 속삭이는 도희 말에 전 상무가 크게 웃어 보이자, 앞서 거실로 들어섰던 두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진다.
“크흠.”
결국 두 사람은 두 남자의 눈치를 보며 급히 식탁으로 향했다.
“연애는 안 하신다더니.”
무혁의 탐탁지 않은 시선이 도희를 스치며 도하에게 닿는다.
그의 시선을 받은 도하의 표정은 한없이 무심했다.
“원래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이죠.”
도희의 환한 미소를 보니 더 속이 끓어오르는 무혁이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집까지 찾아온 걸 보면 예삿일이 아닌데.
“늦은 밤 죄송합니다. 워낙 연락이 안 되셔서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탓하려던 건 아니었다.
도희는 쏟아지는 연락에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놓는 일이 잦았다.
“급한 상황인 거 같은데 무슨 일 있나요?”
“커피는 없습니까.”
“아, 드릴게요.”
무혁에 말에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도희는 도하의 손에 의해 다시 자리에 앉혀졌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의 발길이 주방으로 옮겨지자 무혁이 입을 열었다.
“같이 사시는 겁니까?”
“가정 방문 오신 거예요?”
바로 되받아치는 도희의 말에 무혁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당돌한 여자다.
“의뢰하러 왔습니다. 능력 있는 도희씨에게.”
무혁의 펼쳐진 손바닥이 도희를 가리켰다.
“아… 제가 요즘…….”
도희가 막 거절 의사를 표하려는데.
“사례는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돈 보고 의뢰받는 게 아니라서요.”
“압니다.”
“예?”
“목숨이 위태로운 일만 받으신다고 들었는데.”
등받이에 기대앉은 무혁은 도도히 팔짱 끼며 긴 다릴 꼬아 올렸다.
“도희씨가 목숨 하나 살려 주시죠.”
도희가 거절할 수 없는 의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