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19)화 (119/120)

118화 부정(不淨)

“우주씨 괜찮아요?”

정신없이 나오느라 씻지도 못한 도희는 긴 머리를 대충 캡 모자 구멍으로 밀어 넣어 묶어 올렸다.

“하… 민기 이 자식 이런 일로 잠수 탈 놈이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습니다.”

단 이틀 만에 본 우주는 부쩍 야위었다.

“그날부터 연락이 끊긴 거예요?”

이틀 전, 민기에 의해 도희의 악의적인 기사가 났던 날이다.

“예. 그날 전화도 안 받더라고요. 그 자식 갈 곳이야 뻔해서 다 뒤졌는데, 없어요, 아무 데도.”

우주는 피곤한지 연신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날부터 폰은 꺼져 있고 카드도 안 쓰고. 며칠 동안 흔적이 아예 없어요. 죽어도 폰을 꺼놓을 놈이 아닌데…….”

“가족들은 뭐래요?”

“원래 집에는 안 들어가는 놈이라, 별일 없을 거라고 실종 신고도 안 한답니다. 하, 진짜 누가 내놓은 자식 아니랄까 봐.”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우주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우 형사님 잠을 제대로 잤어요?”

“예?”

“친구 찾기 전에 먼저 쓰러지겠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일단 한 시간이라도 자요. 그러다 잠에 먹히면 그 정신으론 아무것도 못 해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급한 게 하나 더 있네요.”

“급한 게 또 있어요?”

“일단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현장부터 보시고, 서로 가서 보여드릴 게 있어요.”

저 멀리 골목 끝, 노란 폴리스라인 앞을 서성이며 이쪽을 보고 있는 지 순경이 보인다.

“현장은 지 순경이랑 볼게요. 우주씨는 잠깐 차에서 눈이라도 붙이세요.”

그리고 무척 길고 고단한 하루가 될 듯한 예감은 역시나 빗나가지 않았다.

*     *     *

“강 형사님!”

지 순경의 부름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고갤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나보고 소리 지르는 줄 알았네.’

도희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지 순경이 강 형사라 소리쳐 불렀기에 내심 놀란 도희였다.

“우리 막내 광수대 전출 가고 싶어서 애쓰네, 애써.”

어느새 다가온 박 경위가 지 순경의 어깨를 툭 쳤다.

“에이, 그런 거 아닙니다. 아까 강 형사님이 누님 오시면 소개 좀 해달라고 해서 부른 겁니다.”

“일하려고 왔으면 사건 현장이나 살펴볼 것이지, 지가 도희씨를 소개받긴 왜 받아.”

멀리서 걸어오는 강 형사를 보는 박 경위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제 광수대랑 합동 수사하면 맨날 부딪힐 건데 너무 날 세우지 마십시오.”

이젠 그의 뜨거운 시선이 이 경위에게 옮겨졌다.

“야, 말이 합동 수사지! 실적은 쟤들이 홀라당 다 먹을 텐데 우린 죽 쒀서 개 주는 거라고.”

“에헤이, 괜히 날 세우지 마시고. 여긴 막내에게 맡기고 저흰 옆 동네 갑시다. 막내야, 우리 먼저 건너간다. 도희씨 현장 보여드리고 우 형사랑 와.”

“예.”

강 형사가 그들에게 닿기 전에 얼른 박 경위를 데리고 사라지는 이 경위였다.

그리고 광수대 형사로 보이는 강 형사가 도희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소문보다 더 미인이시네요.”

“소문낸 분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불쑥 다가온 그의 손을 도희도 맞잡았다.

“누님 이분은 광수대 강지훈 형사님, 그리고 강 형사님 이분은 저희 이번 사건들 도와주시고 있는…….”

“강도희씨, 잘 압니다. 물론 소문만 들었지만요.”

그놈의 소문.

이 정도면 도희도 자신의 소문이 어떤지 한번 들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제가 그렇게 유명했나요. 관심 가져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네요.”

“아마 경찰 중에 도희씨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도 도희씨의 그 영험한 재능 눈으로 한번 보고 싶네요.”

“글쎄요. 죽은 사람한텐 통하질 않아서.”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속마음이라도 읽어드릴까요?”

“하하하, 그게 들리시나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안 들리네요.”

“그럼 나쁜 놈들은 감으로 아신다던데, 저는 어때 보이죠?”

요즘 따라 자길 평가해 달라는 사람들이 많네.

“듣고 싶으세요?”

“좋은 이야기는 아닌가봅니다?”

“기운이 달려서 공짜로는 안 봐 드려요. 일단 현장부터 봐도 될까요?”

“예. 그러시죠.”

밝게 웃어 보인 그는 도희를 데리고 현장을 누비며 사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역시나 이 현장에 강력팀이 불려오고 광수대까지 합류하게 된 것은 밧줄이라는 골치 아픈 증거 때문이었다.

볏짚으로 꼬아진 굵은 밧줄은 시중에서 흔히 보이는 줄다리기용 밧줄과는 달랐다.

밧줄에 고정된 도희의 시선을 본 강 형사가 말했다.

“볏짚을 이 정도 굵기로 꼰 밧줄은 요즘 구하기도 힘들답니다. 금줄이라고 해서 얇은 줄은 많다는데 이건 금줄이라고 하기엔 너무 굵다네요.”

“금줄요?”

“왜 옛날에 아이가 태어나면 문 앞에 걸려 있던 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얼마나 옛날을 말하는 건지.

거의 구한말이 아닌가.

“남자 새끼손가락 정도 굵기의 줄인데 부정(不淨)을 막고 정화시킨답니다. 신성한 대상물에 매기도 하는데 보통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는 표시라고 하더군요.”

도희는 강 형사가 말한 내용을 곱씹었다.

“부정을 막고 정화 한다라…….”

순간, 괴이한 느낌이 가슴을 쓸고 지난다.

“혹시 뉴스에선 피해자 다섯 명이 전부 지명수배자라고 하던데 맞나요?”

“예. 전부 살인죄에 버금가는 흉악범들입니다. 한 놈은…….”

그 뒤로 줄줄 읊어지는 그들의 범죄 이력이 도희의 귀로 흘러 들어가진 못했다.

마 부장.

죽을 뻔한 도희를 외면했고 그 외 사내 괴롭힘으로 악명 높던 부장.

해고된 후 앙심을 품고 도희를 죽일 계획까지 세웠던 사람.

이무혁 부사장.

수많은 악행과 다수의 살인 지시를 내리고도 죄책감 하나 없던 미친놈.

오피스텔 살인범이야 두말하면 입 아플 흉악범이고.

김현철은…….

몰카 말고도 도희는 모르는 그가 저지른 악행들이 있는 걸까.

‘…악을 막고 정화한다.’

이 말은 그 누구에게 자주 듣던 말인데.

그리고 이때, 도희 가슴속에 싹 튼 기이한 불길함은 끝도 없이 커가며 도희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     *     *

“이번엔 내 차례야. 난 죽을 거야. 그놈이 날 죽일 거라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왜소한 남자.

뼈만 남은 앙상한 팔다리를 끌어안은 그는 백 실장의 부름도 듣지 못하는 상태였다.

“난데, 난데, 난데. 다음은 난데. 왜 내 말을 안 믿어 주냐고!”

“아저씨 여기 경찰들 많아. 아무도 아저씨 못 죽인다니까?”

아무리 달래도 한 부장은 자신이 죽을 거란 말만 반복했다.

도대체 이 삼엄한 감시 속에서 누가 그를 죽인다는 건지.

불안한 마음에 직접 찾아왔지만, 교도소보다 이곳이 안전한 것은 확실했다.

다만 초점을 잃고 흐릿해진 한 부장의 눈동자가 온전하지 못한 그의 정신을 대변하듯, 그는 상황 파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저씨 정신 차리라고!”

경계심 가득한 모습에 곁으로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저 작게 소리쳤을 뿐인데 한 부장은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 살려 줘!”

섬뜩한 눈빛으로 자신의 뺨을 마구 내려치던 그의 행동은 남자 보호사들이 달려들어 양손을 묶고 나서 겨우 멈춰졌다.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나 죽기 싫어허!”

하지만 그의 입은 재갈을 물리지 않고서야 닫히지 않을 기세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 힘든 백 실장은 흐트러진 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다음은 너라고 외치는 한 부장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진짜 한 부장이 소리친 것일까.

아님, 그녀의 불안함이 만들어 낸 환청이었을까.

“하아…….”

그녀의 입에서 깊고 낮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한 부장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가 죽고, 다음은 자신의 차례일지도.

그렇다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상대가 귀신이든 괴물이든, 넋 놓고 앉아서 당하는 건 그녀의 성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

어쩌면 가장 위험한 방법인 것을 이때의 백 실장은 몰랐다.

*     *     *

범인은 다시 현장을 찾는다더니.

오늘 사건이 일어난 현장 다섯 곳 모두를 돌며 안경으로 살펴봤지만, 그곳에 어둑한 기운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요상한 건 서울에 원래 까마귀가 그리 많았나?

현장에 도착할 때마다 들려온 까마귀 떼의 기괴한 울음소리에 소름 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건 현장의 음침한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외진 골목들엔 원래 새들이 많이 모이는 걸까.

범인이 같다는 걸 증명하듯 현장은 전부 똑같은 모습이지, 증거는 없지, 시간이 갈수록 기분 나쁜 감정만 속에 쌓여 갔다.

어쨌든, 사건 현장을 모두 살핀 도희는 해가 붉게 저무는 초저녁이 되어서야 경찰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주는 방금 막 서에 도착한 도희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우선 이거부터 보시죠.”

“이게 뭐예요?”

도희는 손이 받아든 편지를 펼쳐 들었다.

“김현철한테 온 편지인데, 발신자가 마 부장인 거 같습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도희의 눈동자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한다.

자신을 죽여 버린다고 쓰인 편지를 보며 어느 누가 멀쩡하겠냐마는.

“반드시 죽인다더니, 결국 못 죽였네요.”

삽시간에 냉정을 되찾은 도희가 말했다.

“그리고 이건 김현철이 보내려던 답장입니다. 왜인지 보내지는 않았더군요.”

도희에 대한 적나라한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내용이었다.

“마 부장도, 김현철도 도희씨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던 걸로 보입니다.”

한편으론 이해도 간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못난 놈들이라 끝까지 남 탓하기 바빴겠지.

“그렇네요.”

근데 우주는 왜 이런 편지를 보여준 걸까.

마 부장이 도희 살해 계획을 세웠단 사실은 이미 밝혀졌지 않나.

도희가 생각에 잠긴 사이, 우주는 또 하나의 편지를 도희 손에 쥐어 줬다.

흰 봉투의 겉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깨끗했다.

그리고 도희는 봉투 안에 들어 있던 하얀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어때? 아직도 강도희를 죽이고 싶어?]

단 한 줄이 적힌 편지.

왼손으로 적었는지 아주 삐뚤빼뚤한 악필.

김현철이 죽기 전날 날아든 의문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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