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어디서 들어본 말이지?
서부 경찰서의 회의실.
넓지도 않은 공간에 장정 여럿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보니 숨까지 막힐 지경이다.
광수대와 강력2팀, 경찰 서장에 몇몇 간부까지 참여한 회의다 보니 분위기는 비교적 엄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자에 미처 앉지 못한 강력팀 형사들은 불만스러운 듯 삐딱한 자세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이 굵은 밧줄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판단하에, 범인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너무 무리한 걸까.
잠이 간절한 도희는 몰려오는 하품을 겨우 참으며 서 팀장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여 현재 저희는 어제 일어난 5건의 사건도 이전 밧줄 사건의 범인과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습니다.”
서 팀장의 짧은 브리핑은 금방 끝이 났다.
사실 브리핑이랄 것도 없이 모두가 아는 내용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발표였다.
“그래서 증거는 여전히 그 밧줄 하나가 다란 말인가?”
낮게 깔린 목소리에 불편한 서장의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예. 아직 범인을 특정할 만한 다른 추가 증거는 없습니다.”
서 팀장의 대답에 서장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한 형사가 손을 들고, 서 팀장의 고갯짓에 그의 입이 열린다.
“그전 사건과 다른 범인일 수도 있지 않나? 모방 범죄일 수도 있고. 범행 도구가 비슷하다고 연관 짓기엔 다른 증거가 너무 부족한 거 아닙니까.”
광수대 형사로 보이는 그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가며 옅은 반감을 드러냈다.
“말씀드렸다시피 해당 밧줄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성분 분석 결과 볏짚의 생산지가 모두 같고, 범인이 직접 만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생산지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
서장은 서 팀장의 모든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볏짚이 뭐 구하기 어려운 거라고. 시골 가면 널린 게 볏짚 아닌가. 왜, 우리가 자주 가는 볏짚 삼겹살집에서도 볏짚 쓰잖아?”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손을 들었던 질문자의 옆 사람에게로 쏠렸다.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광수대 형사는 옆자리 형사에게 한 말이었겠지만, 그의 목소리는 좁은 회의실에 빈틈없이 울려 퍼졌다.
“야! 그럼 네가…….”
순간 욱해서 뛰쳐나가는 박 경위의 입으로 이 경위의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입매를 굳힌 이 경위가 작게 고개를 흔들자, 그의 손을 뿌리친 박 경위는 짧은 욕설을 내뱉으며 더욱 비딱하게 벽에 기대섰다.
“사건 발생 주기가 짧고, 피해자 살해 방식과 현장 모습을 미루어 보면 동일범의 소행이 확실합니다.”
서 팀장은 동요 없이 광수대 형사의 말을 반박할 뿐이었다.
“범인이 한 명이라고 추측하고 계신 겁니까?”
끓어오를 뻔한 분위기를 끊어 내기 위해선지, 서 팀장을 도와주기 위함인지.
광수대 팀장인 곽 팀장은 다시 사건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제 일어난 서울 일대 밧줄 살인 피해자들의 사망 시간이 새벽 4, 5시경으로 모두 비슷합니다.”
사망 추정 시간은 방금 들어온 정보인지 모두가 처음 듣는 정보였다.
“조직적 범죄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수사 중입니다.
일순 실내는 소란에 휩싸였다.
“그, 사건 현장이 전부 가깝고, 이동도 쉽던데, 조직 범죄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민머리의 광수대 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단정 지은 적 없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수사가 진행되어야 한단 말이죠.”
‘뭐, 서로 기 싸움하는 그런 분위긴가?’
실내가 웅성대는 동안, 서장과 간부들은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 지으라는 엄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허, 말은 쉽지.’
작게 호흡을 뱉은 도희도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근데 저 여성분은 누구시죠?”
곽 팀장의 곱지 않은 시선이 도희에게 쏘아졌다.
‘엥, 나 말하는 거 같은데.’
뭐라고 소개하지.
“전…….”
어리둥절한 도희가 볼을 긁적이는 사이.
“이분은 저희 팀 사건 자문 도와주시는 강도희씨입니다.”
질문에 답은 도희 곁으로 다가온 우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그 여자.”
하, 그 여자란다.
이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 유명해진 건가.
“이러다 나중엔 무당도 앉혀 놓고 범인 잡자 하겠네.”
좀 전 박 경위의 심기를 건드렸던 목청 큰 사내가 끼어들었다.
“말씀 가려 하시죠.”
서늘한 우주의 목소리에 남자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반박했다.
“그쪽 들으라고 한 말 아닌데.”
“야 너 이 새끼 적당히 좀 하라고 안 했냐!”
“아 뭐! 마음대로 말도 못 해?”
“이 자식이 근데 자꾸 어디서 반말이야. 야!”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박 경위가 남자에게 달려들고 실내가 소란스러워지려는 찰나.
“그만!”
어느새 서로 멱살을 마주 잡은 둘의 행동은 곽 팀장의 외침에 의해 멈춰졌다.
서 팀장은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박 경위에게 그만 떨어지라는 손짓을 보냈다.
‘으휴, 이놈의 피 말리는 기 싸움 좀 그만하지.’
정작 당사자인 도희는 태연했다.
‘아오, 이렇게 나서긴 싫은데.’
결국 보다 못한 도희가 중재를 위해 나섰다.
“이렇게 기 싸움하는 것보단 무당을 앉히든, 기도하든, 뭐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각기 다른 의미를 담은 시선이 도희에게 쏟아졌다.
그 시선에 힘입어 계속 말을 이었다.
“추가 범행에 대한 대책은 안 세우실 건가요?”
“추가 범행이 있을 거라 예상하십니까?”
회의 후 처음으로 입을 연 강 형사였다.
“그럼, 이렇게 날뛰던 놈이 하루아침에 조용해질 거라 생각하시나요?”
실내엔 찬물이 끼얹어진 듯 서늘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이 난리를 쳐놓고 또 바로 설친다고? 에이~ 당분간은 잠잠할 듯싶은데.”
그리고, 비웃듯 실소를 흘리는 광수대 형사를 보며 도희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에이~ 그건 형사님 소망인 듯싶은데.”
그의 낭창한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눈이 커진 그를 외면하며 도희는 앞으로 나섰다.
“분명 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거예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옮겨진다.
“이대로 끝내려고 시작한 건 아닌 거 같거든요.”
이젠 모두가 도희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거 같아요. 피해자들이 전부 범죄자거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던 걸 감안하면요.”
표정이 심각해진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들었다.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 뭐 이런 느낌?”
어디서 들어본 말이지?
“어?!”
지 순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반응을 이해한 강력팀원들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진다.
“오피스텔!”
기사엔 나가지 않은 내용이라 강력팀원들만 아는 내용.
“그러고 보니 그 사건 피해자도 범죄자였는데……”
“무슨 말인지 설명부터 해주시죠.”
강 형사의 물음에 지 순경은 간단한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얼마 전 큰 이슈였던 오피스텔 살인 사건 현장에 [악에는 악]이란 글귀가 쓰여 있었으며, 피해자는 범죄자였다고.
“그때 그놈 잡느라 다들 엄청 고생했는데… 그러고 보면, 증거 없는 것도 이번 사건이랑 비슷하네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잡은 건 아니지.”
우주가 지 순경의 말을 정정했다.
도희가 범인을 잡았단 건 우주만 아는 사실이지만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자수라고 실린 사건을 이들이 잡았다고 할 순 없다.
“세 번째 피해자가 그 사건 범인이죠?”
이젠 피해자가 되어 세상에 없는 그가 범인일 리는 없고.
오피스텔 사건도 워낙 큰 이슈몰이를 했던 사건이라 형사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증거도 없는 상황에 범인이 제 발로 자수해서 허무하게 끝난 사건.
추가로 그의 호텔에서 발견된 증거들이 아니었다면 기소도 못 할 사건.
범죄를 저지른 인격과 자수한 인격이 다르니 마니, 이중인격이다 뭐다 골머리를 앓았던 사건.
그때를 떠올린 강력팀원들의 안색은 점점 더 빛을 잃어 갔다.
“그래서, 강도희씨는 대책이 있습니까?”
곽 팀장의 질문으로 대화는 다시 요점으로 돌아왔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죠? 그런 건 형사님들이 더 잘 아시지 않나. 뭐, 잠복 수사하고 다음 범죄 현장 예측하고 그런 거요.”
“허! 범죄 현장 예측? 지명 수배자가 어디 있는지 알면 그놈들부터 잡았겠지. 아우,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랑 일하려니까 일이 제대로 돌아…….”
또 그놈이다.
사사건건 시비 걸던 목청 큰 광수대 놈.
신나서 떠들던 그의 입은 곽 팀장의 묵직한 시선이 닿자 다물어진다.
“현재 다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더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CCTV고 뭐고 증거가 나올 리가 없지.
“발 뻗고 누워서 다음 사건 기다리는 거?”
계속된 광수대 놈의 시비에 도희도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지금 간밤에 일어난 연쇄 살인으로 세상이 난린데, 다들 기 싸움이나 하시면서 다음 사건까지 가만히 기다리실 건 아니시죠?”
“이봐요. 그래서 우리 팀장님이 대책을 묻잖습니까.”
순간, 도희의 머리를 스치고 간 의문 하나.
“근데 서울 시내에 지명 수배자들이 그렇게 가까이 모여 있을 수 있나요?”
도희가 눈을 빛내며 우주를 바라봤다.
“아시다시피 다들 숨어 살던 지명 수배자들이라 마지막 행적 파악이 어렵습니다.”
하나 같이 번화가 옆 샛길로 이어진 외진 골목.
그리고 고장 난 CCTV.
‘계획적으로 유인하지 않고서야…….’
정말 범인이 도사의 예상대로 요물을 가진 자라면 그들을 유인하거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사건을 벌이는 일쯤이야 간단할 것이다.
그럼 어차피 증거 찾긴 힘들 테고.
‘유인…….’
어?
“유인!”
도희의 외침에 목청 큰 광수대 놈은 실소를 터트렸다.
“설마 지명 수배자들로 그놈을 유인하자는 말인가? 전국에 지명 수배자들이 몇 명인지는 아나 몰라.”
“그 말 아닌데.”
그리고 이어지는 도희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지고 우주의 입술 끝은 크게 휘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