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어린 공작 부인
며칠 전, 불의의 사고로 죽은 20세서유나는 12세 엘리사의 몸에서 눈을 떴다.
“엘리사 아가씨,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루벨린 공작의 부름을 받고 온 하녀는 엘리사를 공작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엘리사는 그녀를 따라가며 창문에 비치는 낯선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부신 금발과 연둣빛 싱그러운 눈을 가진 열두 살의 귀여운 소녀.
그곳엔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스무살 서유나는 오간 데 없었다.
‘내가 엘리사 루벨린이라니………..’
이 몸에 빙의한 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당시, 엘리사는 마차 사고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를 구해 준 것이 루벨린 공작이었다.
하지만 모친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부친인 로엔그린 자작은 이미 3년 전에 죽은 터라 엘리사는 고아가 되었다.
애석하게도 엘리사를 맡아 주려는 친척은 없었다.
로엔그린 자작이 생전에 사업으로 재산을 탕진한 탓에 엘리사의 앞으로 남은 재산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친척들의 입장에서 엘리사는 득이 될 것이 없는 군식구인 셈이었다.
루벨린 공작은 그런 엘리사를 공작성으로 데려왔다.
그는 엘리사의 조부와 약속했던 대로 그들의 손자, 손녀를 결혼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이 될 루벨린 소공작의 이름을 들은 엘리사는 기함했다.
리하르트 루벨린.
그는 전생에 엘리사가 읽었던 19금 피폐 로판 소설 『버드 케이지』 의 악당 서브 남주, 하네스의 아빠였으니까!
즉, 엘리사는 하네스의 엄마가 된다는 뜻이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소설은 전생의 엘리사가 나름 재밌게 읽었던 소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내가 빙의하는 거랑은 얘기가 다르지!’
그것도 원작이 시작될 시점에 이미 죽어 있는 엑스트라라니!
원작 속 엘리사는 조실부모하고 삭막한 공작가에서 자란다.
그 과정에서 애정 결핍으로 남편인 리하르트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다가, 끝내는 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역할이었다.
‘그렇게 죽긴 싫어.’
엘리사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두 번째 삶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엘리사가 죽기까지 아직 10년이나 남았다는 점이었다. 10년이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엘리사와 하녀는 어느덧 공작의 집 무실에 도착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매서운 인상의 풍채 좋은 노인이 책상 앞에 앉은 모습이 보였다.
알버트 루벨린.
명실상부 제국 최고의 권력을 거머쥔 권력가이자, ‘폭풍의 루벨린’이라 불리는 루벨린 공작가의 가주.
그러나 1년 전, 유일한 자식인 아들 내외를 잃은 불행한 남자였다.
무심한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던 루벨린 공작이 궐련을 입에 물며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혼인하거라.”
“……”
“그것이 보잘것없는 너를 우리 가문에 거두어 주는 이유니.”
그의 말에 엘리사는 단번에 의문을 품었다.
그의 말대로, 제국 유일 공작가인 루벨린 공작가에 비하면 엘리사의 가문은 보잘것없었다.
‘그러게. 왜 제국 유일 공작가가 변두리의 한미한 자작가의, 그것도 부모 잃은 소녀를 손주며느리 삼으려는 거지? 공작의 사돈이 되려는 귀족들은 차고 넘칠 텐데.’
하필 자신을 손주며느리로 택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말로는 보잘것없다고 해도, 수많은 귀족 영애들 중에서 나를 우선적으로 선택한 만큼 내가 필요하단 거구나.’
재빠르게 제 입지를 파악한 엘리사는 제 맞은편에 앉아 궐련을 피우고 있는 노인을 흔들림 없이 마주 보았다.
알버트는 주눅 드는 기색 없이 저를 올곧게 응시하는 연둣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여자들의 삶이란 참 편하지. 안락한 집에서 애만 낳으면 남편이 쌓아 놓은 모든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으니 말이야.”
그는 어떻게든 엘리사의 가치를 깎아내려 자신에게 고분고분하게 굴도록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제 겨우 초경을 시작한 애한테 아이부터 낳으라니.’
가부장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자란 여자아이라면 그의 말에 수긍했을지도 모르지만, 전생의 기억이 있는 엘리사는 아니었다.
엘리사는 이어지는 알버트의 헛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속으로 이죽거렸다.
‘남자들의 삶이란 참 편하지. 바깥일 한답시고 이리저리 허튼짓하고 돌아다니다 집에 오면 아내가 꾸려 놓은 화목한 가정을 누리고 살 수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두 번째로 얻은 목숨은 소중했다.
“각하.”
그때, 누군가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알버트의 보좌관이었다.
그의 뒤로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결혼 서약의 증인으로 불려 온 모양이었다.
보좌관은 알버트에게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소공작께서 오는 길에 도적 떼를 만나 늦으신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알버트는 물고 있던 궐련을 내려놓았다.
“도적 떼? 어제저녁에 근방에 도착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랬습니다만…….”
“큰길에 도적이 없을 텐데. 그놈들이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그것이, 아무래도 소공작께서 산길로 오시는 듯합니다.”
“큰길을 두고 굳이 산길로?”
“영지의 치안에 힘쓰신다고….”
알버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리하르트는 이 결혼이 어지간히 불만인 모양이었다. 평소 하지도 않던 짓을 하며 시간을 끄는 걸 보면.
“쓸데없는 짓거리를.”
알버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옆에서 얘기를 같이 전해 들은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지각으로 이 결혼이 며칠, 아니 하루만이라도 미뤄지길 바랐다. 좀 더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녀의 시조부가 될 남자의 인내심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 봐야 저녁때가 되면 도착하겠지.”
그는 앞에 놓인 결혼 서약서에 건성으로 대리 서명하고 엘리사에게 서류를 밀었다.
“자, 여기 서명해라.”
그의 옆에 있던 보좌관이 공작에게서 깃펜을 받아 엘리사에게 건넸다.
리하르트의 서명 칸은 이미 알버트가 한 서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제 엘리사가 서명을 하면 두 사람은 결혼한 사이가 된다.
엘리사는 공작성 바깥의 가난한 삶과 공작성 안의 풍족한 삶을 저울질했다.
‘원작에서 엘리사가 죽던 시점까지는 아직 10년도 넘게 남았어. 그동안 아이는 안 낳고, 리하르트에게 집착하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것만 지키면 풍족하고 아늑한 공작성에서 지내다가, 이혼할 때 빵빵한 위자료도 한탕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고민은 짧았다. 엘리사는 서명 칸에 아직은 어색한 제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 결혼의 증인으로 불려 온 사제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 후 입을 열었다.
“이로써 리하르트 루벨린과 엘리사로엔그린은 아렌느 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부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앞길에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엘리사는 사제의 증언을 들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 집, 딱 8년만 버티고 한탕 크게 챙겨서 뜬다.’
그렇게 신랑 없는 결혼 서약식이 끝났다.
*
그날 밤, 엘리사의 목욕 시중을 든 하녀들은 엘리사를 방으로 안내해 주고 사라졌다.
그녀가 안내받은 방은 공작성에 도착한 후, 열흘간 지냈던 손님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화로웠다.
열흘간 머물렀던 방도 공작성의 명성에 걸맞게 호화롭긴 했지만, 이 방과 견주어 보자면 작고 무난했다.
‘역시 안주인이 될 사람의 방은 다른 건가.’
엘리사는 침실을 쭉 둘러보았다.
침실과 이어진 접견실 벽면은 언뜻 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듯한 검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귀부인의 방에 장식하기엔 다소 이질적인 물건들이었으나, 엘리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침대로 향했다.
침대는 엘리사가 전생에 쓰던 방만큼이나 넓고 컸다.
엘리사는 침대에 누웠다. 비싼 침대답게 푹신하고 아늑했지만,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잠이 오긴커녕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밖이 조용한 걸 보니 아직 성에 도착하지 않은 건가?’
엘리사는 이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는 제 남편을 떠올렸다.
‘오늘은 안 오면 좋겠다.’
남편이 될 소년에 대한 호기심도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원작 속 리하르트는 남자 주인공과 대립하는 적대 가문의 수장이었다.
원작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라 그의 성격이 어떤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하네스의 회상 속에 나오는 그는 썩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결혼을 한 이상 아예 안 마주칠 순 없겠지만, 최대한 늦게 마주치고 싶었다.
“……잠이 안 와.”
엘리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는 사이,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 될 이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역시 오늘은 안 오려나..’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긴장이 풀린 엘리사는 이윽고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벌컥 -
엘리사는 방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번뜩 잠에서 깨어났다.
구름에 달이 가려진 컴컴한 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을 옅은 불빛 서너 개만이 밝히고 있었다.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엘리사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누구지………?’
그때, 희미한 빛을 등진 그림자 하나가 엘리사에게 성큼 다가왔다.
살짝 흐트러진 칠흑 같은 흑발과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핏빛의 섬뜩한 눈까지.
‘히익! 아, 악마?’
막 잠에서 깬 엘리사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 섬뜩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엘리사는 졸도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숨이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