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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2화 (2/164)

2화

침대에 누우려 다가오던 리하르트역시 이불 위로 빠끔히 드러난 연듯 빛 두 눈과 마주치자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여느 때처럼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제 방에 누군가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듯 잔뜩 겁먹은 눈을 하고서.

잠깐의 정적 속, 달갑지 않은 존재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고운 미간을 팍 일그러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쥐방울만 해서 보이지도 않는군.”

그러고는 다시 방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

하지만 방문은 잠겨 있었다. 그러잖아도 싸늘하게 굳어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더욱더 굳어졌다.

철컥철컥.

몇 번을 더 돌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미친놈들.”

리하르트는 욕설을 지껄이며 주먹으로 닫힌 방문을 쾅! 내려쳤다.

‘헉’

엘리사는 굉음에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그가 악마가 아닌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 방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 그의 방이라는 사실도.

그때였다.

‘바람……?’

침대 주위로 거센 바람이 모여들었다.

엘리사는 창문이 열려 있나 싶어 창문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창문은 바람에 흔들리긴 해도 굳건히 닫혀 있었다.

그것을 본 엘리사는 깨달았다.

‘저게 루벨린의 힘이구나.’

리하르트의 주위로 모여드는 저 바람이 소설 속 하네스가 사용하던 힘과 같다는 것을.

루벨린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에겐 간혹 가문의 힘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곤 했다. 그들은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그에 기반한 마법을 썼다.

‘폭풍의 루벨린’이라는 칭호는 그 힘을 일컫는 것이었다.

리하르트와 그의 아들인 하네스는 그 힘을 이어받은 자손들 중 하나였다.

‘방문을 부수려나?’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힘을 사용해 무슨 짓을 하진 않을까 조마조마해 하며 지켜보았다.

“…죽여 버린다.”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말과는 달리 바람을 도로 흩트려 버렸다.

엘리사는 발걸음을 움직이는 리하르트를 보고 흠칫 놀라 다시 이불을 얼굴까지 덮었다. 두 눈만 빠끔히 내어놓고서.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리하르트는 침대가 아닌 소파로 가서 털썩 누웠다.

엘리사의 위치에선 소파 밖으로져나온 다리만 보였다. 침대로 올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래도 남편인데,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좋겠지……?’

잠시 리하르트의 동태를 살피던 엘리사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엘리사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엘리사 로엔그린이라고 해요. 그리고…… 오늘부터 엘리사 루벨린이 되었고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루벨린’이라 지칭하는 건 ‘내가 네 아내인데 인사 좀 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다못해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직 깨어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소파 밖으로 삐져나온 리하르트의 다리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매가게슴츠레해졌다.

나쁜 앤지 착한 앤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싸가지가 좀 많이 없다는 것.’

뭐, 열다섯 살이면 누구나 가슴속에 흑염룡 한 마리쯤 품고 있을 나이지.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다리를 노려보다, 콧김을 내뿜으며 침대에 도로 누웠다.

그렇게 첫날밤이 지나갔다.

*

다음 날 아침, 리하르트가 공작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막 궐련에 불을 붙이고 있던 알버트는 놀란 기색 없이 무심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맞이했다.

“그러잖아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때맞춰 왔구나.”

“취소하십시오.”

“무엇을?”

그는 리하르트가 생략한 단어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리하르트는 짓씹듯이 대답했다.

“이 결혼, 취소하십시오.”

“이미 여신의 앞에서 맺어진 서약은 그리 쉽게 무를 수 없다.”

“저는 그 서약을 진행한 적 없습니다.”

“그래서 무르고 싶다?”

그의 물음에 리하르트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알버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궐련의 연기를 들이켰다가 내쉬고는,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느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 아이의 외관이 마음에 들지 않더냐? 그 아이 정도면 아직 어리긴해도 꽤 예쁘장한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네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지?”

그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알버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면, 너도 네 아비처럼 사랑하지 않는 이와 결혼할 수 없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운운하려는 것이냐? 장차 루벨린의 주인이 될 자가?”

“……”

“뭐, 그래. 그것도 좋다. 일단 황녀부터 떼어 낸 후에 저 계집은 내치면 그만이니.”

“…….”

“그러니 성인이 될 때까진 함께 지내라. 그사이에 후계까지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그다음엔 네 마음에 드는 계집을 안주인으로 들이든 말든 -”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리하르트의 언성이 높아지며 그 주위로 거센 바람이 모여들었다. 그 바람에 책상 위의 서류들이 정처 없이 날아다녔다.

옆에 있던 알버트의 보좌관은 다급히 서류를 잡으려 퍼덕였으나, 혼자서 해결하기엔 무리였다.

상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리하르트를 마주했다.

리하르트를 보는 핏빛처럼 붉은 눈은 손자를 바라보는 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싸늘했다.

“너는 우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다. 네겐 반려를 맞이하고 이 가문의 대를 이을 의무가 있어.”

“…….”

“네 자리, 지금 네가 누리는 그 모든 것들. 전부 네가 내 후계자이기에 주어진 것이다. 후계자로서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면 넌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어.”

협박이나 다름없는 그의 말에 리하르트의 입매가 비틀렸다.

조부는 자신을 손자가 아니라, 그저 가문의 대를 이을 종마로 보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살기 어린 눈으로 제 조부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 자리, 제가 언제 바란 적 있습니까?”

그 목소리엔 그를 향한 짙은 분노와 혐오가 묻어났다.

단 한 번도 루벨린의 후계자가 되길 바란 적 없다.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이어받은 이 힘도 없앨 수 있길 바랐다.

“그 쥐방울만 한 애랑 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다시는 제 방에 들이지 마십시오.”

리하르트는 으름장을 놓고 돌아서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대로 나가려던 리하르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 앞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엘리사가 서 있었다.

‘들었나.’

리하르트는 눈앞의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버트와 자신이 나눈 대화 내용은 그리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잠시 엘리사의 표정을 살피던 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엘리사에게서 시선을 뗐다. 어찌 됐든 제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엘리사는 묵례를 하고 리하르트를 지나쳐 집무실에 들어섰다.

“부르셨어요?”

“리하르트, 너도 들어라.”

알버트는 나가려는 리하르트를 붙잡아 세웠다.

무시하고 그대로 나가려던 리하르트는 눈을 감고 한숨을 삼킨 후, 마지못해 엘리사의 옆에 섰다.

알버트는 무심한 눈으로 엘리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신혼 첫날 첫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엘리사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하녀에게 듣기로, 신혼 첫날 신혼부부는 가문의 어른에게 인사를 올리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하지만 엘리사가 잠에서 깼을 때리하르트는 이미 사라진 뒤였고, 식당에 알버트도 없었다. 그래서 알버트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건만, 보고는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한숨을 삼키며 한바탕 잔소리가 쏟아지겠거니 체념했다.

그러나 알버트는 예상과 달리 엘리 사와 리하르트를 이해했다.

“뭐, 그래. 오늘 아침에야 겨우 서로 얼굴을 제대로 봤을 테니 서먹할 수 있지.”

“…….”

“한동안 같은 방에서 생활하다 보면 서로 익숙해질 거다. 그렇게 서서히 가까워지면 될 테지.”

그에 리하르트는 한껏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같은 방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부부가 한 침대를 쓰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무엇이 그리 문제냐?”

알버트도 리하르트도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듯 팽팽했다.

알버트를 노려보던 리하르트는 말없이 휙 나가 버렸다. 엘리사 등 뒤의 문이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쾅!

닫혔다.

알버트는 닫힌 문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엘리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네게 전해 줄 것이 있다. 애런, 가져오도록.”

그가 옆에 있던 보좌관을 부르자, 보좌관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책 하나를 엘리사에게 건넸다.

엘리사는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내일부터 그 책에 대해 가르쳐 줄선생이 올 거다. 내용을 미리 숙지해 두면 도움이 될 테니, 성실히 배워 차기 가주를 모시도록 해라.”

“네, 각하.”

엘리사는 알버트에게 예를 갖추고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받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아내의 덕목』

읽으나 마나 가부장적인 가치관에서 나온 고리타분한 내용들이 잔뜩 적혀 있을 것 같은 제목이었다.

엘리사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방으로 향했다.

*

엘리사는 그날 밤도 하녀들에게 등 떠밀려 리하르트의 방에 보내졌다.

방으로 들어온 엘리사는 긴장한 채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없나…?’ 그때, 엘리사의 눈에 무언가가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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