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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3화 (3/164)

3화

어제 리하르트가 누워 있던 그 소파 밖으로 삐죽 삐져나온 익숙한 다리가 있었다.

엘리사는 오늘 낮, 우연히 엿들었던 알버트와 리하르트의 대화를 떠올렸다.

‘너는 우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다. 네겐 반려를 맞이하고 이 가문의 대를 이을 의무가 있어.’

“……,”

“네 자리, 지금 네가 누리는 그 모든 것들, 전부 네가 내 후계자이기에 주어진 것이다. 후계자로서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면 넌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건 평범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가 아니었다. 엘리사가 보기에도 알버트는 리하르트를 그저 가문의 대를 이을 종마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의 뜻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엘리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지.’

엘리사는 한 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잘되면 내 편 하나 없는 공작가에서 든든한 아군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이혼 전 임시 아군이긴 하지만.

“저, 소공작님.”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 한 번 더 인사를 할 생각으로 그가 누워 있는 소파로 천천히 다가섰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그는 이미 방을 나간 뒤였고, 낮 동안엔 리하르트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사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엔 경황이 없었죠? 다시 인사드릴게요. 저는……….”

“……워.”

“네?”

“시끄럽다고.”

소파를 넘어오는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우리 흑염룡께서 어지간히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네.”

엘리사는 입술을 비쭉이며 소파를 쏘아보았다. 오늘도 대화를 하긴 무리였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엘리사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리하르트는 오늘도 소파에서 잘 생각인 듯했다.

리하르트가 누운 소파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엘리사는 이윽고 잠에 빠져들었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알버트의 말대로, 그다음 날부터 엘리사는 신부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그 수업이 지루하고 지겨웠지만, 수업만 끝나면 온종일 자유시간이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오전에 수업을 들은 엘리사는 점심을 먹고 평소처럼 성 내부의 도서관으로 왔다.

루벨린 성의 도서관은 제국에서 제 일가는 가문의 소유답게 크기도 어마어마했고, 보유한 책의 가짓수 또한 방대했다.

아직 이 세계가 낯선 엘리사에게 큰 도움을 줄 장소였다.

“흐음, 오늘은 역사서를 읽어 볼까.”

역사서는 책장의 제일 위 칸에 있었다. 엘리사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높이였다.

엘리사는 까치발을 들고 바둥거리며 책을 꺼내려다, 이내 포기하고 사다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도서관을 전담하는 사서에게 부탁하면 어렵지 않게 꺼내 주겠지만, 그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 것인지 엘리사가 도서관에 들어올 때부터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고 도서관 밖의 하녀나 하인들을 불러오기에 나가는 것이 더 번거로웠다.

“찾았다!”

엘리사는 바로 뒤쪽 책장에서 사다리를 찾아 끌고 왔다. 그리고 사다리를 올라가 원하는 책을 꺼냈다.

그때였다.

끼익—

멀리서 도서관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루벨린 본성에는 두 개의 도서관이 있었다.

하나는 성의 모든 사람이 이용하는 공개된 도서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주와 그의 가족들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었다.

지금 엘리사가 있는 곳은 루벨린의 이름을 가진 이들만 사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었다.

고로 현재 이 도서관에 출입이 허용된 사람은 이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둘과 알버트, 리하르트, 그리고 엘리사 자신뿐이었다.

엘리사는 알버트도, 리하르트도 가급적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책을 가슴팍에 안고 슬금슬금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도서관에 볼일이 있어 온 사람이라면 곧장 책장을 살펴보러 갔을 테니, 그 틈에 도서관을 나가면 될 터였다.

하지만 출입문을 향해 가던 엘리사는 출입문 근처 책상에 엎어져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곱게 감긴 눈을 보니 자고 있는 듯했다.

‘설마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잤나?’

하기야, 생각해 보면 아무리 소파가 푹신하다고 한들 그 좁은 소파에서 편히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당히 침대를 차지하고 잔 것이 뒤늦게 미안해졌다.

‘추울 것 같은데 담요라도 덮어 줄까.’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근처의 담요를 들고 리하르트에게 다가갔다.

혹여나 리하르트가 깨기라도 할까봐 발뒤꿈치를 들고서.

가까이 다가가자, 무방비하게 잠든 리하르트의 얼굴이 보였다.

결 고운 흑발 아래로 곱게 드리운긴 속눈썹과 곧게 뻗은 콧날, 남자 아이치곤 붉은 입술.

아직 앳된 티가 역력한 그 얼굴은 완벽히 무해해 보였다.

첫날밤에 보았던 악마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쁘다.’

잘생겼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얼굴에 감탄하고 있던 그때, 곱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리며 핏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한기를 머금은 그 눈을 마주친 엘리사는 담요를 펼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순간, 리하르트의 손이 엘리사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뭐 하는 거지?”

“다, 담요 덮어 주려고……. 추우니까………. 감기 걸릴까 봐…….”

당황한 엘리사는 한 박자 늦게 떠듬떠듬 대답했다.

그런 엘리사를 서늘한 눈으로 훑어 본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팔을 팽개치듯 놓아주었다.

“난 그런 거 안 걸려. 너처럼 비실비실하고 약한 애들이나 걸리는 거지.”

“…….”

“걸리적대지 말고 가.”

리하르트는 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고개도 엘리 사와 반대 방향으로 돌려 버렸다.

‘어휴, 이 흑염룡. 허세하고는, 좀 친하게 지내자는데도 비협조적이네.’

엘리사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입 모양으로 리하르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리하르트를 한대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그때, 타이밍 좋게 리하르트가 몸을 뒤척거렸다.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다행히 리하르트는 돌아보지 않았다.

‘뭐, 그래도… 아직 애니까.’

그것도 한창 마음속에 폭풍을 안고 있을 나이니까.

엘리사는 들고 있던 담요를 리하르트의 어깨에 살포시 덮어 주었다.

리하르트는 그새 잠든 건지 아니면 포기한 건지 미동도 없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꺼낸 책을 집어들고 조용히 도서관을 나갔다.

고요한 도서관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리하르트의 눈이 떠졌다가, 이내 다시 감겼다.

*

그날 밤, 침실로 온 리하르트는 소파로 향했다. 이제 그 자리가 제 자리인 듯 익숙해졌다. 여전히 불편하긴 했지만.

소파에 눕자, 침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자그마한 인기척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도서관에서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려는 듯한 발걸음이었지만 - 그래 봤자 다 느껴졌지만-이번엔 기척을 숨기려는 기색이 없었다.

리하르트는 그 움직임에서 엘리사가 제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리하르트는 눈을 감은 채 소파 너머로 다가오는 기척에게 말했다.

“………그냥 자라.”

하지만 엘리사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리하르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리하르트는 감고 있던 눈을 짜증스레 뜨며 입을 열었다.

“그냥 자라고 했을 텐-”

“안 잡아먹을 테니까 침대에서 같이 자요.”

“…뭐?”

엘리사는 겁먹지 말라는 듯 리하르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만 잡고 잘게요.”

제 손보다 훨씬 조그마한 손을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누굴 잡아먹는다는 건지.’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웃음에 긴장했다. 즐거움에서 우러난 웃음이 아닌,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리하르트는 표정을 싹 굳히고 싸늘하게 물었다.

“공작이 시켰나?”

“네?”

“이런 식으로 날 유혹하라고?”

엘리사는 당황했다.

리하르트가 제게 까칠한 건 흑염룡때문이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생각한 탓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를 공작이라고 지칭하다니……. 사이가 많이 안 좋나?’

어쨌든 오해는 쌓아 두어 좋을 것이 없었다.

엘리사는 다급히 해명했다.

“소공작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전 공작 각하와는 무관해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이미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전 얼마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갈 곳이 없던 차에, 공작 각하께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거 고요.”

하지만 엘리사의 설명에도 리하르트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잘못을 들킨 이들이 제일 먼저 꺼내는 이야기가 가족사야.”

‘……속고만 살았는지 세상에 불신이 가득하네.’ 엘리사는 자신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가진 것 없는 열두 살짜리 어린애가 혼자 길거리에서 사는 것보단 여기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결혼에 동의한 거예요.”

“공작이 나를 유혹하기 위해 네게 그렇게 말하라 지시한 거라면?”

“설령 소공작님의 추측이 진실이라 한들 달라지는 게 있나요?”

“무슨 뜻이지?”

“저는 소공작님을 힘으로 제압할 수 없어요. 그러니 제가 유혹하더라도 소공작님이 제게 넘어오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엘리사의 말은 일종의 도발이었다.

너만 잘 버티면 된다, 그렇게 너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없느냐는 도발.

이번엔 리하르트도 반박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하르트의 힘이라면, 엘리사가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쳐 낼 수 있었다.

엘리사는 그 기회를 잡아 원작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황실에서는 루벨린의 힘을 노리고 황녀 전하와 소공작님을 혼인시키려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공작 각하께서 저를 데려오신 거고요.”

아렌시아 제국에는 건국에 기여했던 네 개의 가문이 있다.

함께 폭정을 제압하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제국을 세운 네 가주는 누가 황제가 될 것인지를 두고 논의했다.

그들 중 황제가 되겠다 나선 것은 카이로트 가문과 루벨린 가문이었다.

절친한 사이였던 그들은 카이로트가문이 황좌를 얻기로 합의한 뒤, 영원한 맹세를 했다.

카이로트 황가는 제국민을 잊지 않는 성정을 펼치고, 루벨린 공작가는 언제나 황제의 반대편에 서서 그가 폭정을 할 수 없도록 견제하기로.

목숨을 나눈 두 친구는 대의를 위해 서로의 영원한 적이 되었다.

역사서에서는 그들의 우정과 의리를 추앙했으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저 서로를 향한 견제만이 남은 상태였다.

황가는 더욱 강해지고자 루벨린의 힘을 탐냈고, 루벨린은 황가에 먹히지 않고자 힘을 길렀다.

그 관계는 원작에서도 계속 지속되었기에, 엘리사는 두 가문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소공작님이 황녀 전하와 혼인을 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어차피 누군가는 소공작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제법 예리한 이야기를 꺼내자, 내내 무심한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던 리하르트의 눈빛에 일말의 흥미가 일었다.

‘어리숙한 줄 알았더니, 제법이군.’

리하르트의 눈빛이 바뀐 걸 눈치챈 엘리사는 본론을 내밀었다.

“제가 소공작님께 바라는 건 아이나 공작 부인의 자리가 아니에요.”

“……”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이 결혼을 유지해 주세요. 성인이 되면 제발로 공작가를 떠나겠습니다.”

그때쯤이면 황녀도 제 짝을 찾아갔을 것이다.

리하르트는 담담하게 제안하는 엘리사의 연둣빛 눈을 빤히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 제안은 받아들이지. 다만……….”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떠나겠다던 그 약속은 반드시 이 행해 주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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