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음 날 아침, 리하르트는 불현듯 위기감을 느끼고 눈을 떴다.
커다란 침대에서 잠들었던 자신이 침대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이불은 어디 갔는지, 피부에 와 닿는 기운이 서늘했다.
‘몸부림을 심하게 쳤나.’
예닐곱 살 때는 자면서 한 바퀴 돌기도 했던 것 같지만, 그 이후로는 죽은 듯이 자는 편이었다.
리하르트는 제 잠버릇에 의아해하며 등 뒤에 뭉쳐져 있는 이불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이불이 말랑했다.
‘이불이… 말랑?’
뭔가 이상했다.
리하르트는 자신이 잡은 것을 보고는 흠칫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것은 사람의 팔이었다.
다급히 뒤를 돌아보자, 제 등에 찰싹 붙어 자고 있는 엘리사가 보였다.
“하?”
이제 보니 이불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리하르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엘리 사의 팔을 떼어 냈다.
지난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넓은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물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로.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엘리사가 리하르트에게 가까이 다가오다 못해 그를 침대 밖으로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몇 바퀴를 구른 거야?’
이만큼 굴렀으면 멀미 났겠는데.
“손만 잡고 잔다더니.”
리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사를 떨쳐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온기가 떨어지자, 한기를 느낀 엘리사가 웅얼거렸다.
“우으……. 추워……….”
그러잖아도 자그마한 몸이 더 작게 옹송그려졌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무심히 돌아서 방을 나갔다.
하지만 문은 닫히기가 무섭게 다시 열렸다.
리하르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침대 가까이 다가와 엘리사의 앞에 섰다.
엘리사는 여전히 춥다고 웅얼거리며 몸을 옹크리고 있었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한 침대에서 자지 않는 며칠 동안은 이렇게 몸부림을 심하게 치는지 몰랐다. 오늘도 그대로 모른 척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떨어져 있던 이불을 주워 들어 엘리사에게 덮어 주었다.
뭉친 이불을 펴 주지는 않았다. 이불을 덮어 주는 것만으로도 리하르트로선 대단한 선심이었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손을 털고 돌아 섰다.
*
오전에 수업을 듣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엘리사는 남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와 읽으며 보냈다.
오늘도 어김없이 심심했던 엘리사는 여러 가지 책을 빌려 와 방에서 읽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사의 눈에 무언가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엘리사는 책장 너머로 왔다 갔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어린 하녀를 슬쩍 훔쳐보았다.
‘이름이… 앤이라고 했던가?’
앤은 다른 하녀들에 비해 나이가 유난히 어렸는데, 집사의 말로는 알버트가 나름 엘리사를 생각하여 배치한 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보통 하녀들은 사람마다 잘하는 한가지 일을 전담해서 한다. 그게 훨씬 효율적이니까.
그런데 오늘 앤은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했다. 침대 정리부터 빨랫감나르기, 식사 시중, 먼지 털기, 걸레질 등 전부 다.
‘저 애는 왜 아까부터 혼자 저러고 있는 거지?’
엘리사가 알기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앤은 침구 정리 담당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엘리사는 책을 읽는 척하며 앤을 주시했다. 모든 일을 도맡아 하기에 잘하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걸레 빠는 물을 엎지르고는 당황하여 엘리사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고, 팔이 닿지 않는 곳의 먼지를 터느라 의자에서 여러 번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엘리사는 한 가지 가능성을 추측했다.
‘어리다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거야!’
확신한 엘리사는 책을 덮고 앤에게 다가갔다.
“앤, 왜 걸레질을 네가 하고 있니?”
“네, 네?”
걸레질을 하고 있던 앤이 죄라도 지은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엘리사를 올려다보았다.
“걸레질을 왜 네가 하고 있느냐고 물었어. 넌 원래 침구 정리 담당이잖아?”
“아……. 오, 오늘은 제가 걸레질도 하겠다고 했어요.”
“빨랫감 나르는 일이랑 먼지 터는 일도?”
“네, 네!”
“왜 네가 그 일을 다 하겠다고 했니? 빨랫감 나르는 일은 리나의 담당이고, 먼지 터는 일은 줄리아의 담당이잖아?”
“아, 그게…….”
앤은 선뜻 말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엘리사는 그런 앤을 빤히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종용했다.
엘리사의 눈치를 살피며 잠시 머뭇거리던 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언니들이 며칠 전에 하루만 일을 대신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잘 못하는 바람에 언니들이 하녀장님께 혼이 났대요. 그래서, 미안해서 제가 오늘 하루도 언니들의 일을 대신해 주기로 했어요. 그런데……….”
앤은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뚝뚝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내일도 언니들이 저 때문에 혼나면 어떡하지요?”
엘리사는 기가 막혔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애먼 애한테 떠맡겨 놓고 혼났다고 또 일을 떠맡겨? 아니, 애초에 하녀장에게 혼이 난 게 맞긴 한 건가? 그냥 거짓말 아냐?’
보아하니, 내일도 혼이 났다고 하며 앤에게 일을 떠맡길 태세였다.
엘리사는 앤의 손에서 걸레를 빼앗고 앤을 테이블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자신이 먹고 있던 샌드위치 반쪽을 앤에게 주었다.
“일은 그만하면 됐어. 이거 먹고 있으렴.”
엘리사는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는 앤을 뒤로한 채 방을 나와 알버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엘리사의 걸음걸이에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엘리사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집 무실 문에 노크했다.
“들어와라.”
곧장 허락이 떨어졌다.
엘리사는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알버트는 예상치 못한 엘리사의 방문에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켰다.
“무슨 일이냐.”
“각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엘리사는 공손하게, 그러나 단호한 눈빛으로 요구했다.
“제 전담 하녀를 교체해 주세요.”
그 말에 알버트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전담 하녀를 교체해 달라…….
왜?”
“침구 정리도, 식사 시중도, 빨랫감정리도, 걸레질도 전부 잘하는 하녀로 교체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전담 하녀는 침구 정리만 잘하거든요.”
“일마다 전담 하녀가 따로 있을 텐데?”
“그런가요? 그런데… 오늘은 한 명이 혼자서 다 하고 있던걸요. 그래서 느리고, 정리도 제대로 안 되고요.”
알버트는 또박또박 자신의 요구 사항을 말하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보다가 옆에 있던 보좌관 애런을 불렀다.
“애런.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 와라.”
“예, 각하.”
애런은 곧장 집무실을 나갔다. 잠시 집무실 문 쪽으로 향했던 알버트의 시선이 다시 엘리사에게로 돌아왔다.
“소공작 부인의 생활에 불편이 있어선 안 되지.”
“……”
“이번 일은 내 선에서 처리할 테니, 이만 돌아가 봐라.”
“감사합니다, 각하.”
엘리사는 생긋 웃으며 화답하고 돌아서 집무실을 나왔다.
‘공작에게 나는 필요한 패야. 언제 든 버릴 수는 있지만, 아무런 대책없이 당장 버리기엔 아까운 패지.’
그러니, 그런 제 입지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엘리사는 집무실 근처 복도에 몸을 숨기고 애런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애런이 돌아와 알버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각하, 해당 하녀들은 현재 광장에 쇼핑을 하러 나갔다고 합니다.”
“일을 해야 할 시간에, 한가하게 광장에 쇼핑이나 하러 나갔단 건가.”
“어찌할까요?”
“집사를 불러와라.”
그 이야기를 엿들은 엘리사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하루에 할당된 노동 시간 중에 일을 끝내지도 않고 외출을 했으니, 공작도 분명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돌아서 방으로 향하는 엘리사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루벨린 공작가는 풍족했다.
알버트는 엘리사가 돈을 가져가 무엇을 사든, 얼마를 쓰는 일절 신경쓰지 않았다.
덕분에 엘리사는 편하게 이 세계의 법도를 공부하고, 이혼 후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특히 머릿속에 떠오른 사업 아이디어는 공작가 일원의 지위가 있을 때 다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하던 엘리사는 신부 수업 대신 재무수업을 듣고 싶다고 했다.
알버트는 달갑지 않아 했으나, 그를 설득하는 건 아주 쉬웠다.
‘이 기회에 리하르트 님과 같이 재무 수업을 들으며 가까워지고 싶어요.’
그러자 알버트는 곧장 허락했다.
마침 리하르트도 최근에야 재무 수업을 시작했으니 같이 들어도 크게 방해가 되진 않을 터였다.
‘이걸 배워 두면 나중에 위자료 받아서 사업할 때 도움이 되겠지.’
엘리사는 새 노트와 주판을 품에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재무 수업을 하는 방에 도착했다.
먼저 방에 도착해 있던 리하르트는 위풍당당하게 들어서는 엘리사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긴 왜 왔어?”
“그래도 명색이 공작가의 안주인인데, 재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엘리사는 방 한쪽에 있는 여분의 의자를 끌고 와 리하르트의 옆에 앉았다.
며칠 전부터 은근슬쩍 말을 놓고 있었지만, 리하르트는 딱히 그것을 꺼리진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재무를 배워 두면 네가 할 일을 하나쯤 덜어 줄 수 있을 거야.”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