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윽고 문이 열리고 재무 선생이 들어왔다. 그는 훤히 빈 정수리에 눈이 작아 보일 만큼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노인이었다.
‘왠지 조별 과제 많이 내고, 성적은 C만 잔뜩 줄 것처럼 생겼어.’
엘리사는 생긴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를 보니 정말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스승을 처음 뵙는 자리이니 예를 갖추어야 했다.
엘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스승님께 재무를 배우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각하께 작은 마님의 학구열에 대해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열성적인 학생을 가르치게 되어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재무 선생은 곧장 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주판을 다루는 법을 간단히 알려 준 후, 엘리사에게 문제를 냈다.
“그럼 엘리사 님. 326과 15, 739를 표시해 보시겠습니까?”
“아, 네!”
나름대로 주판을 굴리던 엘리사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러고는 리하르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자신이 낸 답이 맞는지 그의 반응을 통해 확인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런데 리하르트가 무심한 반응을 보이자, 엘리사는 다시 주판을 점검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리하르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엘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새하얗고 길쭉하지만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조그마한 엘리사의 손을 덮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손가락을 잡고 주판을 움직였다.
“15는 제대로 했고, 326은 이렇게.
739는 이렇게.”
“정확하십니다, 소공작님. 복습을 제대로 하셨군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재무 선생이 리하르트를 칭찬했다. 엘리사역시 입 모양으로 ‘고마워’라며 웃었다.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웃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 엘리사의 손을 잡고 있음을 깨닫고 손을 뗐다.
“…수업 제대로 들어.”
고개를 휙 돌리는 리하르트의 귀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복습하는 거라고.’
리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엘리사는 배우는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익히고 나면 그것을 제대로 응용할 줄 알았다.
리하르트는 내심 그 능력을 높이 샀지만, 말해 주진 않았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같은 수업을 듣는 학우가 생겼으니 소공작님께서도 좀 더 흥미가 붙겠군요. 서로에게 라이벌이자 동료로서 경쟁하고 도우며 배워 나가시길 바랍니다.”
재무 선생은 수업을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 방에 엘리사와 리하르트 둘만이 남겨졌다.
리하르트는 주판과 노트를 책상에 둔 채 그대로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 리하르트를 엘리사가 불러 세웠다.
“수업 끝나고 앤이랑 같이 영지를 구경하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바빠.”
리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는 척조차 하지 않고 딱 잘라 대답하며 방문을 열었다.
“소,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마침 엘리사를 찾아온 앤이 리하르트를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앤은 외출복 차림에, 엘리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외출용 로브를 들고 있었다.
엘리사는 앤이 건네주는 로브를 받으며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쿠키 사다 줄까?”
“그런 건 어린애들이나 좋아하는 거지.”
그 말은 즉, 쿠키를 좋아하는 엘리 사를 어린애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다.
‘너도 어린애거든!’
이제 한배를 탔으니 살가운 사이는 아니라도 잘 지내길 바랐건만, 리하르트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 그래? 그럼 사 와서 눈앞에서 먹어야겠다. 하나도 안 줘야지.”
“마음대로 해.”
리하르트는 예의 무심하게 대꾸하고 방을 나갔다.
엘리사는 그 얄미운 뒤통수를 흘겨보다가 돌아섰다.
“가자, 앤.”
*
엘리사가 영지를 구경하러 가고 몇 시간 후, 바람이 매서워졌다. 하늘에 가득했던 맑은 구름도 점점 탁해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다시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팔랑팔랑.
무미건조하게 책장을 넘기던 리하르트의 미간이 차츰 일그러졌다.
사실 리하르트는 산길을 통해 영지로 올 때, 도적 떼보다는 막 봄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하는 몬스터들과 더 많이 마주쳤었다.
‘그래도 몬스터들이 민가까지 내려온 적은 거의 없었는데.’
그런데 신경이 쓰였다. 매우.
읽던 책이 무슨 내용인지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결국 리하르트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귀찮게 한다니까.”
만약 몬스터들이 습격하고, 그 과정에서 엘리사가 다치기라도 하면 알버트는 ‘그런 몸으로 애는 어떻게 낳냐’며 엘리사를 쫓아낼지도 모른다.
알버트가 다시 붙여 줄 다른 여자들보단 제게 흑심이 없는 엘리사가 나았다. 엘리사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유는 단지 그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외출용 로브를 입고 발코니로 나왔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서서히 리하르트의 주위로 모여든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싸더니, 그를 공중에 띄웠다.
차츰 땅에서 멀어지자, 차가운 바람이 리하르트의 폐부로 파고들어 그의 몸을 가득 채웠다. 마치 바람과 하나가 된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고도가 성 높이의 반쯤 될 정도로 높아졌다.
곧장 상점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리하르트는 황급히 성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군.’
다행히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알버트는 리하르트가 비행 마법을 사용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비행 마법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마법이라,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추락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공작가에 온 이후 지난 1년 동안 그의 눈을 피해 몰래 비행 마법을 수련했고, 덕분에 지금은 제법 능숙하게 비행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보는 눈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리하르트는 영지의 상점가 쪽으로 향했다.
*
“이것도 주세요.”
마을 광장의 식료품 상점에 들른 엘리사는 쿠키와 과자를 만들 각종 재료를 구매하고 있었다.
엘리사가 이혼 후에 시작할 사업으로 구상한 것 중 하나가 과자 가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벨린 성의 주인인 알버트와 리하르트는 과자를 일절 먹지 않았다.
그래서 루벨린 성에 쿠키나 과자를 만들 재료 같은 것들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해서 이참에 잔뜩 사 가기로 했다.
엘리사는 구매를 마치고 흡족한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
재료만 샀을 뿐인데 벌써 사업의 첫 단계를 이룬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 엘리사의 뒤로 앤과 물건을는 하인이 따라 나왔다.
그런데 조금 전과 달리 하늘이 많이 어둑해져 있었다. 비가 올 조짐이었다.
마침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작은 마님,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치 않은 것이 곧 비가 쏟아질 듯합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심이 어떠십니까?”
“북부의 봄비는 마님이 살아오신 남부의 봄비와 달리 많이 시리답니다.”
“그렇군요. 그럼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어서 가요.”
어차피 물건은 웬만큼 다 구매한 뒤였다.
엘리사는 앤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엘리사 일행이 탄 마차는 마을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나왔다.
본디 루벨린 성은 마을보다 북쪽에 있어 북쪽 문을 통하는 것이 빨랐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서쪽 문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차가 서쪽 문을 나서 얼마간 더 가자, 잘 닦인 길을 벗어나 자갈이 밟히기 시작했다. 그 충격으로 마차가 덜컹거렸다.
그 덜컹거림이 더 커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엘리사의 귀에 들려왔다.
“모, 몬스터다!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마차가 급정지했다.
그 반동으로 엘리사는 하마터면 앉은 곳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바깥의 상황이 더 큰 문제였다.
‘몬스터?’
엘리사가 놀라 창밖을 내다보려던 그때, 하인이 마부석으로 통하는 작은 창문을 열고 마차 안을 향해 소리쳤다.
“마님! 바닥에 몸을 웅크리십시오!”
엘리사와 앤은 얼떨떨했으나, 일단하인의 지시에 따라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밖에서 남자들의 기합 소리와 날붙이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투박한 소리가 났다. 곧이어 누군가 합세한 듯, 더 소리가 요란해졌다.
루벨린의 기사들과 행인들이 힘을 합쳐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듯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엘리사는 놀란 앤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자기 자신을 달래는 말이기도 했다.
두 아이는 어서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그 순간.
콰앙!
정체불명의 강력한 힘이 마차를 쓰러트렸다.
“꺅!”
엘리사와 앤은 기울어지는 마차를 따라 함께 뒤로 넘어졌다. 그 충격으로 몸이 마차 벽에 부딪히며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엘리사는 가까스로 의식을 붙잡고 주위 상황을 살폈다.
마차는 옆으로 넘어져 있었고, 엘리사와 앤은 마차 왼편의 창문 쪽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땅으로 막혀 있어 이 창문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반대쪽 창문으로 시선을 올렸다.
“..!”
그곳엔 거대 지네 형상을 한 몬스터가 침을 흘리며 엘리사와 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엘리사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마, 마님…….”
겁에 질린 앤이 울먹이며 엘리사를 끌어안았다.
‘루벨린의 기사들은 어떻게 된 거지? 하인들은?’
엘리사 역시 앤을 끌어안으며 지네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려 떨면서도 몬스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긴 싫어…..…!’
작은 창문 틈으로 엘리사와 앤을 바라보던 지네는 창문을 깨부수려 주둥이를 치켜들었다.
엘리사는 곧 다가올 충격을 예상하며 몸을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강한 바람이 지네를 밀어내며 도발했다.
곧이어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 상대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