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캬악!”
지네의 시선은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이 틈에 여길 나가야 하나? 아님 계속 여기 숨어 있는 게 맞나?’
잠시 망설이던 엘리사는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 쿠션을 밟고 올라서 마차 창밖을 내다보았다.
리하르트…!’
그곳에 예상대로 리하르트가 거대지네와 대치하고 있었다.
지네는 수많은 발 중 하나로 리하르트를 공격했다.
하지만 리하르트가 잽싸게 피하자, 이번엔 독이 섞인 침이 흐르는 주둥이로 리하르트를 내려찍듯이 공격했다. 지네의 주둥이가 언 땅에 박혔다.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한 리하르트는 지네의 뒤통수를 밟고 날아올라 지네의 뒤쪽에 가뿐하게 착지했다.
그제야 주둥이를 빼낸 지네는 리하르트를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이쪽이다.”
그사이, 리하르트는 습기가 가득한 바람을 모아 지네의 크기만 한 뇌우를 형성했다.
이윽고 뇌우가 지네를 삼켰다.
“키야아악!”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뇌우 안에서 지네는 번개로 지져졌다.
마침내 뇌우가 사라졌을 땐, 번개에 새까맣게 탄 지네의 사체만이 남아 있었다.
리하르트는 지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엘리사와 동행했던 하인들은 마차에서 튕겨져 나와 기절해 있었고, 기사들은 거대 지네와 함께 출몰한 소형 몬스터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마차 창문으로 겨우 눈만 내밀고 있던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리하르트는 곧장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마차 창문 쪽으로 날아올라 엘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 사를 마차에서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엘리사는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앤을 먼저 앞세웠다.
“이 아이부터 꺼내 줘.”
앤을 먼저 꺼낸 후, 엘리사를 안아든 리하르트는 제 목을 끌어안은 엘리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게 안긴 작은 몸이 아직도 떨고 있었다.
저도 무섭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저보다 작은 아이를 먼저 구해 주라며 양보한 것이다.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착하다고 해야 할지…….’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땅에 내려 주고 상태를 살폈다.
“다친 곳은?”
“나는 괜찮아.”
그때, 남자 세 명이 리하르트에게 다가왔다.
“혹시 루벨린 소공작님이십니까?”
조금 전,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던 행인들이었다.
바람과 번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루벨린의 힘을 받은 자만 가능하고, 현재 그 힘을 쓸 수 있는 루벨린의 핏줄은 리하르트뿐이었다.
그러니 리하르트의 힘을 보고 리하르트를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리하르트는 남자의 제복에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역시, 맞군요! 마침 루벨린 성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런 우연이…….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보아하니 황실의 기사 같은데, 여긴 무슨 일로 왔지?”
“아, 그게.”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리하르트에게 건넸다.
“황제 폐하께서 소공작님께 보내신 초대장입니다.”
황가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었다.
*
“장차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이가 보고 싶다, 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황제의 초대장을 받은 알버트는 빠르게 훑어보고는 옆에 있던 집사에게 초대장을 다시 돌려주었다.
엘리사는 집사의 손에 들린 화려한 편지를 유심히 보았다.
황제가 초대장을 보낸 목적은 빤했다.
제 딸이 차지했어야 할 자리를 빼앗은 앙큼한 아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공작이 그저 리하르트와 황녀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은 아닌지 확인하고자 하는 거지.”
그리고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지도 가늠해 보려는 것이고, 물론 알버트는 엘리사가 황제의 손에 제거되도록 두진 않을 것이다.
엘리사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루벨린의 자존심이니까.
‘그리고 원작에서도 엘리사는 무사히 살아남아 하네스를 낳으니까.’
엘리사는 잠자코 알버트의 결단을 기다렸다.
알버트는 수프용 스푼을 들며 입을 열었다.
“마침 제도에서 열리는 귀족 회의가 그쯤이니 며칠 일찍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황제가 달리 보복하진 못하겠지만, 초대를 피하는 건 루벨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사흘 후면 웅덩이도 말랐을 테지.”
수프를 먹으며 창밖의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알버트는 리하르트와 엘리사에게 명했다.
“사흘 후에 제도로 떠날 것이니, 채비해라.”
*
북부의 루벨린 성에서 제도까지는 마차로 장장 보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였다.
같이 떠나는 사용인 모두 긴 여정을 괴로워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웁!”
예를 들면, 멀미를 하는 사람.
마차가 멈추자마자 쏜살같이 마차에서 내린 앤은 근처 풀숲으로 뛰어들어가 구토를 했다.
어린 하녀 하나 때문에 일행이 모두 길가에 멈추게 되자, 모두의 눈총이 앤에게로 향했다.
알버트 역시 일정이 지체된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쓸모없는 계집 같으니……. 저것 하나 때문에 길바닥에 발이 묶일 순없다. 한 번만 더 마차를 멈춘다면버리고 갈 것이다.”
출발하기 전에 챙긴 멀미약이 있었지만, 마침 다 섭취해 똑 떨어진 참이었다.
멀미약은 꽤 고가의 물품이라 여행길에 스치는 작은 마을에선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멀미약을 구할 수 있는 큰 마을에 가려면 족히 반나절은 돌아가야 했다.
말을 타고 빠르게 다녀온다 해도 마차를 멈추어야 할 테니, 그동안 해가 저물 터였다.
그렇게 되면 별수 없이 길에서 야영을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모두가 꺼렸다.
알버트는 하녀 하나를 위해 그 모든 것을 감내해 줄 만큼 아량이 넓은 사람은 못 되었다.
‘아니, 애가 멀미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닌데!’
엘리사는 알버트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다.
특히나 앤은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어른들보다 증상이 심했다.
“앤, 괜찮아?”
엘리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마차에 오르는 앤의 안색을 살폈다.
“죄송해요…….”
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차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본디 하녀들은 주인과 함께 마차에 탈 수는 있지만, 같은 자리에 앉진 못했다. 딱딱한 마차 바닥이 그들의 자리였다.
‘저러고 있으면 멀미가 더 날 텐데….’
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엘리사는 앤의 팔을 붙잡았다.
“앤, 여기 앉아.”
엘리사가 가리킨 곳은 엘리사의 바로 옆자리였다. 앤은 흠칫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안 돼요.”
“괜찮으니까 올라와.”
“하지만…….”
앤은 머뭇거렸다. 누가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크게 혼날 테니까.
하지만 엘리사는 마차 양옆의 창문을 커튼으로 가리고 앤을 재촉했다.
“어서.”
앤은 슬그머니 의자에 앉으려다, 엘리사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리하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깨어 있던 리하르트는 그새 잠이라도 든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앤은 못 이기는 척 엘리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엘리사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잠시 리하르트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예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앤에게 쿠션을 건넸다.
“누워서 좀 자. 잠들면 괜찮아질 거야.”
“그, 그럴 수는 -”
엘리사는 앤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눈짓으로 옆의 리하르트를 가리켰다.
앤은 울 듯한 표정으로 엘리사를 바라보다, 재촉하는 엘리사의 입 모양을 보고 마지못해 의자에 누웠다.
엘리사는 그제야 그런 앤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작은 마님은 정말 천사 같으셔.’
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난 사람 중에서 엘리사가 제일 예쁘다는 걸.
아마 남은 평생 만날 사람 중에서도.
앤은 엘리사를 바라보다가 스르륵잠들었다. 고요한 마차 안에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그런 앤을 흔흔히 바라보고 있던 엘리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감아 줘서 고마워.”
그 목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리하르트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 오지랖이 엔릴해보다 넓겠어.”
‘엔릴해’는 서대륙과 동대륙 사이에 있는 거대한 바다였다.
이제 리하르트의 화법에 익숙해진 엘리사는 씩 웃으며 받아쳤다.
“눈감아 준 너도 마찬가지야.”
“…….”
“공범이잖아? 우리.”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옆에 있던 책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리하르트가 다음 페이지를 펼치려 는데, 가벼운 무게감이 그의 어깨를 콩 짓눌렀다. 그새 잠든 엘리사의 머리였다.
부드러운 금발이 리하르트의 목 근처를 간지럽혔다. 그 느낌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잠시 그대로 굳어 있던 리하르트는 이번에도 조용히 눈감아 주었다.
*
루벨린 공작가의 가솔들은 보름이 조금 지나 제도에 도착했다.
제도에는 귀족들이 각 영지의 본성에서 제도로 올라와 머무는 동안 거주하는 저택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루벨린 공작저가 명성에 걸맞게 가장 크고 화려했다.
하지만 보름이 넘는 긴 여정으로 지친 엘리사는 도착하자마자 저택을 구경할 새도 없이 잠들었다.
이튿날은 미리 측정하여 보내 둔엘리사의 신체 치수대로 드레스를 제작한 디자이너가 완성한 것들을 잔뜩 들고 왔다.
그 때문에 엘리사는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패션쇼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황궁으로 가는 날이 밝았다.
미리 저택에 와 있던 디자이너와 하녀들은 엘리사가 아침 식사를 끝냄과 동시에 단장을 시작했다.
“어쩜, 이리 고우실까!”
몇 시간에 걸친 단장을 끝마친 디자이너는 자신이 공들인 결과물이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꼭 공주님 인형 같으세요.”
“리하르트 님이 보시면 반하시겠어요.”
평소엔 과묵히 있던 다른 하녀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와아….’
평소 같으면 그러려니 넘겼겠지만, 오늘은 엘리사도 거울 속 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울 속의 소녀는 꽃잎처럼 하늘하늘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결 고운 금발은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그 위엔 페더 햇을 써서 봄 소풍 분위기를 물씬 냈다.
조그맣고 새하얀 얼굴에 커다란 연빛 눈망울, 앵둣빛 입술은 변함없었지만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그녀가 막 단장을 마친 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