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단장은 아직인가?”
“막 끝났습니다, 각하.”
알버트는 엘리사의 차림을 슥 훑었다.
디자이너는 초조한 표정으로 알버트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 엘리사를 훑어보던 알버트는 건조한 목소리로 평을 내놓았다.
“나쁘지 않군. 과연 제도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호칭에 걸맞은 실력이야.”
“과찬이십니다. 이것도 다 모델이 좋아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디자이너는 은근슬쩍 엘리사를 칭찬하는 것으로 겸양을 떨었다.
“그럼 가자.”
엘리사는 디자이너와 하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알버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네가 루벨린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상, 우리 가문을 욕보이는 일이 없도록 현명히 처신해야 할 것이다.”
알버트는 엘리사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는 분명했다.
“네 자리를 대체할 계집은 얼마든지 많으니.”
엘리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공작성에 오게 되었을 때부터, 이미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었답니다..’
알버트와 엘리사가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였다. 위쪽 계단에서 인기 척이 느껴졌다.
그곳을 돌아보자, 리하르트가 내려오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이마를 반쯤 드러낸 머리에, 금실 자수를 놓은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남색 코트에 금으로 세공한 루벨린의 문양 모양 배지가 달려 있었는 데, 엘리사의 가슴께에 달린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루벨린이다.
그것을 한눈에 보여 주는 표식이었다.
‘원래도 잘난 얼굴이긴 했지만, 오늘은 한층 더 잘났네.’
옆 사람 주눅 들 정도로.
엘리사는 홀린 사람처럼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서늘한 눈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리하르트는 계단 아래의 엘리사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동시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린 것도 같았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서 시선을 휙 돌리고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옆에 서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엘리사를 쳐다보지 않았다.
‘기분 나쁜 일 있나?’
엘리사는 평소 같으면 예의 무심한 눈으로 저를 빤히 바라볼 리하르트의 태도가 변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마차가 오는 바람에 잊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집사와 하인들은 마차에 오르는 세사람을 배웅했다.
먼저 알버트를 태운 마차가 출발하고, 뒤이어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엘리사는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는 제 눈을 피하던 리하르트가, 지금은 또 빤히 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져 불편했다.
‘왜 저렇게 쳐다보지? 혹시 내가 너무 예쁜가?’
그렇게 생각하자,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매번 제게 까칠한 말만 하는 리하르트를 조금 골려 주고 싶었다.
엘리사는 괜스레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새침한 표정으로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뭐 묻었어?”
엘리사는 부끄러워하는 리하르트의 반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어 엘리사의 옆머리에 붙어 있는 실밥을 떼어 냈다.
‘진짜로 묻어 있었냐!’
머쓱해진 엘리사는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고, 고마워.”
빨리 제 착각을 잊고 싶었던 엘리 사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조금 전 알버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화두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리하르트,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어떤 분이야?”
엘리사의 물음에 리하르트는 설핏미간을 찡그리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쓰레기.”
간단하고 명확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가 황실 사냥터 앞에 도착했다.
*
엘리사가 마차에서 내리자, 이미 도착해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엘리 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그저 묵례로 응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엄연히 공작가의 차기 안주인이니 먼저 자신을 낮추진 않되 적당히 예의를 차려야 했다.
‘부담스러워..….’
엘리사는 알버트의 말을 떠올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제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이 내심 불편했다.
“간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귀족들은 엘리사에게 묵례를 하고 알버트에게로 모여들었다.
엘리사가 훗날 공작가의 안주인이라고 해도 아직 어리니, 먼저 나서서 알은체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또 다른 마차 두 대가 다가왔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였다.
앞 마차에선 황제와 황태자가, 뒤마차에선 황후와 황녀가 내렸다.
‘홍염의 카이로트’라는 칭호답게 황제와 황태자, 황녀의 머리는 불꽃색과 같은 적발이었다.
“아렌시아의 타오르는 불꽃을 뵙습니다.”
귀족들은 황제와 그의 가족들에게 일제히 예를 갖추었다.
엘리사 역시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혹한의 겨울을 보내고, 이 따스한 봄날에 그대들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군.”
“두 분 폐하 모두 평안해 보이시니 마음이 훈훈합니다.”
황제가 먼저 운을 떼자, 귀족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인사치레를 거들었다.
마찬가지로 귀부인들과 인사를 나누던 황후는 문득 엘리사를 발견하고 말했다.
“저 아이가 루벨린의 차기 안주인인가?”
“그렇습니다.”
알버트가 대답했다.
엘리사를 바라보는 황후의 눈매가갸름해졌다.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루벨린의 엘리사가 아렌시아의 국모를 뵙습니다.”
“로엔그린의 아이라 해서 남부 촌뜨기 계집 같을 줄 알았더니, 이리보니 제법 제도의 아가씨 같구나.”
“제법 반반하게 생겼네요.”
황후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황태자 크리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엘리사가 나고 자란 로엔그린을 ‘촌’이라고 지칭하는 건 엄연히 엘리사를 깔보는 언사였다.
하지만 지금의 엘리사는 그곳에 대한 기억도, 애착도 없었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물론, 그 사실과는 별개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미카엘라, 네가 이 아이에게 제도 생활을 많이 알려 주려무나.”
“네, 어머니.”
“어쩜, 우리 딸은 심성도 고울까!”
“뭐, 이 정도야 황녀로서 당연한 거죠.”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함함하다면 좋아한다더니, 딱 그 짝이군.
엘리사는 서로 부둥부둥하는 황후와 황녀를 보며 혀를 찼다.
귀족들이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마칠 즈음, 가까운 곳에 식사 자리가 차려졌다.
식사 자리는 어른들과 아이들 자리로 나뉘었다.
“따라와.”
크리스티안은 귀족 아이들을 아이들의 자리로 데려갔다.
그곳에 흰색 차양막 아래, 먹음직한 음식들이 준비된 테이블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착석하려던 엘리사는 다른 아이들이 앉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돌아보았다.
“안셀, 오랜만이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크리스티안은 과장되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아르덴 백작 영식인 안셀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안셀은 그런 크리스티안이 두려운 듯 시선을 땅에 박은 채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결코 친한 친구 사이의 접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마차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리하르트,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어떤 분이야?’
‘쓰레기.’
다른 아이들은 그 광경이 흔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리하르트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긴 했지만, 저지하진 않았다.
“자, 여기가 네 자리.”
크리스티안은 안셀을 끄트머리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그 맞은편인 제일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여기가 내 자리. 이렇게 하면 잘 보이지?”
“…….”
“그 옆자리엔 뮬레트 백작가가 앉고, 맞은편엔……….”
크리스티안은 아이들의 자리를 제 마음대로 지정해 주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 든 아이들부터 자신과 가깝게,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은 멀리에.
아이들 사이를 훑던 크리스티안의 손가락이 엘리사에게서 멈췄다.
“그 자리엔 로엔그린 촌뜨기…
아니, 루벨린 소공작 부인께서 앉으시면 좋겠어. 내가 아직은 네가 낮설어서.”
그 말은 네가 나한테 하는 걸 봐서 자리를 바꿔 주겠다는 의미였다.
‘남주 애비답게 떡잎부터 쓰레기구 먼.’
엘리사는 속으로 크리스티안을 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크리스티안은 미래의 남주 아빠로, 엄연히 황족이지만 어째선지 카이로 트의 힘을 이어받지는 못했다.
그 탓에 훗날, 가문의 힘을 이어받은 자신의 아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시기하는 찌질이가 되고 말았다.
‘남주 아빠가 제대로 된 놈팡이인 경우는 잘 없지. 대부분 일찍 죽거나, 살아 있다 해도 개쓰레기거나, 둘 중 하나니까.’
엘리사는 당장에라도 크리스티안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이 알버트가 말한 ‘루벨린을 위한 현명한 처신’은 아닐 것이기에 참았다.
그때였다.
엘리사의 옆에 서 있던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리하르트, 네 자리는 여긴데?”
크리스티안이 가리킨 자리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였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건조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제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 자리가 제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놀란 건 다른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엘리사 역시 놀란 눈으로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내 편을………?’
그것도 한 번도 자신을 지칭한 적없던 ‘아내’라는 낯선 단어까지 써가면서.
리하르트의 대답에 잠시 멈칫했던 크리스티안은 그런 리하르트를 비웃었다.
“뭐야, 벌써 팔불출이 다 됐네? 여느 덜떨어진 놈들처럼 말이야.”
크리스티안이 킬킬거리며 웃자, 다른 아이들도 크리스티안을 따라 웃었다. 기괴한 풍경이었다.
엘리사는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다며 리하르트를 괴롭히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크리스티안은 의외로 리하르트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거기 앉아야지.
나머지는 다 전에 앉았던 순서대로 앉아.”
모두가 착석하고 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크리스티안은 시종이 가져온 포도 주스를 유리잔에 손수 콸콸 따랐다.
그러고는 그것을 시종에게 건넸다.
“첫 잔은 당연히 먼 길 온 친우에게 먼저 줘야지.”
시종은 포도 주스가 넘치도록 든 유리잔을 들고 안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안셀의 머리에 포도 주스를 그대로 부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고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