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게 무슨………!”
안셀의 바로 옆에 있던 엘리사는 깜짝 놀라 주위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놀란 사람은 오직 엘리사뿐이었다.
주스를 부은 시종은 울먹거리며 안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상황을 보고 있던 크리스티안이 성큼성큼 다가와 시종의 뺨을 철썩때렸다.
“내가 분명 조심해서 가져다주라고 했을 텐데? 이런 칠칠치 못한 놈같으니라고.”
크리스티안은 시종을 밀어내고 안셀에게로 몸을 굽혀 상태를 살폈다.
얼핏 보기엔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 같았다.
“미안, 미안. 저놈이 손을 좀 떨어가지고, 아이, 미안해서 어쩌지?”
하지만 안셀을 걱정하는 듯하던 크리스티안의 입에서 미처 참지 못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흐흑……. 야, 근데 너 보라색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 앞으로 포도 주스로 머리 감고 다니는 게 어때?”
“아하하!”
크리스티안의 말에 황녀 미카엘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어설프게 따라 웃기 시작했다. 웃기지 않는데도 억지로, 마지못해 웃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중에서 웃지 않고 있는 건 엘리 사와 리하르트, 그리고 안셀뿐이었다.
‘진짜 미친놈 아냐?’
기가 막힌다는 듯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사는 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안셀에게 건넸다.
“이걸로 닦아.”
안셀은 흠칫 놀라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엘리사의 호의에 놀란 건 안셀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안 역시 얼이 빠진 표정으로 엘리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안셀이 제 손수건을 차마 받지 못하자, 직접 안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소공작 부인께서는 심성도 고우시네.”
크리스티안은 시종에게 포도 주스와 빈 유리잔을 가져오게 해서 따랐다.
“소공작 부인께도 한 잔 드려야지.”
그리고 크리스티안이 직접 이동해서 엘리사의 머리 위로 포도 주스를 부으려는 그 순간.
“꺄악!”
갑자기 강풍이 불어와 차양막을 뒤집어 놓았다. 순간적으로 사람조차 비틀거리게 할 정도의 강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 몸이 휘청인 크리스티안은 들고 있던 포도 주스를 제 옷에 그대로 쏟고 말았다.
뒤늦게 옷을 털어 봤지만, 이미 옷은 보라색으로 물든 뒤였다.
“이런 미친!”
크리스티안은 욕설을 읊조리며 유리잔과 포도 주스가 든 병을 집어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 엘리사의 페더 햇이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리하르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네 짓이지?”
리하르트는 예의 무심한 눈으로 크리스티안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크리스티안이 리하르트를 때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다혈질인 크리스티안은 평소 시종들과 하녀들이 제 심기에 조금만 거슬려도 손찌검을 하곤 했다.
그런 크리스티안의 성격을 알고 있는 시종은 크리스티안을 붙잡으며 말렸다.
“저, 전하.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안 놔?”
제 분에 못 이긴 크리스티안은 애먼 시종의 뺨을 쳤다. 하지만 시종은 굴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다.
크리스티안이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루벨린 공작의 적자인 리하르트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결국 크리스티안이 시종에게 끌려가다시피 사라지고, 멀거니 서 있던 미카엘라는 한 박자 늦게 그를 쫓아갔다.
“오, 오라버니!”
소란의 원흉이 사라지자 식사 자리는 조용해졌다.
당황한 아이들의 시선은 이 사달을낸 안셀과 엘리사, 그리고 리하르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휙 돌아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 뒤를 쫓으려는 엘리사를 안셀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고, 고맙습니다.”
“아냐. 고마워할 일도 아닌걸.”
엘리사는 멋쩍은 얼굴로 그 인사를 받고 곧장 리하르트를 쫓아가려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먹음직한 샌드위치 두 개를 들고 리하르트의 뒤를 쫓았다.
“리하르트.”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불렀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고마워. 도와줘서.”
“……넌 루벨린이야. 그래서 도와 준 것뿐이라고.”
“알아. 어쨌든 날 도와줬잖아.”
엘리사는 씩 웃으며 들고 온 샌드위치 하나를 리하르트에게 건넸다.
“고마워, 남편.”
무심히 걷던 리하르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엘리사는 자신을 쳐다보는 리하르트를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잠시 굳어 있던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건네는 샌드위치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 돌아서 걸어갔다.
‘쟤가 왜 저러지?’
엘리사는 돌아선 리하르트의 귀 끝이 빨개져 있는 걸 보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사를 마친 귀족들과 황제, 황태자는 사냥을 시작하기 위해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 무리에는 리하르트와 크리스티안을 비롯한 제법 큰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엘리사는 다른 귀부인들, 영애들과 함께 티타임을 즐길 시간이었지만, 드레스에 튄 포도 주스를 지운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엘리사와 앤이 숲으로 들어가려 하자, 숲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동행했다.
얼마간 엘리사와 앤을 따라가던 기사는 걸음을 멈췄다. 드레스를 빠느라 벗을 수도 있으니 기사는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엘리사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페티코트만 입은 레이디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실례였다.
“계곡은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더 가시면 있습니다. 나무에 노란 리본이 묶여 있으니 길을 찾기 쉬우실 겁니다.”
“네.”
“황실 사냥터는 저희가 지키고 있으니 안전하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가까운 거리에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엘리사와 앤은 기사를 두고 조금 더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사의 말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곡이 있었다.
엘리사는 드레스를 훌렁 벗었다.
어린아이용 드레스였기에 벗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으음, 잘 안 씻기네요.”
앤이 물에 담긴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럽게 문질러 봤지만, 한 번 물는 포도 주스는 잘 빠지지 않았다.
엘리사가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예뻤는데, 어쩔 수 없지.”
엘리사는 아쉬운 대로 얼룩이 덜지워진 드레스를 다시 입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의하고.”
‘어디서 말소리가?’ 눈이 마주친 엘리사와 앤은 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말소리는 계곡 아래, 성인 키 높이의 두 배 정도 되는 작은 벼랑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곳엔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세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옷에는 황실의 문장도, 가문의 문장도 붙어 있지 않았다.
‘뭐지? 황실 사냥터에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엘리사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옆에 있던 앤도 덩달아 엎드렸다.
다행히 남자들은 벼랑으로 이어지는 작은 폭포 소리에 묻힌 두 사람의 기적을 못 느낀 듯했다.
남자 중 한쪽 눈썹에 칼자국이 있는 이가 앞장서며 말했다.
“명심해라. 목표는 루벨린 소공작이다.”
“….!”
엘리사와 앤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탄성을 손으로 막았다.
남자들은 금세 숲 안쪽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숨죽이고 있던 엘리사는 그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하르트가 위험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리하르트가 위험에 처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 혼자서 이 일을 해결할 수는 없으니, 누군가에게 서둘러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엘리사는 앤과 함께 서둘러 기사가 기다리고 있는 계곡 입구로 나왔다.
“경! 지금 사냥터에……!”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사에게 수상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엘리사는 말을 멈췄다.
‘만약…… 저 수상한 사람들이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라면?’
그렇다면 황궁의 기사에게 이야기해선 안 된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죠.”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그리고 기사와 함께 서둘러 숲 밖으로 나왔다.
‘공작을 찾아야 해.’
그가 순수하게 리하르트를 아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지금 이곳에서 리하르트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줄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하지만 숲을 나왔을 때, 사냥을 갔던 귀족들은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다. 알버트는 물론이고, 리하르트도.
“마님, 이제 어떡하죠?”
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엘리사는 무언가 떠오른 듯,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알버트가 대동하고 온 루벨린의 기사들이 있었다. 오고 가며 얼굴을 익힌 자도 있었고, 처음 보는 자들도 있었다.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농담 따 먹기를 하고 있던 기사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다가온 엘리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작은 마님?”
“소공작님께서 위험에 처하셨어요.
경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
“서둘러 숲으로 들어가서 소공작님을 찾고 호위하세요.”
엘리사의 말에 기사들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웃음을 터트렸다.
“제국 최고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황실 사냥터에서요? 꿈이라도 꾸신 건 아니고요?”
“꾸, 꿈이 아니에요. 저도 봤어요.”
기사들이 킬킬대며 엘리사를 비웃자, 옆에 있던 앤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엘리사의 말을 거들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엘리사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잠꼬대는 그만하시고, 돌아가서 티타임을 즐기시는 게……….”
엘리사는 자신을 돌려보내려는 기사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 표정에 결의가 어려 있었다.
“물론, 경들의 말대로 내 이야기가 꿈일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천만다 행이지만, 만약 내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그래서 만약 소공작님께 문제가 생긴다면?”
“…….”
“그럼 공작 각하께서 경들을 가만히 두실 거라 생각하나요?”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표정 역시 싸늘했다.
그 기세에 기사들은 움찔했다.
“그대들은 내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니, 내 명령을 따를 이유는 없어요. 하지만.”
“…….”
“그대들은 루벨린에 목숨을 건 피의 맹세를 했습니다. 그 맹세를 지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