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말을 마친 엘리사는 옆에 있던 말에 올라탔다.
말을 타 본 건 수학여행에서 체험수업을 들었을 때가 전부였지만, 지금 리하르트를 찾으려면 발로 뛰는 건 느렸다.
그런데 다행히 엘리사의 몸은 말을 타는 법을 익힌 적이 있는 것인지, 능숙하게 말을 타고 고삐를 잡았다.
“가자.”
엘리사는 말의 옆구리를 차며 말했다.
말은 엘리사의 명대로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마님!”
엘리사의 기세에 굳어 있던 기사들이 놀라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쫓아올거야.’
어쨌든 알버트에게 자신은 귀중한 패니까.
엘리사는 기사들이 자신을 다치게 두지는 않을 거라 판단했다.
엘리사가 말을 타고 숲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예상대로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원작에선 리하르트가 멀쩡히 살아하네스를 낳았지만…….’
그사이에 원작과 다른 변수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이미 자신이 엘리사에 빙의한 것 자체가 이 원작 소설의 변수가 되었을지 모르니까.
원작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바뀔지는 아무도 몰랐다.
엘리사와 기사들이 한참이나 리하르트를 찾아 숲속을 헤매던 그때였다.
‘바람?’
숲 안쪽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이건…… 리하르트의 바람이야.’
엘리사는 말의 옆구리를 한 번 더 차며 고삐를 틀었다.
“이쪽!”
엘리사와 기사들은 바람을 쫓아 숲안쪽으로 향했다.
점점 더 들어갈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급기야는 말에 탄 엘리사까지 휘청일 정도가 되었다.
‘리하르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엘리사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만큼 더 빨리 말을 몰았다.
좀 더 바람의 중심으로 다가가자, 거친 바람이 엘리사의 머리를 흩트려 시야를 가렸다.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자, 가려졌던 시야가 보였다.
그리고 엘리사는 그대로 멈춰 섰다.
숲의 중심엔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소용돌이는 주변의 풀과 나무는 물론, 조금 전 엘리사가 봤던 수상한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은 남자들을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리하르트…!’
리하르트가 있었다.
핏빛의 두 눈에 엘리사가 본 적없는 살기를 드리운 채로.
바람에 휘말리지 않은 근처의 괴한들이 리하르트를 향해 석궁을 쏘았지만, 모두 리하르트가 일으킨 압도적인 바람에 궤도가 비틀려 빗나갔다.
공격이 전부 빗나가자, 당황한 괴한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때,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바람 소리가 거세어 목소리는 들을 수는 없었지만,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입 모양으로 그가 한 말을 알아챘다.
‘죽어라.’
그와 동시에 리하르트의 바람이 멈췄다.
그러자 소용돌이에 휩쓸려 공중에 떠 있던 괴한들이 그대로 떨어져 땅에 처박혔다. 이윽고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운이 좋은 자는 팔과 다리가 부러 지고, 운이 나쁜 자는 목이 꺾였다.
끔찍한 결말이었다.
동료들의 처참한 마지막을 본 주위의 괴한들은 겁에 질려 달아났다.
넋 놓고 있던 루벨린의 기사들이 금세 괴한들의 뒤를 쫓았다.
“거기 서라!”
그들이 사라지고, 리하르트의 바람도 완전히 멎었다.
그제야 리하르트의 옆구리와 어깨에 난 상처를 발견한 엘리사의 눈이 커졌다.
‘상처가….’
상처가 꽤 깊은지, 리하르트가 섰던 자리에 꽤 많은 양의 피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리하르트의 표정은 덤덤했다. 옆구리와 어깨에 난 상처에서 일말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괴물 같은 새끼……….”
근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티안이 겁에 질린 눈으로 중얼거리며 뒷걸음질했다.
크리스티안의 뒤엔 사냥을 온 다른 귀족들이 있었다. 그중에 황제와 알버트도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황실 사냥터에 자객들이 들어오다니요?”
귀족들은 크리스티안과 마찬가지로 놀람과 동시에 경외의 표정으로 웅성거리며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황제 역시 놀란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다 표정을 굳혔다.
쓰러진 괴한들 사이에 홀로 위태롭게 서서 귀족들과 황제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결국 상처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리하르트!”
리하르트 님!”
엘리사와 함께 루벨린의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달려 나가 리하르트를 받아 안았다.
엘리사는 재빠르게 리하르트의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아.’
리하르트의 상처를 살펴보는 엘리 사의 눈동자가 떨렸다.
가까운 누군가가, 자신의 눈앞에서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어서, 치료를 해야…….”
엘리사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알버트를 다급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리하르트를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신 루벨린의 기사들이 급한 대로 리하르트의 상처를 지혈했다.
“폐하! 황태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때, 제일 늦게 현장으로 온 황궁의 기사단장이 황제와 크리스티안의 안위를 살폈다.
황제는 표정을 잔뜩 구기며 물었다.
“황실의 사냥터에 외부인이 침입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소, 송구합니다. 분명 사냥터 주변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어떻게 저런 놈들이 대거로 들어왔느냐 물었다.”
“..…최대한 빠르게 정황을 파악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변명하던 기사단장은 주군의 기분을 파악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기사들이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이 일이 있을 당시 주변에 있던 귀족 자제들을 데려가려던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알버트가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폐하께 드릴 청이 있습니다.”
황제는 의아한 눈으로 알버트를 쳐다보았다.
“제가 이번 사건의 배후를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유감스럽지만, 그럴 순 없소. 이번 일은 황실의 사냥터에서 일어난 일이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감히 황실의 사냥터에서 이런 짓을 꾸몄는지 내 직접 파헤칠 것이오.”
“저 아이는 이제 제게 남은 유일한 혈육입니다. 그런 아이가 이곳에서 죽을 뻔했습니다. 저야말로 손주를 위해 가장 절박하고 진실된 수사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에 황제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알버트의 말에는 황제가 리하르트를 위하는 사람이 아니니 믿을 수 없다는 속뜻이 숨어 있었다. 황제를이 일의 배후로 의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부디 제가 그 배후를 파헤쳐 그들이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는 제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는 알버트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다, 시선을 들었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더 이상 고집을 부리면 황실이 자객들의 배후라고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황제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허하겠다.”
*
결국 사냥은 무산되었다.
루벨린 공작가의 일원들은 리하르트를 데리고 공작저로 돌아왔다.
“출혈은 잡았고, 상처는 그리 깊지 않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리하르트를 치료한 주치의는 그렇게 당부하고 방을 나갔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작은 마님.”
하인들까지 나가고, 방에 잠든 리하르트와 엘리사만 남겨졌다.
엘리사는 침대맡에 앉아 리하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배후는…… 역시 황실일까.’
하지만 하필 황실 사냥터에서, 그렇게 뻔히 보이게 리하르트를 노리는 건 멍청했다.
루벨린과 황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누구라도 제일 먼저 황실을 의심할 텐데.
‘공작은 뭔가 의심 가는 게 있는 건가.’
알버트는 사냥터에서만 잠깐 리하르트의 상태를 훑어보았을 뿐, 공작저에 도착해서는 곧장 루벨린의 기사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며 배후를 밝히는 데 착수했다.
리하르트가 진찰받는 것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친할아버지 맞아? 리하르트가 루벨린의 힘을 쓰는 걸 보면 친할아버지가 맞는 거 같긴 한데… 어떻게 그렇게 무심하지?’
알버트의 태도에 엘리사가 입술을 삐죽이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앤?”
문 앞에 앤이 서 있었다. 달려왔는지 숨은 거칠었고, 왜인지 얼굴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드, 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앤은 방 안쪽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의아했지만, 일단 앤을 안으로 들였다.
앤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문부터 잠갔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왜 그래?”
“마, 마님. 저…… 방금 들었어요.”
“뭐를?”
“소공작님을 저렇게 만든 사람이요.”
멀뚱히 바라보던 엘리사의 눈빛이 돌변했다.
앤은 숨을 잠시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소공작님을 저렇게 만든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