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앤의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는 아이를 돌려보내고 다시 침대맡에 앉았다.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빛이 심란했다.
‘소공작님을 다치게 한 사람은 공작 각하세요.’
‘…뭐?’
조금 전에 부엌에서 나오는데, 공작 각하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손님은…… 그 남자였어요. 오늘 마님과 제가 사냥터에서 봤던 눈썹에 흉터가 있는 남자요.’
‘……. !’
‘그래서 몰래 따라가서 들었어요.
공작 각하의 집무실에서 하는 이야기를요.’
앤의 이야기를 듣자, 오늘 사건에서 가장 미심쩍던 부분이 납득이 되었다.
왜 이렇게 배후가 누구인지 뻔히 추측할 수 있는 사건이 황실 사냥터에서 일어났는지, 알버트가 왜 황제에게 이번 사건의 수사를 요청했는지, 나아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그리고 알버트가 리하르트의 상태를 한 번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던 이유도.
‘루벨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이번 일을 벌인 거야.’
리하르트를 이용해서, 루벨린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미쳤어. 어떻게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그럴 수가…….’
엘리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치가 떨렸다. 리하르트가 다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다치길 의도하며 일을 벌이다니. 이건 명백한 학대였다.
‘이걸 리하르트에게 알려야 할까?’
엘리사는 망설였다.
“리하르트가 알면 공작가를 나가려나. 그렇게 되면 나는…….”
리하르트가 공작가를 나가면 알버트가 더 이상 자신을 이곳에 둘 이유가 없어진다.
공작가에서 쫓겨나게 되면, 자신은 고아원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길거리를 떠돌게 되거나.
아늑한 생활이 끝나는 것이다.
‘그래도……… 알려 줘야 해.’
이대로 아늑한 삶이 끝나더라도, 리하르트에겐 마음의 상처가 되더라도.
리하르트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 자신을 어떤 위험에 빠트리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둘 순 없었다.
그런 삶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
그때, 리하르트의 손가락 끝이 움찔 떨리더니 리하르트가 눈을 떴다.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엘리사를 물끄러미 보던 리하르트는 눈을 움직여 주위를 살펴보더니, 상황을 파악한 듯 다시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엘리사가 물었다.
“몸은 좀 어때?”
왜 안 자고 있어?”
잠이 안 오는 이야기를 들어서, 라고 말하려던 엘리사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왜냐니. 남편이 아프니까 간호해 주고 있었지. 고맙지?”
이럴 때 점수를 따 놔야지.
엘리사는 이때다 싶어 자신의 수고를 생색냈다. 사실 자신이 한 것이라곤 옆자리를 지켜 준 것뿐이지만.
‘뭐, 내가 머물 방이 이곳뿐이라 있었던 것이긴 한데……. 그런 건 생략하고.’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는 황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시선을 피하는 그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지만, 엘리사는 어둠 때문에 보지 못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시선을 피해 돌아누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필요 없으니까 잠이나 자.”
“하여간 신경 써 줘도.”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까칠함에 내 심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리하르트에게 할 이야기가 떠올랐다.
“리하르트, 있잖아. 네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어.”
“해.”
리하르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엘리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를 다치게 한 사람…… 네 할아버지야.”
리하르트는 반응이 없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어떤 감정인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잠시 리하르트의 반응을 살피던 엘리사가 말을 이었다.
“계곡에 갔다가 수상한 사람을 봤어. 너를 공격했던 그 사람들. 그 사람 중 한 명이 좀 전에 저택에 와서 공작 각하를 만났대. 앤이 말해 줬어.”
“…….”
“아무래도… 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알아.”
“어?”
“알고 있다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하는지, 어떤 인간인지.”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남 얘기를 하듯 덤덤했다. 동요 없는 리하르트의 말에 엘리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리하르트가 충격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 대화로 충격을 받은 건 다름 아닌 엘리사였다.
리하르트를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 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 알고도 이 집에 있는 거야?”
“아니까 이 집에 온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조금 전까지 엘리사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던 리하르트가 이번엔 입을 다물었다.
엘리사는 잠자코 리하르트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사생아야.”
“…….”
“그것도 평민의 피가 섞인 반쪽짜리.”
리하르트는 소공작과 평민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렇게 태어난 리하르트는 공작가의 밖에서 외숙부에게 길러졌다.
그의 외숙부는 공작가에서 돈을 받아 낼 목적으로 리하르트를 데리고 공작가를 찾았으나, 알버트는 자신의 혈육이 아니라며 모른 체했다.
“내 아버지라는 자가 살아 있을 때, 공작은 나를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
그리고 외숙부가 공작가를 찾은 그날, 집에 괴한이 침입했다. 그 배후는 분명했다.
알버트는 자신의 아들이 가진 치부를 세상에서 없앨 생각이었던 것이다.
리하르트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알버트의 생각을 알게 된 외숙부는 겁에 질려 조카를 버리고 도망쳤다.
홀로 남겨진 리하르트는 살아남기위해 루벨린의 힘을 숨긴 채 여러 길드를 전전했다.
그렇게 열네 살이 된 어느 날.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 했던 조부가 찾아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고 나니 그가 나를 찾아왔어. 후계자가 되라고.”
그에겐 죽은 아들 대신 가문의 대를 이어 줄 손자가 필요했다. 자신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적자가.
고작 방계 따위에게 넘기기 위해 일평생을 바쳐 지킨 가문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리하르트가 이어받은 아들의 피와 가문의 힘이라면 황실을 위협하기에도, 가신들에게 내보이기에도 좋을 터였다.
그 속내를 눈치챈 리하르트는 웃었다.
그토록 저를 죽이려던 자가, 이제 제 목숨에 전전긍긍하게 된 꼴이라니. 우습지 않나.
그의 눈앞에서 이 목숨을 끊으면 어떨지 궁금했으나, 리하르트는 생각을 바꿨다.
“나는, 내 손으로 이 가문의 대를 끊으려고 여기 온 거야.”
엘리사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리하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저 질풍노도의 시기라 까칠한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멋대로 오해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동시에 어려운 이야기를 해 준 리하르트에게 고마워졌다.
이런 이야기를 제게 했다는 건, 자신을 믿어 준다는 거니까.
‘이런 애를 강제로 취해 아이를 가지다니….’
그러니 원작에서 엘리사와 하네스를 그토록 싫어할 수밖에.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팔을 제게로 당겼다. 그에 흠칫 놀란 리하르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야?”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손을 악수하듯 잡았다.
“내가 네 편이 되어 줄게.”
엘리사가 씩 웃으며 잡은 손을 흔들었다.
제 편이라곤 하나 없는 이 공작저에서 오직 복수를 위해 버티고 있는 어린 남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잘 부탁해.”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와 그녀에게 잡힌 제 손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다부지고 조그마한 손을, 그리고 저를 향해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차마 밀어내진 못했다.
*
“부르셨습니까, 폐하.”
이른 아침, 황제의 예비 사돈인 펠리스 후작이 황제의 침실에 들어섰다.
황제 로암은 아직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편안한 가운 차림으로 혼자서 체스 말을 두고 있었다.
“앉지.”
펠리스 후작은 황제에게 예를 갖추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체스 판의 꽤 많은 말들이 이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중 돋보이는 건 적진의 가장 가까운 칸 바로 앞까지 나가 있는 폰이었다.
로암은 그 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난 밤, 크리스티안이 악에 받쳐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괴물 같은 새끼는 미리 죽여야 해요, 아버지! 살려 두면 분명 우리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요.”
로암은 며칠 전 사냥터에서 보았던 리하르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장정 수 명을 거뜬히 상대하던 그 거센 폭풍. 그건 확실히 압도적인 힘이었다.
‘폭풍의 루벨린. 그 호칭에 꼭 걸 맞은 괴물이었지.’
로암은 그 힘에서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기감을 그만 느낀 것이 아닌 듯, 그 사건 이후 루벨린 공작가에 드나드는 귀족들이 전보다 늘었다고 들었다.
‘여우 같은 놈들.’
귀족들은 간사한 여우 같아서, 권력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자신에게 더욱 큰 콩고물이 떨어지는 쪽으로 붙는다.
그들이 루벨린 공작가로 모여들고 있다는 건, 루벨린이 황실보다 더욱 강하다고 판단한다는 뜻이었다.
로암의 손가락이 폰을 톡 건드렸다. 펠리스 후작의 시선도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레이모어. 그대라면 장차 퀸이 될지도 모를 폰을 어찌하겠나?”
로암이 뜻하는 ‘폰’이 누구인지 알아챈 펠리스 후작의 눈빛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러나 차분히 웃으며 답했다.
“그야 당연히 없애셔야지요. 내버려 두면 분명 폐하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명분도 없고, 강제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면?”
“명분이야 만들면 됩니다.”
“명분을 만든다?”
“형제의 맹약을 이용하십시오, 폐하.”
형제의 맹약이란, 아렌시아 제국의 건국 당시 공헌한 4대 가문 간의 맹약을 뜻했다.
그 맹약의 내용은 이러했다.
카이로트와 루벨린, 세리어트, 에스더는 형제의 우애를 나누었으니.
세 가문이 정의로운 이유로 반역을 일으킨다면 황실은 가문을 멸문시킬 수 없으며, 황실이 도움을 청한다면 세 가문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황실을 수호해야 했다.
그 맹약을 이용하면 직접 죽일 수는 없어도, 소공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다.
펠리스 후작은 교활한 뱀처럼 웃으며 속살거렸다.
“제게 그 맹약을 이용할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